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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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런 때는 그저 총을 쾅쾅 쏴대며 싸움이라도 한판 겨루었으면 좋겠군. 공연히 속이 번져져 견뎌낼수가 없거든.》

백선일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저만치 앞의 보초소를 올려다보았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한흥권이가 까딱않고 서있었다. 백선일은 어떻게 한흥권에게 말을 걸것인가를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좀 싱겁게 놀아대는게 그의 마음을 풀어주는데는 좋으리라 생각하였다.

《여, 거기 서있는게 누군가? 이보라구 보초?》

백선일은 멀찌감치서 한바탕 소리를 내지르고 한흥권의 거동을 눈여겨 살폈다.

깜짝 놀란 한흥권이 뒤로 돌아섰다. 그의 몸에서 흰눈이 화르르 무너져내렸다.

《누구요. 거기 누가 와있소?》

한흥권이 당황한 목소리로 마주 소리쳤다.

《나요, 나라니까.》

백선일은 슬밋슬밋 한흥권에게로 다가갔다.

《나라는게 누구요. 누군가?》

한흥권의 목소리는 불현듯 엄해졌다.

《나라는게 백선일이지 누구겠나.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을 몰라? 한흥권동무가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다니…》

한흥권은 대답이 없었다. 아닌밤중에 불쑥 나타나 너스레를 떠는 백선일이가 아무래도 이상하였다. 앞에 다가온 백선일은 몸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한흥권을 지켜보았다.

《동무는 어떻게 여기 와있나. 대원들은 내쳐두고 중대장이 보초소에 나와있다니? 잘하는군 잘해.》

백선일의 롱지거리를 듣고있는 한흥권은 더욱더 의심이 들어 점점 눈이 커졌다.

《롱소리를 말고 똑똑히 말해보오. 여긴 어떻게 나타난거요?》

장군님께서 방금 저 둔덕중턱까지 오셨다돌아간걸 알기나 하오. 사람이 오죽 정신이 없었으면 장군님께서 다녀가신것도 모르고있었을라구. 그래두 보촌가? 이제 오면서 보니까 넘어지신 자리까지 있더란말이요.》

장군님께서 오셨단말이요?》

한흥권은 떨리는 목소리로 응대하였다.

《그래 장군님께서 오셨더랬소. 동무의 일로 밤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숙소를 찾으셨다가 동무가 보초를 서고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여기까지 몸소 나오시였소.》

《아, 이 얼빠진 한흥권이는 그것도 모르고…》

한흥권은 오금을 꺾고앉아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한동안 지켜보던 백선일이가 한흥권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서 가기요. 장군님께서 동무를 기다리고계시오.》

한흥권은 일어나 비칠거리면서 앞서 걸었다. 그의 입에서는 막을수 없이 통절한 부르짖음이 울려나왔다.

《백선일동무… 나는 언제까지 장군님의 심정을 이렇게 괴롭게 해드려야 옳단말이요. 말 좀 해보오. 백선일동무!…》

무슨 회억도 아니고 푸념도 아니고 후회도 아닌 어찌보면 그 모든것이 다 함께 있는것 같이도 느껴지는 그런 측은한 목소리로 한흥권은 중얼중얼 외웠다.

백선일은 한흥권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진정시키려고 무던히 애썼다.

백선일은 부락에 들어와서야 다소 마음을 진정하고 한흥권이와 함께 그의 숙소에 들어갔다.

불없는 캄캄한 방안에 두사람은 한동안이나 우두머니 마주앉아있었다. 장군님께서 한흥권이를 데리고와 잠을 재우라고 하셨지만 실상 그와 마주앉고보니 자기의 수완으로는 잠재울것 같지 못하였다.

한흥권은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이 그냥 몸을 움찔거리면서 장군님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대로는 한흥권을 잠재울수 없다고 생각한 백선일은 자기만이라도 슬그머니 빠져나가면 피곤에 몰린 사람이 잠에 빠질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한흥권동무, 내 사령부에 얼른 다녀올테니까 그새 방바닥에 몸을 붙이고 좀 누우라구.》

한흥권은 백선일의 팔을 잡았다.

