(제 44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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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의 자동차들과 장사군들의 짐마차가 쉼없이 오가는 길에 풍을 씌운 호화마차 한대가 달려가고있었다. 녕안에서 액목쪽으로 뻗은 큰길을 달리고있는 풍마차에는 백송로와 그의 딸 현경이외에 또 한 녀성이 타고있었다.

그 녀자는 진옥이였다. 백송로의 무릎모포를 이마언저리까지 덮고 마차의 뒤자리에 누워있는 진옥은 완전한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백송로는 이따금 고개를 돌리고 숨소리 한점없이 마차의 진동에 머리를 흔들리우고있는 처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찼다.

아침나절에 남호두의 남쪽골짜기로 뻗은 오솔길을 지나오다가 눈속에서 허우적이는 처녀를 구원하여 마차에 실었을 때는 간간이 숨소리가 있는것 같더니 이제는 그 가날픈 소리마저 끊긴지 오래였다.

얼굴은 시간을 따라 백지장처럼 하얘지고 입술은 약간 억물린듯 한 검푸른 빛으로 변해갔으며 언제 그렇게 내려감겼던지 알수 없는 눈까풀은 약간 도도록한 눈망울을 유난히 찬빛으로 고요히 감싸고있었다.

마차바퀴는 별로 요란하게 덜커덩소리를 울리며 마차를 한쪽으로 실그러뜨리는가 하면 때없이 공중뜀도 하면서 곰가죽 한장을 깔고 누워있는 진옥의 몸을 이쪽저쪽으로 굴렸다. 그때마다 진옥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마차가 좀더 고르로운 길에 나서서 큰 진동이 없이 언땅에 부딪치는 말발굽소리와 워낭소리만을 가락맞게 울리면서 달려갈 때 다시금 처녀는 끝을 알수 없는 심연속으로 빠져드는것이였다.

백송로는 조용히 모포를 들치고 마차바닥에 맥없이 떨어져있는 진옥의 손을 잡고 온기를 가늠해보았다. 숨을 가진 사람의 손이라고 하기 어려울만치 차고 선뜩선뜩하였다.

백송로는 자기 손바닥의 미적지근한 열로나마 유격대녀성에게 온기를 보태주려는듯 처녀의 손을 이윽토록 놓지 못하였다.

늙은이에게는 유격대녀성의 불상사가 남의일같이 생각되지 않았다.

이제 이 북만땅에서 몇천리밖의 상해로 떠나보내려는 현경의 앞길에도 무슨 일이 부닥칠지 어떻게 알겠는가?

백송로는 남의 자식같지 않는 유격대녀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약간 갸름한 얼굴에 유난히도 귀여운 코가 오똑 솟아있고 입술이며 눈언저리며 귀바퀴며 턱의 부드러운 곡선미며가 모두 어쩌면 그렇게도 섬세할가싶은 처녀는 이 북만땅의 눈덮인 황야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유격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백송로에게는 처녀의 몸에 걸쳐진 두툼한 솜저고리며 남자들이 쓰고다니기에나 편리한 털이 부수수한 개가죽모자며 종다리를 둘러친 행전이며 몇군데 꿰여져 솜이 들여다보이기는 하나 아직도 생생하고 물색도 날지 않은 솜신이며가 모두 처녀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남의 물건같았으며 이제라도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면 현경이의 몸에 걸쳐져있는것 같은 저런 쎄라복을 찾고 녀학교빠찌가 달린 교복을 찾고 구두를 찾고 쟈케트를 찾고 하며 그것을 총총히 걸치고 자기가 피흘리고 쓰러진 이 을씨년스러운 북만등판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딴세상으로 훨훨 걸어갈것 같았다.

(어허, 기막힌 세상이로다!)

백송로는 무너지게 한숨을 내쉬고 눈을 슴벅슴벅하였다. 유격대에 참군했거나 독립군에 들어갔거나 할것없이 한때의 젊은 피를 끓이며 총들고 나섰던 사람들은 이 처녀와 같이 누구의 말달구지에 실려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지 못하면 이방의 무주고혼이 되고마는것이라고 그는 쓸쓸히 생각하고있었다.

《아버지, 이대로 가다가는 이 녀성을 길거리에서 잃어버리고 말겠어요. 아무데서나 의원을 찾아 부상처를 치료해야 하지 않을가요?》

현경은 시각을 따라 꺼져가는 진옥의 얼굴을 살피면서 공포에 질려 입술을 떨었다.

《아서라, 그런게 아니란다. 부상당한 유격대녀자를 데리고 어디라고 함부로 의원을 찾는단말이냐. 천생으로 숨이 붙어나면 너희 고모네 집에 내려가 병구완을 해보자꾸나. 이렇게 귀엽고 알뜰한 처녀가 어떤 연고로 유격대에 들어와 이 봉변을 당하게 되였는지는 실로 알수 없으나 아무튼 나라찾는 싸움에 나섰다가 이모양이 되지 않았느냐. 내가 고뿔을 만나 송로인댁에 며칠 앓아눕지 않았던들 이 유격대원처녀를 길가에서 만나지 못했을번했구나. 정말 다행한 일이다.》

백송로는 진옥의 일로 하여 길가의 음식점에도 들리지 못하고 대구촌까지 그냥 말을 때려몰았다. 대구촌에는 백송로의 막역한 친지의 조카가 려관을 경영하고있었으므로 거기서 하루밤 언몸을 녹이고 다시 길을 떠나 마록구의 마재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누이네 집을 향해 마차를 달렸다.

