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5 장

1

 

가라시마소좌가 지휘하는 《토벌대》가 노루목촌에 기여들었다가 완전전멸을 당한 그날 전투에서 원정부대의 손실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몇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또 몇명이 부상을 입기도 하였는데 그 부상자들중에는 진옥이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진옥의 부상에 대해서는 성숙이를 내놓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진옥은 복부에 부상을 입고 남모르게 신고를 겪으면서 원정부대의 행군대렬을 따라오고있었다.

사람이 무척 기쁘거나 구슬픈 일에 부닥치게 되면 어쩔수 없이 가슴에 사모하는 련인을 생각하게 된다는것이 실상 빈말은 아닌것 같았다.

원정부대가 하루밤 쉬여가기로 한 산판의 귀틀막부락에서 함바집 모양으로 너렁청하게 크게 지은 방 한쪽구석에 자리를 정하고 남모르는 아픔에 시달리고있는 진옥이는 여느때없이 한흥권중대장이 무척 그립게 생각되였다.

자기가 복부에 부상을 입었다는것을 아는 동무는 중대에서 오성숙이 혼자뿐이므로 한흥권중대장에게 그 소식이 날아갔을리 만무한 일이였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안타까이 기다려지는 그 사람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만은 어쩔수 없었다.

진옥은 정말이지 한흥권중대장이 그리워졌다. 한중대에서 함께 행군을 하면서도 별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못했으며 이도하자에서 어쩌다 호젓이 둘이 남아 모닥불을 지피고 언 밥덩이를 구워 요기를 하게 되는 순간에조차 남들처럼 별로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었다.

늘 행군에 지쳐 허우적거리다나면 더구나 남다른 따뜻한 감정을 가져보기 어려웠다.

언제나 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속다짐하면서도 늘 그래주지 못했고 오성숙이처럼 소박한 애정을 기울여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어야겠다고 아픈 후회를 거듭하면서도 역시 행동에는 옮기지 못하고 살았던 가지가지 일들이 진옥의 뇌리에는 깊숙이 남아있었다.

진옥은 아마도 자기가 오성숙이처럼 그렇게 순박하고 성실한 애정을 기울여 상대를 보살필 녀자는 못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동만땅을 떠나 북만원정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거듭하게 되는 이런 생각들은 일찍 체험해보지 못한 엄혹한 난관이 그의 마음속에 남겨놓은 흔적일는지도 몰랐다.

참으로 간고한 그 원정행군, 진실로 소박한 사람들의 성실한 정신밖에는 그 무엇도 용납하려 하지 않는 준엄한 생활의 나날들은 진옥이같이 진실한 녀자의 마음속에도 진동을 일으키고있었으며 미구에 소낙비를 들쓰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다.

아무리 가까운 동무사이라 하여도 진옥이와 성숙은 서로의 마음을 다 잘 알지는 못하였다. 특히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입밖에 소리를 내여 말하는 법이 없었다. 공연히 비밀을 지키자고 그런것이 아니라 오성숙은 자기의 사랑이야기를 하는것이 강진옥이같은 의젓한 녀성앞에서는 별로 쑥스럽고 촌스레 생각되였으며 진옥은 진옥이대로 성숙이네들에 비하면 자기들의 애정이라는것은 별로 신통한 이야기거리가 못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이렇게 서로서로를 존중하면서 상대들을 부럽게 생각하는 그 공간속에 쉽사리 마음을 융합시키지 못한 그들의 세계가 저마끔 따로 보존되여왔으나 진옥이가 부상을 입고 누워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두 녀성의 의식에서는 지금까지 성실히 지켜온 자기 보존의 세계가 문득 깨여지고말았다.

진옥은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성숙이앞에서 한흥권중대장에 대한 그리운 감정을 헤쳐놓고말았다. 부상을 당하고 자리에 누워버리자 때없이 서글프고 시각마다 약해져가는 마음속에서 분수처럼 쏟아져나오는 감정을 어쩔수 없었던것이다.

진옥이가 한흥권중대장을 끔찍이 사랑하고있을뿐만아니라 자기가 차일진이를 잊지 못해 늘 마음을 기울이듯이 진옥이 역시 그러고싶어한다는것을 알자 오성숙은 눈물이 나도록 기쁘고 반가왔으며 동무를 위해 무엇이나 하고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였다.

만약 자기가 진옥이처럼 부상을 당하고 자리에 처져 누워버렸다면 어쨌을것인가? 필경 차일진이를 생각하고 훌쩍훌쩍 눈물을 쥐여짰을는지도 몰랐으며 혹시 진옥이를 붙잡고 그를 찾아달라고 졸라댔을는지도 알수 없는것이다.

그러나 진옥은 그렇지 않았다. 여느때없이 한흥권중대장을 그리워하면서도 그에게 자기의 부상을 알리지 말라고 곡진히 부탁하였으며 성숙이밖에는 그 누구도 이것을 알아서는 안된다고 거듭거듭 당부하는것이였다.

(이게 진옥동무의 자존심일가? 아니면 이 깔끔한 처녀의 사랑일는지? …)

성숙이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진옥이더러 그래서는 안된다고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것이라고 몇번이나 타일렀으나 반쯤 눈을 내리깔고 누워버린 진옥의 창백한 얼굴에는 자기의 고집을 물리쳐버리는 기미가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성숙은 부랴부랴 밖으로 뛰여나갔다. 진옥은 부디 누구에게도 자기의 부상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차일진에게만은 비밀에 붙일수가 없었다. 그와 의논하고 진옥이를 도울 생각도 해야 하는것이며 그의 조언을 받아 진옥이를 다시 어떻게 좀 구슬려볼 생각도 해야 하는것이다.

