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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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은 백하일의 말을 혁명동지에 대한 더없는 모독으로, 현당에 대한 랭혹한 비하로까지 생각하였다. 이것은 실로 참을수 없는 일이였다.

그는 백하일이와 마주앉아 이러니저러니 할것없이 즉시에 숙반공작위원회에 뛰여올라가 그의 방자한 행동을 말해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허건동무는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야 할거요.》

백하일은 방금전에 오금을 박던 그 침착하고 랭혹한 목소리로 다시금 힘주어 말하였다.

《무얼 여기에 흥분하고 말고 할것이 있소. 나는 현당서기요. 당신이 숙반의 권세를 지나치게 휘두르며 현당을 깔보는 한에는 공손히 대하지 못하오.》

《그건 당신의 뜻대로 하오. 그러나 아무튼 흥분을 가라앉히고 들어두어야 하오. 우리는 리한상을 적특무기관의 련락원으로 규정하고 체포하였소.》

《알고있소.》

《알고있다니?!》

백하일은 숱진 눈섭을 꿈틀거리며 유심히 상대방을 뜯어보았다.

《현당도 귀머거리가 아니니 당원들의 통보를 받는거요.》

《그렇군.》

백하일은 말채찍으로 장화목다리를 뚝뚝 두드리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래 허건동문 리한상의 체포를 시뜻하게 생각하는건가요?》

《물론 그렇소. 나는 언제나 그를 출판소의 모범일군으로 생각해왔었소. 그를 보증해나설 사람이 나밖에도 여러 사람이 있소.

내가 국내에서 지하운동을 할 때 공을 들여 키운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있소.》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보중해나설수 있다는거요?》

《현당서기의 목숨이 한사람의 운명에 매달려있는게 아니요. 나는 적어도 수십수백명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지고있소. 그들전체를 위해서라면 나는 백번도 더 사선에 나설수 있는 사람이란말이요. 그러니 백명중의 한사람의 운명을 두고서도 마땅히 땀을 흘려야 하는거요. 리한상은 나쁜짓을 할 사람이 아니요. 그가 적의 밀정질을 하다니… 원, 천만에, 신발은 그가 부락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주은거요.》

《그렇게도 순진한 소리를 숙반에서 하다니… 그건 어리석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거요. 왜놈 밀정이 정신빠진놈이 아니고야 련락쪽지가 든 신발을 길바닥에 흘리고 다니겠는가?

여보, 허건동무. 동무나 나나 우린 아직 순진한 사람들이야. 우리가 혁명을 하느라고 장 몇해 뛰여다니긴 했지만 첩보전에서야 무슨 재능이 있소. 왜놈특무기관에는 남자를 녀자로도 만들고 녀자를 남자로도 만드는 귀신같은 재간을 가진놈들이 욱실거리고있소. 련락쪽지가 든 신발을 길바닥에 흘린다? 흥, 길바닥에 련락쪽지를 흘리고 다니다니…》

허건은 론리적으로는 그렇다고 할수 있을것이지만 감정상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는 무의식중에도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어디 두고봅시다. 그에게 죄가 없다면 석방될것이고 죄가 있다면… 죄가 있다면 현당서기도 편안치 못하오.》

백하일의 목소리는 방금전보다도 한결 더 차고 침착하였다.

허건은 가슴이 섬찍하였다.

《그건 무얼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요?》

《그가 왜놈특무기관의 련락원이라면 지하족안에 넣어가지고 온 쪽지를 함부로 현당서기에게 내줄수 없다는거요. 무슨 말인지 리해할만하오? 현당서기가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얼빠진 수작은 안한단말이요. 그런데 그 신발은 현당서기에게 꼭 들어맞는 신발이요. 그렇게 큰 신발을 신을만한 사람이 이 근거지안에 몇사람이나 있소. 장사군들이란 워낙 령리해서 구매자를 보고 물건을 지고 다니는 법이요. 그러니 그 신발이 제 임자를 찾아갔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소. 한데 여기에 또 한가지 난처한 일이 있소. 현당서기동무는 신발안에서 쪽지를 발견한 후에도 숙반에 알리지 않았소. 혹시 당황해서 그랬다고 할수 있는데 그게 말이 될가요? 현당서기에게 당황할 일이 뭐가 있소. 강시중동무의 말을 들어보아도 현당서기가 자기앞에 사람이 나타나자 금시 몸둘바를 몰라했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나약한 성미를 가졌던 현당서기라고는 생각할수 없소. 당신이야 강력한 프로레타리아혁명가이고 현당의 수뇌가 아닌가. 자기 손으로 원쑤를 죽여본 사람이고 자기 손으로 희생된 전우를 묻어보기도 한 사람이지. 부르죠아감상주의는 우리에게 씨도 없이 날아나버리고 저 리호검로인의 풀무간에서 죽지 않고 이글거리는 숯불처럼 혁명의 새빨간 열정만이 타고있는 우리들이요. 도대체 그만한 일에 당황할 근거가 어디 있었단말이요?》

백하일은 허건의 기분을 가늠해볼 심산으로 중도에서 말을 끊고 천천히 방안의 이쪽구석에서 저쪽구석으로 가락맞게 왔다갔다하였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발만이 있는 어떤 둥그런 뿔난 물체가 방안을 굴러다니는것 같았다.

그것은 자비심도, 리해도, 분별이나 지력마저도 없는 그런 딴딴한 어떤 물체라고 생각되였다.