진옥이가 가고있는 이 길은 원정부대의 행군로정과 같은 방향으로 뻗어있었다. 그사이의 거리는 불과 두세마장밖에 안되였다. 어떤 때는 한마장안팎으로 줄어들기도 하였다. 먼 후날에 가서야 이때 일을 알고 장군님도 한흥권이도 몹시 가슴아파했지만 원정부대의 전방척후는 몇번이나 마록구방향으로 달리는 풍마차를 바라보기도 했던것이다. 참으로 운명의 곡절이란 유난한것이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안타까이 찾으시는 진옥이가 장군님곁에서 가고있었을뿐만아니라 한흥권중대에 억류되였던 백송로의 마차에 그의 둘도 없이 귀중한 사람인 진옥이가 실려있었던것이다.

현경이의 고모댁에 무사히 도착한 진옥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목적으로 뒤골방에 자리를 정하게 되였다. 비록 뒤골방이라고는 하지만 안방못지 않게 산뜻한 방이였다. 벽에는 하얗게 종이도배를 하고 바닥에는 돗자리를 깔았으며 지게문 아래쪽에 유리까지 붙여 방은 제법 환하였다.

현경은 이 방에서 진옥이와 함께 거처하면서 그의 간호를 직심스레 하였다. 약은 고모가 구해들이고 그것을 상처에 바르고 먹이고 시중하는 일은 모두 현경이가 하였다. 진옥이에 대한 백송로의 생각이 그렇게 쓸쓸하고 동정에 겨웠던것처럼 현경이 역시 부상을 입고 한지에 나앉은 유격대처녀를 심심히 동정하고 불쌍히 여겼으며 무슨 힘으로든 그의 상처를 고쳐주려고 애를 썼다.

이렇게 며칠을 보낸 어느날, 현경은 앞산 잣나무밭으로 올라가 잣송이를 따가지고 진옥이를 간호하는 뒤골방으로 들어갔다.

《고모가 잣을 따오면 잣죽을 쑤어주겠다고 하기에 동리총각애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몇송이 따왔어요.》

현경은 신문지를 펴놓고 송곳으로 잣송이를 부지런히 까면서 애들을 데리고 잣사냥 다니던 때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였다.

현경은 많이 말하고 진옥은 대체로 듣는편에 있었다. 바깥소식을 날라오는것도 현경이고 집안에서 무슨 일을 만들어내는것도 현경이였으므로 현경이가 많이 말하게 되는것은 응당한 일이지만 내내 생각에 잠기고 말못할 번민에 시달리고있는 진옥의 우울한 표정은 더구나 현경이의 말을 재촉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진옥은 이즈음 눈을 감아도 눈을 뜨고있어도 언제나 장군님생각, 한흥권이 생각 그리고 오성숙이 차일진이 생각뿐이였다.

현경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는 남호두의 남쪽등판에서 구원되여 내내 큰길을 따라 마록구에까지 왔다고 하였다. 그러고보면 마록구로 오는 이 길이 원정부대의 행군로정과 같은 방향이며 따라서 부대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기들의 마차가 달리고있었으리라는 안타까운 생각속에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못견디게 떠올랐다. 더구나 자기가 병구완을 받고있는 이 현경이의 고모댁은 액목땅 초입에 있는 마록구동쪽 골짜기라고 하니 원정부대가 이 어방에서 적을 따돌리고 녕안의 종심부로 다시 진격을 시작하리라는 생각도 드는것이다.

그리하여 진옥의 가슴속에서는 언제나 남모르는 한숨이 쏟아지고 두눈에 눈물이 글썽하게 고였으며 며칠동안은 꼬박 잠도 잊고 상처의 아픔마저도 의식하지 못하며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드는듯한 혼몽한 세계에 머물러있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현경이에게 별로 다정한 말을 해줄 마음의 겨를도 없었고 그의 생활을 찬찬히 굽어볼 침착한 눈도 가지지 못하였다.

현경은 열성스레 잣씨를 발가내면서 잣송이를 따던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불쑥 말머리를 돌려 이렇게 의미심장히 꼬리를 다는것이였다.

《그런데말예요. 이 잣송이를 가슴앞에 묵직하게 껴안고 총총히 달려오느라니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겠죠. 이렇게 적의 총알에 깊은 상처를 내고 남의 집 뒤골방에 외로이 누워있는 유격대녀성에게는 부모님이 계실가, 동생이 있을가, 오빠가 있을가, 공부는 얼마나 했을가 하구요.》

진옥은 신문지우에 잣씨가 떨어져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송곳을 움켜쥐고 날렵하게 잣송이를 파헤치는 현경이의 손놀림을 이윽히 지켜보았다.

《세상에 부모가 없이 외로이 있을 사람도 많을것이지만 내게는 어머님도 계시구 아버님도 계셔요. 동생도 있었구 오빠도 있었더랬는데 그들만은 없어요. 이렇게 방바닥에 몸을 뉘이고 지게문밖을 내다보려니 어쩌면 그렇게도 신통히 그전날 우리 집 뒤뜰안같은지 모르겠어요. 지금 저기 뒤뜰에 울바자를 둘러쳤는데 우리 집 뒤뜰안은 싸리바자를 둘렀어요. 그 싸리울바자아래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장독대사이에는 새빨간 꼬아리가 여물어있었어요. 그 꼬아리를 따가지고 조그마한 손바닥에 열성스레 비벼 속을 뽑고 입에 넣어 빠드득빠드득 소리를 내면 울바자밑 그늘에서 쉬고있던 개구리들이 암질암질 기여나와 독틈으로 대가리를 내밀고 개굴개굴하고 울던 모양이 지금도 눈앞에 선해요.》

현경은 잣송이를 열성스레 파헤치던 송곳질을 멈추었다. 지금껏 별로 말이 없던 진옥의 입에서 이렇게 다정다감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것이다.

현경은 귀여운 얼굴에 볼우물을 지으며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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