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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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권은 봇나무가지아래 나무잎들이 두툼히 깔려 그우에 쌓인 눈무지가 별로 부풀어보이는 그속에 발을 묻고 한모양으로 고개를 숙인채 서있었다.

조왈남에게 고삐를 끌리우며 다가온 말이 주둥이를 드리우고 장군님곁으로 다가서더니 불안하게 투레질을 하였다. 령리한 짐승은 그이의 언짢으신 심경을 알아맞힌듯 등자가 드리워진 옆구리로 나무줄기를 밀치며 발통으로 언땅을 두드렸다.

나무가지에 무겁게 앉았던 눈이 화르르 무너져내리며 장군님과 한흥권의 어깨에 눈더미를 쏟아부었다. 장군님께서는 가볍게 몸을 흔들어 한쪽어깨의 눈을 터시다 그만두시였다.

《아무리 사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해도 어쩌면 자기의 혁명동지이자 사랑하는 안해가 되여줄 녀성을 그렇게밖에 대해줄수 없었을가.》

장군님께서는 그대로 아픈 가슴을 좀 눅잦히시려는듯 봇나무주위를 천천히 한바퀴 도시였다. 그러나 그렇게는 쉽사리 기분을 돌리실수 없었다. 몇번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시였다.

한흥권의 가슴에서 참고참았던 말이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터져나왔다.

사령관동지, 저의 립장에서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진옥동무가 대렬에서 떨어졌다는것을 알게 된 순간에는 벌써 중대가 이십리길을 다그쳐온 뒤였고 적의 〈토벌대〉가 처처에서 나타나 우리를 포위하려들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중대의 앞길을 차단당하고 적의 포위에 들수 있었으며 그렇게 되는 때에는 중대의 운명은 물론 원정부대의 행동에도 커다란 혼란을 줄수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령관동지께서도 잘 아시는것처럼 진옥이는 저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진옥동무를 구하려고 죽음이 기다리고있는 사지판으로 동지들을 보낸다는것은 차마 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중대의 지휘관된 사람의 도리로서, 모든 동무들의 귀중한 생명을 책임진 중대장으로서 제가…》

한흥권은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눈물없는 강마른 어깨를 후들후들 떨었다.

그 누구에게도 헤쳐보일수 없었던 심장속의 호소가 장군님을 대하고 서자 그만 동을 터치고 뿜겨져나왔다. 믿고 의지할수 있는 크나큰 언덕을 만난 순간에 한흥권은 그만 온몸을 내던지고 쓰러지고만것이다.

눈물없던 그의 눈에서 피방울마냥 뜨거워진 눈물이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장군님만 아니시라면 세상의 그 어느곳에 간들 이 말을 쉽사리 터칠수 있었으며 진옥이를 위해 후더운 눈물조차 아낌없이 떨어뜨릴수 있었으랴. 실로 장군님만 아니시라면 자기 심장속의 진정한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타드는 번민이 얼마나 괴롭던 남모르는 가슴속 슬픔의 웅뎅이에 홀로 고요히 가라앉히고저 모지름을 쓰고 또 썼을 한흥권이였다.

장군님께서는 한손으로 봇나무줄기를 짚으시고 고개를 깊이 숙이신채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이 서계시였다.

한차례 장군님의 어깨에 눈을 쏟아붓고 홀가분히 허리를 편 봇나무가지들이 그이의 머리우에 진한 그림자들을 떨어뜨리고 자그마하게 실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시였다. 조용하고도 소리없는 그 몸가짐은 어떻게 좀 자신을 다잡으려고 애쓰던 한흥권이로 하여금 다시 어깨를 떨며 흐느끼게 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흥권동무, 그만 진정하고 내 말을 듣소.》

장군님께서는 침중하고도 슬픔에 겨운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한흥권은 고개를 들었다.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몸을 돌려 봇나무에 등을 기대시였다.

《나는 동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도 아프고 동정도 가고 괴롭기도 했지만 섭섭한 생각도 들었소. 뭐니뭐니해도 동무는 진옥이를 그렇게 두고 오지 말았어야 할걸 그랬소. 진옥이가 한흥권의 애인이면 애인이지 그래 어쨌단말이요. 그게 진옥이를 두고 올 까닭으로는 될수 없는거요. 절대로 그럴수는 없었단말이요.》

문득 높아지신 장군님의 목소리는 그것으로 동강이 나고말았다. 장군님께서는 저려오는 상처의 아픔을 느끼시듯 흠칫 몸을 떠시며 한손으로 가슴언저리를 누르시였다.