그리고 한번 굴러다니기 시작한 그 딴딴한 굳은 물체는 끝을 모르고 허건의 부산한 상념을 짓밟으면서 그냥 굴러다닐것만 같았다.

(백하일은 무서운 사람이다!)

허건은 백하일이가 자기를 천길나락속으로 떨어뜨리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번에 자기의 손과 발이 어디엔가 단단히 비끄러매이고 점차로 온몸을 옴짝달싹해낼수 없는 그런 부동의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내가 공연히 리한상을 두둔해나선것이 아닌가. 그가 실지로 죄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무분별하게는 비호해나서지 말아야 할것을 그러지 않았는가. 현당서기라는 그 지위를 믿고 너무 도고하게 굴었지. 현당이 다 뭔가? 이 숙반은 귀신도 잡아다 뭇매를 안긴다는곳이 아닌가!)

허건은 백하일을 탓할대신에 점차 자기를 나무라기 시작하였다.

백하일이와 피를 물고 싸우는 일은 좀더 뒤에 있을 일이다.

그는 너무도 자신의 방비에 소홀히 했던 자기를 원망하였다.

백하일이 허건의 마음을 알아맞힌듯 돌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말이 지나쳤다면 리해하오. 론리의 힘을 빌면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되고만다는거요. 당신같은 론객이야 이걸 알고도 남지. 그렇지만 나는 달리 론리를 세우기로 작정하였소.

리한상이 전해주려는 그 신발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바로 리유천이요.

이 요영구땅에서 그 신발을 신을 사람은 당신과 리유천이밖에 없는데 나는 당신이 아니라 리유천을 그 상대로 골랐단말이요.

리유천은 식량수송대 책임자로서 왜놈들에게 미리 수송대의 통행구역을 알려준놈이요. 이건 부인 못할 엄연한 진실이요.

한때 당신이 내가 리유천을 체포하자고 할적에 최춘국의 편에 서서 나의 주장을 꺾어버렸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하오. 리유천을 두둔한다는것은 곧 자기를 파멸시키는 과정으로 되기때문이요.

더구나 이번 사건은 숙반공작위원회에 자료가 보고된것만큼 결과는 자못 엄중해질거요. 밀정에게 보내는 특무기관의 지시문에 의하면 여기 동만땅의 수뇌부가 자리잡고있는 요영구에서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실현을 위해 무언가 비상히 엄중한 사태를 빚어내려고 꾀하고있는게 틀림없단말이요.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실현, 이게 혁명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신경을 얼마나 강하게 자극하고있는지 알기나 하오? 그러니 우리가 이 일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가? 마땅히 써야 한단말이요. 숙반공작위원회를 쥐락펴락하는 종치훈동지는 이번 사건을 단순히 적특무기관의 파괴공작으로 보지 않는단말이요. 그러니 이걸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를 실현하려는 불순한 조선인들의 집단적모략으로 보고 그 관계자들을 모조리 잡아내야겠단말이요. 그러자면 직위나 공로에 관계없이 체포하며 죄상이 드러나는 즉시로 군중심판에 넘겨 혁명의 철추를 안겨야 하오. 어떻소. 그래 일이 순순히 가라앉을것 같은가? 동무야 종치훈동지의 성미가 어떤지 모르지 않지.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요. 혁명의 원칙을 놓고는 피가 같은 동지들사이에서도 양보나 후퇴를 모르는 사람이요. 그러니 현당서기동무는 오직 혁명의 원칙 하나를 가지고 엄하게 사람들을 대해야 하오. 이건 가까운 혁명전우에게 하는 사심없는 충고요. 너그럽게 생각해주오.》

백하일의 목소리나 얼굴표정에서는 흰 광선과도 같은 차거운 빛이 사라지고 어느덧 부드러운 온기가 깃들었다.

허건은 몇시간전만해도 능력이나 수완이나 위풍에 있어서 자기와 대등한 수위로밖에 생각지 않았던 백하일이가 지금은 말채찍을 든 그 희고 살이 오른 손가운데 온 근거지의 운명을 틀어쥐고있다고 생각하였다.

마당으로부터 몇사람이 한데 입을 모아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숙반대원들 셋이 연줄연줄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리유천을 묶으러 갔던 사람들이였다.

그들의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제법 혈색이 좋아보였는데 그 좋은 혈색에 어울리지 않게 죄지은듯한 난처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숙반대원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는가?》

백하일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맨앞에 농군식으로 모자를 벗어 가슴앞에 붙인 나이든 대원이 두사람을 힐끔힐끔 돌아다보면서 대답하였다.

《최춘국동지가 안된다고 합니다.》

《뭐 최춘국동무가 안된다고 해. 확실한 자료가 있는데두 안된다고 하던가?》

숙반대원들은 백하일의 번쩍거리는 눈빛이 무서워 슬밋슬밋 뒤로 물러났다.

《최춘국동무가 뭘 믿고 그러는가? 숙반본부에서 적특무기관이 발송한 련락쪽지까지 걷어쥐고 범인을 추적하는데 최춘국이가 뭐이게 이걸 막아나서는가? 돼먹지 않았거든.》

백하일은 침실에 뛰여들어가 모자를 쓰고 왜놈의 헌병장교에게서 빼앗은 뻘건 가죽장갑을 끼고 나오더니 허건이더러 최춘국에게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먼저 당당히 문밖을 걸어나갔다. 허건은 백하일을 따라갔다. 그는 쓰던달던 백하일이와 보조를 같이하지 않을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빠진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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