차일진은 지금 중대장이 들어있는 귀틀막에 가있었다. 장군님께서 친히 차일진에게 선전문을 찍어낼 과업을 주시였으므로 선전문내용도 방조하고 등사하는 일도 도와주기 위해 한흥권이 곁에 불러들인것이였다.

중대장의 귀틀막에 이른 오성숙은 장작가리옆에 몸을 감추고 불빛이 빤히 비쳐있는 봉창을 바라보았다. 안에서는 이따금 문그림자가 얼른거리고 등사판에 굴러가는 로라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오성숙은 이제나저제나 등사가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누군가 지게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등어리에 불빛을 받고있는 사람은 차일진이처럼 키가 크고 후리후리해보였는데 장작가리에 다가와 나무를 뽑아내고있는 모양을 보니 소년나팔수 김청해였다.

《이봐요, 청해동무.》

성숙은 가만히 소리를 내여 소년나팔수를 불렀다.

《누굽니까. 누가 와있어요?》

김청해는 나무가리를 돌아오더니 성숙의 얼굴을 알아보고 벌씬 웃었다.

《성숙동무구만요. 야학선생을 만나러 왔어요?》

《그런 말 말아요. 나팔수동문 참 엉터리네.》

오성숙은 당황한김에 이렇게 눌러놓고나니 그 다음말을 떼기가 여간 바쁘지 않았다.

《어서 말하라요. 중대장동지를 만나러 오셨나요?》

김청해는 짐짓 정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예요.》

《그럼 전령병동무를 찾을가요?》

《그러지 말라요.》

《그러니 야학선생밖에 더 있어요? 우리모두 네사람밖에 없는데…》

청해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후 차일진이가 밖으로 나왔다. 성숙은 반가운김에 나무가리뒤에서 냉큼 뛰여나왔다.

《왜 왔소?》

차일진은 별로 퉁명스레 물었다.

《아니?…》

오성숙은 전에없이 무뚝뚝해진 차일진이를 대하자 금시 하려던 말이 입속으로 기여들었다.

《내가 또 보초를 서다가 조는가 해서 찾아온건 아니요?》

《그럴게 뭐예요.》

《그렇지 않다면 이밤에 중대장의 귀틀막엔 왜 찾아온단말이요. 공연히 소문을 내면서 야단이거든.》

《누가 그런 일때문에 왔대요?》

오성숙의 별로 토라진 목소리를 듣자 차일진은 불현듯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선자리에서 발을 바꾸어디디면서 은근히 허리를 낮추고 성숙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소?》

《저 강진옥동무가…》

《진옥동무가 어쨌게?》

《복부에 부상을 입었어요.》

《뭐라구?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거요?》

《진옥동무가 하도 당부를 하기에…》

《이런 맹꽁이라구야… 아무리 그렇기로 중대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어쩌자는거요.》

차일진은 중대장에게 알리려고 서두르며 돌아섰다.

《차일진동무, 왜 덤벼치면서 그래요. 남의 심정은 알지도 못하면서…》

《알구말구가 없소. 녀자들이 하는 일이란 죄다 그렇지.》

오성숙은 차일진의 앞으로 뛰여나가 팔을 벌리며 막아섰다.

《제발 부탁이예요. 진옥동무의 성미를 몰라서 그래요? 나같이 촌스런 녀자도 아니구. 나야 자존심이구 뭐구 있어요? 남들이야 어떻게 보건말건…》

눈물에 목메인듯한 오성숙의 목소리를 대하자 차일진은 어쩔바를 모르고 쩔쩔매였다.

《그래 뭐 어떻게 하자는거요.》

《뭐 어떻게 할거나 있어요. 너무 안타까워 의논이나 해보자구 온거지요. 진옥동문 깔끔한 자존심으로만 그러는게 아니라 자기의 부상을 중대장동지에게 알려 걱정을 끼쳐드릴가봐 그러는거예요. 행군대오를 따라서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진옥이를 보고도 마음을 쓰신 중대장동지인데 이제 자기의 부상까지 알면 어찌 하겠느냐구, 죽어도 그렇게는 괴롭혀드리지 못하겠노라구… 이것이 진옥동무의 심정이예요. 그러니 난들 어떻게 할 방도가 있나요?》

차일진은 하 입을 벌리고 무너지게 한숨만 내쉬였다. 타고난 유쾌한 성미로 하여 웬만한 시름은 시름으로 알지 않으며 비록 행군에 지쳐 쓰러지는 순간에조차 빙그레 미소를 띠우고 무엇인가를 끝없이 중얼중얼 외우군하던 그 사람좋은 차일진이조차 지금은 컴컴한 자세로 무뚝뚝하게 서있었다.

《진옥동무가 중대장동지의 이야기를 줄곧 하구있어요. 아마 몹시 보고싶은가봐요. 어떻게 진옥이앞에 가게 할수 없을가요? 진옥의 부상에 대해서는 그때 눈치를 봐가면서 말해도 될거예요.》

그래도 차일진은 말이 없었다. 문득 앞으로 불쑥 내민 차일진의 손이 성숙의 어깨우를 더듬어 얼굴로 올라왔다. 방안에서 따뜻이 덮혀진 그의 손의 온기를 뺨에 감촉하는 순간 성숙은 숨가쁘게 가슴을 들먹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성숙이, 아무리 진옥동무의 마음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부상을 중대장동지에게 알리지 않을수 없소. 지체없이 알려야 하오.

성숙인 진옥동무의 부상처를 치료할 무슨 대책이라도 취해보오. 무슨 방법으로든 진옥동무를 도웁시다.》

차일진은 돌아서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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