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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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옥이가 부상당한 몸으로 행군대오에서 떨어졌다는 가슴아픈 소식을 들으시고 경황없이 말을 달려오신 장군님께서는 방금 원정부대가 강을 건너선 둔덕우에 서계시였다.

경박호연안의 습한 기류가 흐르고있는 강기슭은 추웠으나 장군님께서는 털모자의 귀덮개를 내리지 않으시였다. 장갑도 한손에만 끼고계시였다. 장갑 끼신 손에는 말고삐를 잡으시고 다른 손에는 눈을 움켜잡고 천천히 부스러뜨려 발밑에 떨구시였다.

가슴속에서는 서서히 번열이 일어나고있었다. 이 눈덮인 북만등판에 홀로 떨어진 진옥이를 생각하면 애처로운 마음을 금할길이 없으시였다.

봇나무숲변두리에서는 왕청중대가 정렬하고있었다. 방금 강을 건느느라 찬물에 다리를 얼군 사람들은 몸을 덥히느라고 강기슭에서 봇나무숲변두리까지 내달리고 거기서 뒤따라올 동무들을 기다리며 발을 굴러치고있었다. 그래서 숲변두리로부터는 간단없이 웅성대는 소음이 들려왔다.

강에서는 뿌연 물김이 끝없이 피여올라 숲쪽으로 흔들리며 움직이고있었다. 지금도 강안에서는 물을 건느느라고 떠드는 소리가 울리고있었다. 그들은 좁은 강폭을 찾아 마른 발로 뛰여넘겠다고 기슭을 오락가락하다가 나중에야 발을 벗은 사람들이였다.

물김이 뽀얀 강안에서 한사람 혹은 두세사람이 작은 무리를 지어 불쑥불쑥 나타나서는 봇나무숲변두리를 향해 달려가고있었다.

한흥권중대장은 행군서렬이 집결하고있는 숲변두리의 약간 불룩한 둔덕에 올라서서 달려오는 사람들을 눈여겨 살피고있었다. 그는 이따금 무엇인가 짤막짤막하게 지적해주고있었다. 한사람은 오던 길을 돌아서서 강쪽으로 달려갔다.

행군서렬에서는 키가 큰 차일진이가 녀대원들속에 불쑥 솟아있는 모양이 별로 두드러져보였다. 그리고 그옆에는 항상 차일진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성숙이가 서있었다.

(얼마나 친근하고 정이 가는 동무들인가.)

로야령에서부터 팔도하자와 이도하자를 거쳐 륙도촌과 남호두 일경을 지나오는 먼먼 행군길에 그들은 내내 짝을 지어다니면서 고생도 함께 하고 시련도 같이 헤치며 원정대오를 따라오고있는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차일진이같은 사람까지 데리고 원정길을 떠난다고 많은 일군들이 걱정해나섰지만 차일진이를 데리고 떠난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였으며 주보중의 밀영에서 떠날 때도 말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차일진이를 끝까지 믿고 행군을 하기로 결심한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였는가를 다시금 기쁘게 생각하고계시였다. (제 발로 걸으면서 고생도 하고 난관도 헤쳐보고 혁명의 엄숙한 요구와 혁명가의 준엄한 사명감도 깨우치고… 이래야 진짜혁명가가 되는것이지. 사람이란 이렇게 불속에서 단련되고 시련속에서 성장하여 마침내는 한흥권이나 김택근이나 하연성이 같은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나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간고하고 준엄한 생활의 진리를 언제나 똑똑히 깨닫고 이것을 혁명의 요구로, 혁명가의 의무로 내세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다.

두줄로 길게 늘어선 행군종대는 중대의 구분이 없이 서로 대렬을 이어붙이고 봇나무숲이 성글게 들어선 공지를 대각으로 가르며 행진해가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방금 중대들이 강을 건너 대렬을 짓고있던 봇나무숲가에 멈춰서시여 한흥권중대장을 불러오라고 전령병을 보내시였다.

중대들이 떠나간 숲가에는 강물소리가 요란하였다. 숲가로부터 강둔덕까지 수십가닥의 작은 줄기를 이루고 눈속 길들이 뻗어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방금전에 강을 건넌 대원들이 저쪽 개울가 둔덕으로부터 이곳까지 달음박질쳐오며 떠들어대던 광경과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저쪽 희벗한 공지로 찬일진이와 오성숙이가 달려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시였다. 다만 그들속에 반드시 있어야 할 진옥이가 없었으며 그 진옥이로 하여 가슴저리던 일과 그리고 지금도 불쑥 저쪽 개울가너머로 황급히 물을 건는 그 녀대원이 장군님께서 서계시는 이 봇나무숲가로 숨차게 달려올듯한 쩌릿한 생각이 한데 겹치며 일어나는것이였다.

반드시 와야 할 녀대원이 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떠나갔고 강을 건는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깐깐히 인원점검을 하던 한흥권이조차도 중대와 함께 떠나갔다. 이로써 진옥이는 아주 오지 못할 대원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새겨진것인가?

