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1 장

의병들은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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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객들의 짐이나 터는 주제에 왜놈과 싸운다는게 말이 되는가. 말도 괜히 주었다, 저들이 일을 치면 얼마나 치겠다구…

마침내 쓰러질듯 집에 들어설 때에는 백산에 대한 분노가 하늘에 치밀었다. 말이 되돌아오리라는 담보는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 웬일이예요. 말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어찌된 일이예요?》

그의 지친 모습을 보고 미영이 놀라 물었다.

승우는 구태여 그것을 말하고싶지 않았다. 백산이란 이름을 그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운신조차 할수 없게 몸이 아파오자 자연 그에 대한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그놈이 빼앗았다. 김백산이란 놈이 길가에서 오가는 사람의 짐이나 터는 강도가 되였더라.…》

《그래요? 그 사람이 어떻게…》

《상놈이 그렇지. 례의도 도덕도 없다 했더니 갈데가 있느냐?》 이렇게 단마디로 규정해버렸다.

한편 미영에게는 그것이 천만뜻밖이였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의혹이 머리속을 감돌았다. 비록 그를 만난 시간은 잠간이였지만 그가 남긴 말과 비범한 행동은 머리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잃어진 말을 놓고는 믿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나쁜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는지야 알수 있는가.

끝내 그를 잊자고 하였다. 그러나 잊자고 할수록 자꾸만 떠오르는것이 그의 모습이였다. 그가 뭐라고 했더라. 옳지, 자기의 옳은것을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타하지 말라, 옳은것은 언제든지 옳은것으로 남아있고 또 누구든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웬 사람 하나가 집으로 찾아왔다. 뜻밖에도 손에는 빼앗겼다고 하던 말이 끌려오고있었다. 키가 크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절다마가 미영을 보자 반갑게 투레질을 했다.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세요. 이 말이 어떻게 되돌아오게 됐어요?》

《우리 대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김백산이라고 아시죠. 지금 건강해서 왜놈들과 싸우고있습니다.》

《왜놈들과요? 어디서 싸운다는거예요?》

《그건 여기에 다 적혀있습니다. 편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편지요? 어디에…》

미영은 그가 내미는 긴 봉투를 나꿔채듯 그러잡았다. 말고삐를 건사할 사이를 내지 못해서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종이를 펼쳐들었다.

《미영아가씨, 말을 돌려보냅니다.

먼저 아버님께 무리한 요구를 하여 원로에 고생을 끼친데 대하여 사죄합니다.

돌이키면 저는 짧은 한해사이에 아버님께 세번씩이나 모욕을 안긴 무거불측한 놈입니다. 한번은 아가씨의 집에서 또 한번은 보은의 속리산속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강원도의 정선땅에서…

이러한 제가 편지를 쓰는것은 아버님에 대한 사죄와 아울러 나라를 위한 싸움에 떨쳐나설것을 아가씨에게 호소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저는 지난해 무더운 여름날 해빛 따겁고 매미소리 요란하던 향교집마당가에서 신식보총에 그리도 호감을 가지고 사내들도 두려워하는 방아쇠를 서슴없이 잡아당기던 아가씨의 모습을 잊을수 없습니다. 그 활달하고 담찬 기상을 왜놈잡이에 돌린다면 얼마나 큰 힘을 낳을것인가, 그런 녀성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자체가 이 나라 대장부들에게 큰 힘이 될것입니다.

미영아가씨, 지금 나라의 도처에 왜놈들의 군사보루가 세워지고 가는 곳마다에서 동포들의 신음소리가 높아가고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 조선이 몇년 안짝으로 왜놈에게 먹히우고맙니다.

그때 당하게 될 노예의 비참한 운명과 굴욕, 수치를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나라를 위한 일에는 존비귀천과 남녀로소가 따로 없습니다. 하물며 량반이라고 하는 체면이나 녀자라고 하는 제약성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기에 저자신도 지난 싸움때 치명상을 당했으나 죽지 않고 살아일어나 다시 싸움길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허물없이 말한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싸움에 나서고 안 나서고 하는것은 전적으로 아가씨의 자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권고를 하고말고 하는것도 저의 자유입니다.