《동무만 사령부로 간다는거요?》

《그럼 어쩔터이요?》

《나도 같이 갑시다.》

《이러지 마오. 장군님께서는 동무더러 숙소에 내려와 기다리라구 하셨는데 사령부에는 왜 덜렁덜렁 나타난단말이요.》

백선일이는 혼자 문밖에 나섰다. 그러자 어디 갈데가 없는 사람이 되고말았다. 한흥권을 재우지 못하고는 장군님앞에 나타날수 없는 몸이였다. 그렇다고 중대로 돌아갈수는 더구나 없다. 백선일은 뒤울안으로 돌아가 몇시간 밖에서 서성거리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뒤울안으로 돌아가니 누군가 웃방 함실뚜껑을 열고 장작불을 지피고있었다. 백선일은 응당 주인집 로인이 불을 지피거니 생각하고 좋은 말동무를 만난 기쁨으로 얼른 다가갔다.

《누구요. 백선일동무요?》

백선일은 깜짝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섰다. 말소리를 들으니 장군님이시다.

장군님께서?…》

백선일은 겨우 이 한마디를 번지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웃방바닥이 찰것 같아 불을 살구는중이요. 한흥권동무가 내려왔겠지?》

《예, 방금 내려와 방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왜 동무가 바깥출입을 하면서 이러오. 잠동무가 있어야 눈을 붙일게 아니요?》

백선일은 대답을 못하고 아궁에 장작을 지피시는 장군님의 손길만 멍하니 지켜보고있었다. 진정 무어라고 여쭈어드렸으면 좋을지 알수가 없었다. 백선일은 스르르 가슴이 뒤번져지고 눈구석이 뜨거워올랐다.

장군님, 제가 장작을 지피겠습니다. 장군님께서 방에 들어가십시오.》

장군님께서는 한손에 장작가치를 잡으신채 백선일을 쳐다보시였다.

《내가 들어가면 그 동무가 자지 못하오. 또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거란말이요. 한흥권동무는 지쳤소. 참말이지 그의 번민이 여간이 아니요. 이밤을 편히 지내지 못하면 녹초가 되고마오.》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장군님께서 이밤을 바깥에서 보내실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째서 여기서 밤을 새운단말이요. 장작을 한아궁이 들이밀고는 숙소에 가려오. 그러니 걱정 말고 들어가오.》

백선일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내짚어 방안으로 들어갔다. 한흥권이 어두운 방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게, 사령관동지께서는 못오시네.》

백선일은 퉁명스레 말하였다.

한흥권은 어둠속에서 묵묵히 백선일을 지켜보고있었다.

《사령부귀틀막에 가니 창문이 캄캄하더군. 함부로 문을 두드릴수가 없어 돌아왔네.》

백선일은 솜저고리를 벗고 손으로 방바닥을 더듬으면서 잠자리를 보았다.

《드러누워 잘 작정이요?》

《자지 않으면 어찌겠소. 동무도 좀 누우라구. 장군님께서 돌아오시면 내가 인차 옆구리를 찔러 깨워줄테니. 나는 귀밝은 사람이요.》

한흥권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백선일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백선일은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몸을 덥히기 시작하였다. 한흥권을 잠재우기 위해 장군님의 지시를 받고 누운 백선일이건만 바늘방석에 몸을 내댄것 같았다. 바깥아궁에서 타는 장작불빛이 뒤벽의 봉창을 벙끗벙끗 비치고있었다.

《저건 무슨 불빛이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한흥권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궁에서 장작이 타는 불빛이요.》

백선일은 한흥권이가 어서 잠들기를 바라며 하품소리까지 내였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터졌다. 바람에 지게문이 꺼떡꺼떡 흔들리고 앙토를 붙이지 못한 천정에서는 새초잎이 부르르 날리는 소리가 울렸다.

백선일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날아와 북북 끼얹어지고 무릎이며 가슴언저리가 서늘해졌다. 사람이 누운 방안이 이렇게 선뜩거릴진대 바람막이도 없는 아궁앞은 얼마나 찰것인가?

그러나 뒤벽의 봉창에서는 그냥 장작불빛이 너울거리고 불티가 튀여나는 소리가 가락맞게 울렸다.

(장군님, 이젠 그만해주십시오. 단 몇분동안만이라도 편히 눈을 붙여주십시오.)

백선일의 심중속에서 말없이 터져오르는 간절한 소원에도 아랑곳없이 장작불빛은 한모양으로 벙끗거리고 등을 붙인 방바닥이 점차로 열을 내면서 선뜩거리는 방안의 공기를 훈훈히 달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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