장군님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언저리가 붉어지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등뒤로부터 누군가 헐떡거리며 다그쳐오는 소리를 분명히 듣고계셨으나 번거로운 상념의 세계에서 쉽사리 깨여나지 못하시였다.

사령관동지, 한흥권이 왔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한흥권의 목소리를 똑똑히 새겨들으시고서야 고개를 돌리시였다. 방금 행군종대의 후위에서 기관총수와 함께 가고있던 한흥권중대장이 숨가삐 다그쳐와 우두커니 서있었다.

장군님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질정없이 허둥거리고 가슴앞자락은 조용히 떨렸으며 이따금 몰아쉬는 한숨소리가 마른입술사이로 흘러나왔다.

장군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묵묵히 한흥권을 지켜보시였다. 며칠동안 훈춘중대와 연길중대를 데리고 행군하시느라 왕청중대와 떨어져계신 장군님께서 요즈음 사흘짼가 나흘째만에 한흥권을 보고계시였다. 그사이에 어쩌면 한흥권중대장이 이렇게도 수척하고 꺼꺼부정해졌을가?

언제보나 면도도 말끔히 하고 모자며 군복이며 행전갖춤새도 그쯘하였으며 비록 과묵하고 말이 없으나 눈망울에는 여유와 부드러움이 비끼고 말소리며 행동거지며가 다 힘차보이던 한흥권중대장이 지금은 예전의 허울조차 없이 어깨를 떨어뜨리고 서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서서히 눈길을 내리깔고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시였다. 언젠가 진옥이가 한흥권의 군복에서 솜이 터진 자리를 보고 그걸 기워주지 못해 안달아하다가 그대로 떨어지고만, 곳곳에 터진 군복자락을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굽어살피시였다. 전에는 별로 눈에 띄지도 않던 터진 군복자락이 지금은 그의 온몸에서 생생히 두드러지며 장군님의 가슴을 아프게 헤가르고나갔다.

장군님께서는 한손에 간신히 잡고계셨던 말고삐를 맥없이 떨어뜨리시고 저만치 앞서간 행군종대를 따라 휘적휘적 밟아나가시였다.

말이 낮게 투르르 투레질을 하며 눈속에 묻힌 고삐를 끌고 장군님의 뒤를 따라갔다.

한흥권은 그자리에 뿌리박힌듯 서있었다. 가슴앞으로 떨어뜨린 머리는 점점 깊이 숙어졌다.

《거기서 혼자 뭘하고 섰는거요?》

앞에서 장군님의 목소리가 날아와서야 한흥권은 고개를 들고 발을 떼였다. 장군님께서는 군복앞자락을 헤쳐놓으시고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마주 서계시였다.

한흥권은 장군님앞으로 다가갔으나 여라문발자국 떨어져 멎어섰다. 더이상 접근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머리에서 모자를 벗었다. 어째서 모자까지 벗을 생각을 했는지 그로서도 알수 없는 일이였지만 일단 모자를 벗어쥐자 그것으로 장군님을 뵈올수 없는 자기의 처지를 새로 발견한듯 눈을 슴벅거렀다.

사령관동지, 사실은 저… 사령관동지…

《뭐 사령관 사령관 하면서 그러오. 속시원히 말이나 할게지.》

내처 긴 말씀을 하실것 같던 장군님께서 몸을 돌리시더니 다시 허둥거리는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한흥권은 발이 어디에 놓이는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걸었다. 등성이길은 미끄러웠다. 그는 몇번이나 무릎을 박고 넘어졌다.

《길을 걷기가 힘든가?》

장군님께서 측은한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예, 어쩐지…》

한흥권은 어떻게 똑바른 말로 대답을 드릴수 없었다.

《나도 힘이 드오. 전에없이 맥이 빠진단말이요.》

장군님께서는 정말 지치신듯 걸음을 늦추시고 가쁜 숨소리를 내시였다.

《진옥동무가 대렬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나는 풍덩 무릎이 꺾이는것을 느꼈소. 나는 로야령을 넘어서서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한번도 이런적이 없었소. 나는 동무의 얼굴에서도 지금 나처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있소. 동무네 중대 대원들의 얼굴에서도 그렇게 힘들고 불안해하는 표정들이 나타나고있단말이요. 전에는 힘들어도 중대에 웃음이 있었지.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는 말이 없어지고 불안한 눈길과 울적한 표정으로 조심히 지휘관을 살피고있소. 더구나 원정부대에는 북만땅에서 새로 입대한 동무들이 수십명이나 되오. 이 어린 대원들이 혁명의 시련앞에서 겁을 먹지 않겠는지 그 일이 근심스럽소.》

길가에는 늙은 봇나무가 껍질이 툭툭 터갈라진 작은 가지들을 사방에 늘어뜨리고 서있었다. 그이께서는 봇나무줄기에 손을 짚으시였다가 몸을 가누고 서계시기가 힘에 부치신듯 눈녹은 물이 얼어붙어 번들번들해진 나무줄기에 한쪽어깨를 붙이시였다. 웃초리들은 가늘게 흔들리며 작은 눈송이들을 포실포실 날리다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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