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1 장

의병들은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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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영은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뛰여다녔다. 아니, 아버지가 아니라 총대장이 된 큰아버지라면 더 좋을수 있다. 그이하고는 더 허물없이 이것저것 물을수 있고 꾸밈없는 대답도 들을수 있을것이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큰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향교의 강당에도, 개울건너 마을에도 청계각휴식터에도 있는 곳이 없었다. 하는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머리를 목수건으로 질끈 동인 웬 사내아이가 마주오다가 무춤 멈춰서서 물었다.

《야, 너 향교집 처녀지. 창의대장님이 어디 계신지 보지 못했니?》

미영이 보기에는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것이 반말로 나오는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뜸 큰소리로 꾸짖으려다가 명색이 남자인데다가 창의대장님을 찾는 소리에 그냥 웃어넘겼다.

《너는 누구냐, 나를 어떻게 아니?》

《네가 향교집 고명딸로 창의대장님이랑 중군, 군사장어른들을 삼시 끼니대접한다는걸 내가 모르는줄 아니? 내가 바루 선봉장님의 전령수다. 하긴 늬 아버지도 군수장이지?》

《선봉장?…》

미영은 한순간 이 총각애가 알기는 아는 소리를 하는가 의심했다.

하다가 그가 분명 선봉장의 전령수요 머리뒤끝에 상투가 삐죽 내민것을 보고는 총각이 아니라 장가든 남자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어쨌든 그가 김백산을 안다는것이 기뻤다.

그이가 지금 어디 계셔요. 선봉장님의 이름이 김백산이 맞지요?》

《우리 형님을 잘 알아? 언제부터 알게 됐어?》

《그러지 말고 선봉장님께 내가 한번 만나잔다고 전해주세요, 짬을 봐서 찾아오라고.》

전령수는 듣다말고 성수가 난듯 뛰여갔다. 자기네 대장이 량반집 따님을 아는것이 큰 자랑거리나 되는듯 했다.

미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역시 걸음을 돌렸다. 기어이 아버지를 만나 해댈것은 해대야 속이 시원할것 같았다.

뜻밖에도 아버지는 집에 있었다. 그가 향교에서 돌아와 커다란 산판을 놓고 떼걱떼걱 굴리며 무슨 회계를 하고있다가 미영을 보고 반기였다.

《네가 마침이로구나. 어서 이리 오너라.》

《무엇을 해요? 아버진 어디 가셨댔어요?》

《싸움을 하자니 아무래도 가산을 덜어내야겠다. 이름이 군수장이 아니냐.》

《무엇이 필요하게요?》

《원, 그야 이것저것 필요한게 많지. 땅마지기도 팔아야 하겠구, 당장은 기발을 만들 비단포목이 있어야 하겠다.》

《기발이라면 무슨 천에 어떤 색갈이…》

《붉은색, 검은색, 누런색, 흰색 무엇이나 다 필요하지. 천은 비단일수록 좋구.》

《있어요. 쓸만큼 다 가져가요, 다른것들두.》

미영이 농짝문을 열고 비단포목들을 꺼내놓았다. 그것은 어머니때부터 착착 쌓아내려오던 집안재산이였다. 미영이 가산을 맡아보며 제손으로 마련해놓은것도 많다.

그러나 아깝지 않다. 그렇게 하는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마을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미영의 생각은 줄곧 백산에게만 가있었다.

《아버지, 지금 선봉장으로 났다는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이 맞지요? 작년 여름에 우리 집에 왔던… 그런데 저에게는 왜 말을 안했어요?》

비단필을 가슴에 안고 팔로 뽐을 재던 안승우가 눈을 찡긋했다.

《그게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그런걸 너에게 보고를 해야만 하냐?》

《거짓말을 하니깐 그러죠. 처음에는 불한당이라 욕하고 다음엔 강도라고 욕하고 이젠 선봉장이 됐으니 뭐라고 욕할터예요?》

흥에 잠겼던 승우가 장죽을 집어들고 부시깃을 쳤다. 불이 일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불을 붙인 그는 말없이 딸을 쳐다보았다. 당장은 할 말이 없다. 실없이나마 그에게 거짓말을 한것이 사실이기때문이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뜻이 있다. 저 철없고 덤벙거리기 잘하는것이 혹시 김백산에게 마음이 끌려 그러지 않나 하는 근심이였다. 백산이라면 부모가 없는 고아인데다가 량반도 아닌 상놈의 자식이 분명하다.

