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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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은 걸음걸음 시련과 교훈을 남기며 흘러가고있었다. 혜정에게는 이즈음처럼 세상이 소란하고 부산한 때는 일찌기 있어본것 같지 않았다. 무엇인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밑뿌리로부터 자꾸만 뒤흔드는것이 있어 혁명이 키워낸 아지 많은 큰 나무와도 같이 줄기차게 뻗어올라간 근거지의 생활이 항시 안정을 모르는 불안한 소음속에 떨고있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이였다.
숙반에서는 그것을 근거지에 기여든 《민생단》의 작간이라고 규정하였다. 《민생단》이 아니면 그보다 더 흉측하고 로회한 밀정이 웅크리고앉아 이 근거지를 독벌레처럼 갉아먹고있다고 인민들앞에 선포하였다.
《〈민생단〉을 잡아내자》, 《밀정을 잡아내자》 하는 목소리가 숙반의 컴컴한 창문안에서 기관총을 쏴갈기듯 튀여나고 밤낮으로 언땅을 구르며 뛰여다니는 숙반대원들의 발걸음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하였다. 부락의 소음이 고요히 가라앉은 한밤중이나 이른새벽녘이면 늘 귀에 익어 들어오던 달구지소리나 우물가의 드레박소리대신에 부락을 나도는 숙반대원들의 발자국소리며 수선거리는 말소리들이 탕수마냥 행길을 넘고 뜰안을 지나 깊이 문을 잠그고 들어앉은 방안으로 새여들어왔다.
1933년의 한해 여름 혁명촌들을 휩쓸며 사람들을 무서운 공포와 전률의 바다속에 잠기게 하던 반《민생단》투쟁의 회오리바람을 혜정이도 겪었다.
적아의 구별이 똑똑지 않고 맞다들리는대로 죽일 내기를 벌린 혼동된 전란의 피바다속처럼 사고며 감정이며 리성이며가 죄다 마비되여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슨짓을 하고있다는 느낌도 없이 무작정 사람잡이를 하던 그 무서운 한해여름을 사람들은 악몽인듯 돌이키고있었다.
지금 또다시 그때의 미친 바람이 이 근거지땅을 휩쓸지나 않을가? …
요영구에서는 식량수송대에 참가했던 사람들중의 대부분이 매일같이 숙반에 불리워가 심문을 당하였다. 아직 숙반의 《혁명감옥》속에 갇히지 않았을뿐이지 매일같이 불리워가 종일 심문을 받고 때로 매질까지 당하는 그들은 반은 령어의 몸이 되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숙반의 승인이 없이는 이웃집에도 나다닐수 없고 요영구를 벗어난 다른곳으로는 더구나 갈수가 없었다. 숙반에서는 식량수송대를 죽은 사람과 산 사람으로 갈라놓고 산 사람들을 죄다 죽은 사람들의 모해분자인듯이 간주하였다.
최춘국의 엄격한 방비가 없었더라면 혜정이도 몇번은 숙반에 불리워갔을것이고 《혁명감옥》의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송혜정은 오늘 자기의 이전 공작지였던 무수평으로 떠난다. 반년나마의 간고한 시일을 바쳐가며 이 근거지땅을 위해 옷감도 얻고 식량도 구하고 소금도 해결하고 때로 등사원지나 종이같은것도 마련하던 그 무수평, 혁명을 위해 애써준 사람도 많고 걸음걸음 자기의 추억 많은 투쟁의 사연이 깃들기도 한 그 땅, 그 땅으로 불쑥 예고도 없이 혜정은 떠나간다.
무슨 어떤 급한 과업이 떨어져 그러려는것도 아니다. 거기서 끝내지 못한 일들이 그의 손을 안타까이 기다리기에 그래서 바삐 떠나가려는것은 더구나 아니다. 실상 그렇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혜정은 천리길도 단숨에 날아갔을것이였다.
그러나 이번 가는 길은 고생스러운 길, 눈물이 앞서는 길, 걸음걸음 한숨이 고이는 길이다.
무수평사람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적으로 떨쳐나 몇달여의 고생을 쌓아가며 마련해준 식량을 적들에게 몽땅 뺏기우고 그 원인을 해명하고저 공작지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번 가는 길은 위험한 길이였다. 무수평에서 근거지로 식량을 날라들인다는 소식을 그곳 적들이 알고있다면 혜정은 그 무수평경계를 무사히 지나다니기 어려운것이다. 그래서 최춘국이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혜정의 결심을 막았다.
그렇다고 혜정이가 동지들의 만류에 굽어들수가 있었던가? 그럴수 없었다. 이번 식량공작대에 대한 적의 기습이 어떻게 시작된것인가를 알아내야만 하였다.
숙반에서는 혜정이가 무수평에서 적을 달고 왔거나 리유천이 적들에게 식량수송대의 통행구간을 알려준것이라고 하였다.