《어디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오. 우리는 혁명동지들을 자기의 친혈육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며 중중첩첩한 난관을 헤쳐가고있는 사람들이요. 자기는 비록 놈들에게 잡힌 몸이 되여도 조직원들의 안녕을 빌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것이 우리 혁명가들의 고상한 정신이며 자기의 몸으로 동지의 가슴에 날아드는 적탄을 맞고 쓰러져도 웃으며 눈을 감는것이 우리 혁명가들의 품성이였소. 심지어 적구에서 숨진 동지의 시신을 그냥 둘수가 없어 수백리 사선을 헤치고 동지를 업어온것도 우리 혁명가들이였지. 우리는 자신과 동지를 구별하지 않고 산 사람들이요. 한흥권동무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진옥동무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소? 만약 동무가 다른 사람이 부상을 당하고 대렬에서 떨어졌다면 그렇게는 못해. 이걸 생각하면 더구나 가슴이 아파 못견디겠단말이요.》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멈추시였으나 입술은 그대로 떨리고있었다. 채 끝내지 못한 많고많은 말씀이, 그이의 가슴속에서 안타깝게 배회하며 자기를 향해 보이지 않는 공간속으로 날아오고있음을 한흥권은 문득 깨달았다.

한흥권은 헉 하고 바람을 삼켰다.

사령관동지!》

한흥권은 자기의 가슴속을 차흐르는 자책가운데서 다문 몇마디라도 말씀드리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목이 잠겨 말을 번질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어깨숨만 내쉬였다.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보면 모든것이 이렇게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복잡한 환경에서는 그렇게 똑똑히 모든것을 가려 생각할수 없었고 혁명앞에 마주선 인간의 완강한 자세만을 줄곧 생각하면서 자기의 번민을 누르려고만 애썼던것이다.

장군님께서 그때 전령병을 보내여 앞서간 대오에서 김택근소대장을 불러오게 하였다.

눈길을 걷어차며 성급하게 다그쳐온 김택근을 묵묵히 바라보시는 장군님의 눈길에 전에없이 측은한 동정의 빛이 흐르고있었다.

《김택근동무, 진옥동무가 대오에서 떨어진 사연이랑 다 잘 알고있겠지?》

《예, 압니다. 사령관동지, 저는 진옥동무의 소대장으로서…》

《그만하오. 동무야 진옥동무의 소대장이긴 해도 전방척후에 나가있지 않았소. 책임이야 무슨 책임이 있겠소. 그러나 한가지 중한 과업을 줄 일이 있어 불렀소. 동무는 이제 진옥동무를 찾으러 떠나야겠소.》

사령관동지, 알아들었습니다.》

김택근은 대답하고나서 장군님의 뒤에 무겁게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한흥권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김택근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사라지고 눈가에는 울적한 그늘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장군님, 벌써부터 가고싶었던 걸음입니다.》

《그렇다면 반갑소. 그러나 가야 할 길은 여간만 어려운 길이 아니요.》

《압니다. 저희들이 뚫고 온 길이 아닙니까.》

《그래서 한흥권동무가 동무들을 보내지 못했소.》

장군님의 얼굴표정은 아픔으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단호한 음조로 떠올라 고요한 숲가의 언대기를 뒤흔들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진정할수 없는 마음을 달래시듯 뒤짐을 지셨던 손을 앞으로 당겨 가슴언저리에 깍지를 끼시고 그랬다가는 다시 뒤짐도 지시며 김택근의 앞을 왔다갔다하시였다. 김택근은 일찌기 이렇게 흥분하시고 이렇듯 경황없어하시는 장군님을 본일이 없었다.

《만약 우리가 사경에 처한 동지를 구하는 일이 죽음을 동반하는 길이라 해서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내 어려운 길을 떠나는 동무앞에서 긴 말을 하지 않겠소. 김택근동무, 왕청중대에만 아니라 원정부대에 순간도 없어서는 안될 소대장동무를 보내게 되는 내 마음을 리해해준다면 더 할 말이 없소.》

사령관동지!…》

김택근은 두눈만 슴벅거리며 뒤말을 잇지 못하였다. 실로 여기에 무슨 말을 보탤수 있단말인가? 장군님께서는 김택근의 앞으로 다가서시여 두어깨를 힘껏 잡아주시였다.

《어떻게든 진옥동무를 찾도록 힘써보오. 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동무가 어련히 알고 처신하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내 마음도 이렇게 자꾸 헝클어지는구만.》

김택근의 얼굴을 응시하시는 그이의 눈길에는 힘과 사랑을 주시려는 모대김만이 아닌 간절한 기대도 한가득 어리여있었다.

실로 전사들을 사랑하시는 장군님의 심정에는 한량이 없으시였다. 장군님의 이 사랑, 이 믿음만 받을수 있다면 백번 쓰러지고 천번 진펄에 묻힌다한들 여한이 있을것인가?

사령관동지, 그만 떠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김택근은 목메인 소리로 간신히 이 한마디를 아뢰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래, 그래 어서 떠나오. 데리고갈 대원들은 내가 선발해주겠소. 진옥동무를 찾아가지고 손가락하나 상함이 없이 다들 성한 몸으로 돌아와야 하오.》

김택근의 등을 떠미시며 발걸음을 옮기시는 장군님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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