그런 떠돌이총각에게 량반집 외동딸을 줄수야 없지 않는가. 계집들이란 생각이 산골짝 물처럼 외곬으로 흐르기를 잘해서 한번 거기로 빠져들기만 하면 되돌려세울수도, 옆으로 삐져나오게 할수도 없다.

그래서 백산이란 말만 나와도 이런 소리, 저런 소리로 빼돌리군 하였는데 이제 또 그 말을 입밖에 내뱉는것이다.

《내가 거듭 말하지만 그 사람이 의병장이 되였든, 선봉장이 되였든 너하고는 상관이 없다.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말고 상종할 생각도 말아라.》

승우는 그가 또 말을 하기 전에 이렇게 엄포부터 놓고 밖으로 나왔다.

그랬다, 승우에게서 백산이란 총각은 매번 불쾌하고 괘씸하다는 인상뿐이였다. 출신이 량반이 아닌것은 말할것도 없고 지난해 여름 자기 집앞에서 총을 놓은것이나 보은의 속리산속에서 자기들에게 함부로 욕을 한것이나 그에게는 다같이 불한당같은 모습이였다. 특히 지난 가을 강원도 정선에 있는 삼촌의 제사에 갔다오다 만난 김백산은 그보다 더한 강도의 모습이였다.

그때 승우는 제사를 마치고 짐군 두엇과 함께 고개마루를 올라오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정 대여섯이 나타나 무작정 말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승우는 격분했다. 말을 내놓기만 하면 앞에 남은 백수십리길을 걸어야만 했던것이다.

《이 강도놈들 같으니, 네놈들이 나를 무얼로 아느냐, 못 내놓는다.》

그가 소리소리 질렀다. 그러나 몇마디 못해서 그만 입이 굳어지고말았다. 숲속에서 몇사람이 더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몸에 피가 랑자한 부상자를 동행하고있었다. 보다 놀라운것은 바로 환자를 옆에서 부축하고있는 사람이 김백산이였던것이다.

두사람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굳어진듯 말을 못했다. 사람이 이렇게도 외통길에서 만날수 있단 말인가.

《으흠? 자네가… 길에서 사람들의 짐이나 터는 도적이 되였단 말이지?》

안승우가 부지중 소리쳤다. 그러나 김백산은 환자를 붙잡고 침착한 소리로 물었다.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내가 정선땅에 제사일로 갔다오는 길일세. 그런데 이게 뭔가. 왜놈과 싸운다고 큰소리를 치던것이 하는짓이 곧 이 모양인가?》

백산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옹다물었다. 왜놈과 싸운다고 하던 주장이 졸지에 도적으로 몰린데 대한 모욕과 분노에서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또다시 맞다든, 자기로서는 결코 모른다고 할수 없는 량반에게 어차피 행악을 하지 않을수 없는 처지를 원망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방금전에 우리 사람이 왜놈의 총탄에 맞았습니다. 빨리 먼길을 가야 하겠는데… 그래도 내놓지 못하겠다면 그냥 타고 가십시오.》

그 말에는 승우도 대답을 못했다. 자기도 먼길을 가야 하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이 아닌가.

《우리는 도적이 아니며 그런만큼 억지로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깊이 하고 결심을 명백히 하십시오. 우리앞에는 왜놈이라는 공동의 원쑤가 있습니다. 설사 말을 준다고 하여도 토심(물건을 주면서도 속으로 언짢아하면 도리여 상대방에게 모욕으로 된다는것.)이 조금이라도 비낀다면 우리는 받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가 백산이 아닌 딴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는 불쾌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김백산이기에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딸 미영과의 관계가 미묘하게 얽혀있는것이다. 만약 이것이 연원이 되여 딸과 또 어떤 반연이라도 맺어지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타고가게.》

마침내 승우가 말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는 자기대로 결심이 섰다.

《한마디만 당부하겠네. 말을 돌려주지 않아도 좋으니 다시 내앞에 나타나지 말게. 무슨 말인지 알만 하겠지?》

부지중 백산의 얼굴에 웃음이 비끼였다.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근심이 그것뿐이라면 절대로 마음을 놓으십시오. 말은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제가 나타나지 않을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을 영원한 작별로 될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

승우는 서슴없이 대답하고 돌아섰다. 물론 그가 말을 돌려주겠는지는 두고보아야 알 일이다. 그렇더라도 미영만 건드리지 않으면 좋았다. 말 한마리 5백냥이 그에게는 적은 량이 아니지만 량반의 체면만 깎이우지 않는다면 그만해도 좋았다.

그렇게 하고 백수십리어간에 발이 부르트고 다리가 꺾일듯 아파오자 생각이 바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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