혜정은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으로만아니라 혁명가로서의 리유천의 절개를 똑똑히 믿었다. 그는 열번 죽는대도 적들에게 혁명을 팔아넘길 사람이 아니였다. 그에게 밀정혐의가 나돌고있는 지금에조차도 혜정은 혁명동지로서 그를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굳세인 의지로 리유천을 믿고보면 오직 한가지 의혹, 자기가 무수평에서 적을 달고 오지 않았나 하는 의혹만이 남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혜정은 생명을 내대고 그것을 해명하려 들었던것이다.
어려운 길, 죽음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있는 길, … 그러나 혜정에게는 그 모든 시련이며 역경들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괴로운 일은 무수평에 돌아가 근거지의 식량을 마련하느라 그렇게 고생을 한 혁명가들, 조직원들에게 공작지에서 구해들인 식량 전부를 놈들에게 빼앗기고말았다는 눈물겨운 사실을 전해야 할 일이다.
무수평, 무수평!… 진정 그렇게는 가지 말아야 할 그곳으로 혜정은 눈물을 삼키며 가야 한다.
혜정은 이 며칠동안 입에 밥술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하였다. 리호검로인이 자기 얼굴이 밤새 얼마나 축갔나 하여 새벽바람으로 녀성숙소의 뜰안에 나타나 문지방도 기웃거려보고 물길러 나가는 자기의 뒤를 지축지축 따라 걷기도 하면서 말없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 모습이 그처럼 애처롭지 않았던들 혜정은 아마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고 수수하게나마 옷매무시를 보아야 하는 처녀의 그 례사로운 몸가짐조차도 아주 잊어버리고 살았을는지 모른다.
리호검로인은 적구로 떠나는 며느리를 쌍하진어방까지 바래다주려고 쌍대배기렵총을 메고 녀성숙소 뜰안에 나타나 어슬렁거리였다.
부엌에서는 박현숙이가 혜정이의 길량식을 꾸려주느라고 보자기에 뭘 싸기도 하고 아궁에 불을 지펴 감자떡을 익히기도 하면서 바삐 돌아갔다.
《혜정동무, 무수평이라는곳이 멀기도 한데다 위험한곳이기도 하니 내내 몸조심을 해요.》
박현숙은 벌써 몇번인가 당부를 한 그 말을 다시금 되풀이하고있었다.
혜정은 뒤받침대가 떨어진 네모난 거울을 문턱앞에 받쳐놓고 젊은 아낙네의 머리모양을 꾸미느라고 손짬으로 새빠지는 짧은 머리를 틀어올리며 땀을 흘리고있었다.
《박현숙동무두 여기서 조심을 해요. 근거지땅이라고 마음놓고 살수 없으니 참말 안타깝군요.》
《일없어요. 현당도 있구 현정부도 있구 최춘국동지도 계신데 큰일나겠나요. 그저 혜정동무만 무사히 돌아오면 돼요. 이제 음력설만 넘기면
혜정은 잠시 머리를 꾸리던 손길을 멈추고 거울속에 비낀 자기를 들여다보았다. 반쯤 틀어올린 머리를 풀어내리면 아직도 룡정시내의 교정을 거닐던 그때의 그 얼굴이 나타난다. 보동보동한 얼굴의 살결이며 둥근원의 한쪽끝을 잘라내여붙인듯 그렇게 섬세하고 정교하게 구부러든 눈섭이며 지금이라도 누가 웃겨주면 금시 옴폭하게 패여들 볼우물의 알릴락말락한 자리며 지금과 같이 지지리 타는 마음고생속에서도 젊은 혈조와 윤기를 아주 잊어버리지 못한 도두룩한 입술의 부드러운 륜곽이며…
혜정은 마치 거울속의 자기 얼굴을 남의 얼굴을 바라보기나 하는것처럼 뜨아하게 이상한 의혹을 품고 들여다보았다.
혜정은 자기가 며칠동안 리유천의 생각을 잊고 살아온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던것이다. 어쩌면 그럴수 있었담…
어떤 처량한 구슬픔이 가슴속을 배회하였다.
생각해보면 이즈음처럼 리유천이나 자기가 깊은 번민에 빠져 허우적거린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같이 이렇게 부산하고 뒤숭숭한 때에는 그리운 사람의 고무와 사랑이 더더구나 기다려지는것이다. 못견딜 사랑이면 언제나 이렇게 못견딜 구슬픔을 동반하는것인지, 그렇게 순진하던 녀학교시절, 흰 운동복을 입고 정구채를 든채 그 활달한 몸에 씩씩한 동작으로 흰선을 둘러친 정구장을 뛰여다니던 리유천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키낮은 수수며 강냉이가 우거진 하숙집에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 문턱을 목침처럼 높이 고여 베고서 누렇게 탄띠를 두른 배를 드러내고 드렁드렁 코를 골던 사냥군로인, 짐승의 가죽을 팔아 아들의 학비를 대려고 이따금 찾아오던 리호검로인이 자기의 신상에 이리도 가까운 사람들이 되여줄줄이야 꿈엔들 생각할수 있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