혹시 우리 둘사이를 놓고 아버님께서 두려워하시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안심하라고 하십시오. 우리사이에는 아무리 손저어불러도 넘어설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있기에 모든것이 무방합니다. 그만큼 저에게도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것은 미영아가씨가 나라위한 싸움에 나서라는 한마음뿐입니다. 저는 일찌기 왜놈들에게 부모를 잃고 놈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교활한 놈들인가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놈들을 그냥 놓아둔다면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죽을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모든것이 후회됩니다. 나라가 잃어진 다음에 후회는 해서 무엇합니까.

이런 부탁이나마 하게 되는것은 미영아가씨에게 성근한 아량과 대바른 주장이 있다고 믿어지기때문입니다. 저의 이 추측이 정확하다면 후에 다시 만나도 남부끄럽지 않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부디 안녕히…》

미영은 마른 목을 적시듯 걸탐스레 편지를 보고 또 보았다. 그럴수록 김백산이란 사람이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자라올랐다.

(아니, 그는 절대 상사람이 아니야. 기백이 호방하고 결심도 뚜렷하며 문장도 있는 사람이야. 반드시 큰일을 칠수 있어. 그런데 아버진…)

불만이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밤낮 량반상놈만 따지며 신분적차이를 절대시하는 아버지이다. 그 엄격한 계률이 그대로 자기에게 미쳐온다. 량반집딸은 무엇이 어떻고 또 무엇은 어째야 한다는 엄격한 요구와 무제한한 통제이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이 있다. 미영이 점차 자라면서부터 바깥출입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던 일이다. 지어는 동네아이들과도 마음대로 나가놀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에 항거하여 기쓰고 밖에 나가면 보다 더 엄격한 방법으로 통제를 하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미영은 집을 뛰쳐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소동이 났다. 집안팎을 다 뒤지고 동네를 소란케 하며 찾아다녔으나 미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야 사람들은 서리가 하얗게 내린 집뒤의 숲덤불속에서 꼬부리고 자는 미영을 찾아냈다.

끝내는 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그의 고집스럽고 지독스러운 성미에 못이겨 바깥출입만은 허용했던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미영으로 하여금 더욱더 고집스러운 녀자로 되게 하였다. 무엇이나 제 마음대로 해야 속이 시원해했던것이다. 그것이 또한 아버지와 늘 티각태각하는 일을 빚어내군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집안의 일상사처럼 굳어졌다.

김백산의 편지를 받았을 그때에도 그랬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는 불만이 미영으로 하여금 또다시 참을수 없게 했던것이다.

《아버진 왜 거짓말을 했어요? 그 사람이 말을 빼앗는 도적이라고 했는데 도적도 빼앗은 물건을 돌려주나요?》

돌아온 말을 보고 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말이 이렇게 돌아오리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던것이다.

《사람을 왜 모욕해요? 죄없는 사람에게 망탕 감투를 씌워도 되는것이 량반의 직분인가요? 량반은 그래도 무방한가요?》

미영이 끝없이 걸고드는데 승우도 발끈했다.

《무엇이 어째, 그게 아버지에 대한 효도냐?》

《저는 아버지의 말씀을 리해할수 없어요. 아버진 말끝마다 저에게 례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왜 다른 사람은 그렇게 대하세요? 례의는 다른 사람에게만 가르치고 자신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건가요?》

승우는 또 뭐라고 소리치려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에 대해서는 네가 리해를 하여라. 아버진 네가 다 잘되기를 바래서 한 일이다. 네가 상사람들과 가까워지는것을 바라지 않는단 말이다.》

《저는 아버지의 그 의향을 따를수 없어요. 오히려 아버지가 모독한 그 사람이 더없이 장하고 잘나보여요. 그런 사람을 나쁘다고 하면 죄가 되여요.》

아버지와 딸과의 모순은 좀처럼 풀리지도 늦춰지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은 20여년이라는 긴 세월의 량끝에서 저마다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고있는것이다. 과연 이 두 세월이 한 점에서 만날수 있을가. 더구나 아버지는 완고한 유교관념으로 굳어진 저 한끝의 대변자요, 미영은 개화시대라고 하는 급변하는 추이에 따라 달리는 신시대의 대변자이다. 이들사이에 이어진것은 끊어도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혈육이라고 하는 피줄뿐이다. 그런데 그 끊을수 없는 정이 그들앞에 끊임없는 파란을 자꾸만 몰아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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