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1 장

의병들은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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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대감, 더 할말이 없나?》

민비는 이미 린석의 말을 듣지 않고있었다. 뿐만아니라 아까부터 손가락에 걸린 실을 풀어내느라 거기에 신경을 모으고있었다.

무릎우에는 커다란 비단보자기가 놓여있었다. 앞에는 살색이 류달리 하얗고 몸집도 큰 서양녀자 하나가 마주앉았는데 그 역시 어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초조히 기다리고있었다.

그 녀자란 다름아닌 로씨야공사 웨베르의 처제 죤따크라는 로처녀였다. 그는 지금 민비에게 수놓는 법을 배워주고있는데 벌써 이렇게 궁중에 들어와있는지가 오래다. 형식상 궁중의 고위관리들의 딸들을 위한 수예학교를 운영한다고 하지만 보다 더 자주는 서양음식의 료리와 가공, 그 차림을 배워주며 주선도 한다. 바로 그것을 구실로 민비도 만나군 하는데 하루에 이렇게 마주앉아있는 시간만 해도 보통 두세시간이다.

그것이 곧 로씨야공사 웨베르의 작간이라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에서 일본세력을 밀어내고 자기네가 들어앉자면 민비를 틀어쥐는것이 상책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던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민비는 이미 그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있었다. 죤따크가 꽃수를 놓는데 오른손, 왼손이 번갈아가며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말그대로 금상첨화의 신비경이 펼쳐지는것이다. 그런데 민비는 오른손 세번째손가락과 왼손 두번째손가락이 말을 잘 듣지 않아 꽃모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마치 곬을 잘못 탄 생각이 비치듯이… (로씨야는 세계의 방대한 지역에 령토가 널려있고 군대만 해도 백만이 넘는다는 나라야. 별의별 인재들이 다 많을터인데 간사하고 교활한 왜놈들하고야 다르지.)

수예를 배우면서도 민비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있었다. 하기에 그는 요새 죤따크를 더 자주 궁중에 끌어들였고 친로정책을 펴나갈 의사를 웨베르공사에게 전하군 하였다.

그런 민비에게 시골선비의 의병같은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오히려 기분만 잡쳐지고 손가락들은 더 자주 실에 걸리군 한다.

《중전마마, 이들은 이미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을의 원들이 임금의 명령이 없다고 반대하기때문에 그 한마디만 하게 해달라는것입니다.》

최익현이 민비의 행동에 무안을 느끼며 한마디 했다. 그러나 민비는 그때에도 죤따크와 말을 잘 듣지 않는 두번째, 세번째손가락에 대하여 종알거리고있었다. 린석이 다시 나섰다.

《중전마마, 만약 상감께서 공식적인 명령이나 어지가 힘들면 밀지만이라도 내려보내게 해주십시오. 나라의 백성이자 임금의 백성인데 밀지라고 해서 왜 백성들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민비의 화가 동했다. 그는 손가락에 걸렸던 실오리와 함께 뜨개실전부를 홱 뿌려던지고 자세를 돌렸다.

《시끄럽다. 내 그만침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듣겠나. 최대감, 저사람이야 몰라서 그렇다치고 대감이야 왜 못 알아차리나. 의병으로나 될것 같으면 누가 찾아오기 전에 벌써 상감의 어지가 내려간지 오랬지. 여긴 다 눈감은 사람들만 살고있나?》

《중전마마, 벌써 의병대는 곳곳에 조직되고있습니다. 이 사람도 바로 그 의병대장들중의 한사람입니다. 이제 그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기만 한다면 나라의 형국이 크게 달라질수 있습니다.》

최익현이 다시 정색해서 들이댔다. 그러나 민비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싸울수 있으면 싸워보래. 그러다 이기면 좋겠지만 지면 어떻게 한다?》

《중전마마, 그렇기때문에 상감마마의 어지가 필요한것입니다. 몇몇 의병대만으로는 이길수 없기때문에 온 나라가 동시에 일어날수 있게…》

류린석이 다시 나섰다. 그만하면 민비의 마음이 눅잦혀지지 않았는가 하는 한가닥의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그때 민비의 자세가 곧추 서더니 서리발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게 누가 없느냐? 내 일이 바쁘다.》

불시에 둥그렇던 두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동시에 덧머리로 얹은 나비수염같은 둥그런 달비와 금은마뇌산호진주의 칠보 그리고 어깨넓이만큼 뒤머리를 길게 질러간 봉채와 거기에 얹은 빨간 리봉이 량어깨우에서 파들파들 떨렸다. 이어 긴 원삼소매의 오색끝동에서 방금까지 수놓는 천쪼박을 주무르던 봉선화물이 빨갛게 든 손톱을 앞세우고 하얀 손이 독사의 대가리같이 길게 뻗어나와 란간아래를 가리켰다.

그러자 어디에 있었던지 무예별감 둘이 달려나와 최익현에게는 그렇게 못하고 린석의 량팔을 붙잡고 밖으로 떠밀었다. 최익현이 아연해서 무슨 말인가 했으나 민비의 성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최대감, 내가 무슨 상감이라고 나한테 어지를 청하러 다니나? 대감도 항간에서 내가 상감노릇을 한다는 떠도는 말을 듣고 찾아온게 아닌가. 다시는 그런노릇을 하지 말게.》

린석은 눈앞이 아뜩했다. 처음에는 인간적인 모욕을 당했다는 거기에 분노했으나 마지막으로 걸었던 의병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내렸다는 의식으로 하여 온몸의 기운이 땅속으로 잦아드는듯 했다.

바로 이것이 왕비였던가, 이런 녀자를 국모라고 떠받들며 신성시하였던가.

떠도는 말에는 민비가 일찌기 춘추좌전을 비롯하여 사서륙경을 다 통달하고 어떤 책이든지 한번 읽기만 하면 그대로 통달하는 특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글이라는것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 글자체가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나라와 백성을 편하게 다스리는 내용으로 되여있다는데 읽기는 무엇을 읽고 배우기는 무엇을 배웠다는것인가.

《이제 저 암닭이 반드시 나라를 망칠것입니다. 두고보십시오.…》

궁문을 나서자 린석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언제인가 서상렬이 했던 말이 새삼스레 떠올랐던것이다. 하고는 저녁에 최익현과 마주앉아 서안을 탕탕 두드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민비에게 당한 분노를 터뜨릴수 없었던것이다.

그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하던 최익현도 한마디 했다.

《생각하면 나도 이 골아픈 궁중을 떠나 자네들과 같이 왜놈들을 향해 화살 한대라도 날리고싶네. 자네 생각은 어떤지?》

그 말에는 린석이 펄쩍 놀라 익현의 팔을 붙잡았다.

《대감님, 안됩니다. 궁중에는 대감님이 있어야 합니다. 대감님처럼 대바른 소리를 해서 나라일을 바로잡아나가는 사람이 있어야지 다 떠나가버리면 누가 정사를 바로잡아나가겠습니까.》

《자네도 보았지. 여기는 바른소리가 아니라 아첨이나 잘해야 살아나가는데야. 까딱해서 미움깨나 샀다가는 어느 서슬에 목이 날아날지 몰라.…》

이야기는 밤이 새도록 끝날줄을 몰랐다.

이렇게 린석은 그때에도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채 춘천으로 다시 내려오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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