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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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시중이 백하일에게 올라간뒤 자기도 함께 갈것인가말것인가 하고 허건이 생각하고있는 사이에 벌써 일은 벌어지고말았다.
출판소 리한상이 숙반대원들에게 체포되였다는 소식이 현당에 날아왔다. 그것은 강시중이가 현당을 떠난 시각부터 두시간 되나마나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소식은 아동국장 박현숙이가 가져왔다.
(리한상이가 체포되다니?…)
허건은 복잡하고 갈피를 잡을수 없는 혼돈속에서 집요히 그 생각을 좇았다.
(백하일이가 리한상이를 적의 련락원쯤으로라도 지목했단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숙반에서는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그 일을 했을가. 강시중이가 무슨 잔꾀를 부려 백하일을 부추겼을가? 그자는 항상 나하고 세력싸움을 하려는놈이니까 얼마든지 그럴수 있지. 얼마든지!…)
허건은 백하일의 정체를 몰랐던 까닭에 리한상의 체포는 전적으로 강시중의 작간에 의해 이루어진것이라고 생각하는데까지 이르렀다.
허건은 한시바삐 백하일을 만나 일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속다짐하였다.
《무슨 방법이 없을가요 예? 어떻게나 일을 바로잡아야 할텐데요.》
방금 성급한 동작으로 문을 밀치고 나가려던 허건은 박현숙의 말소리를 듣고 갑자기 멎어서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에 박현숙은 아주 이상하게 자기를 바라보고있는 허건의 눈길과 마주쳤는데 그는 현당서기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려는줄 알고 급히 다가가려고 웃몸을 내밀었다. 허건은 다가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박현숙동무는 리한상동무를 도와나설 결심이 있소. 그래줄만한
허건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박현숙을 뜯어보았다. 마치 그 눈길은 박현숙의 말보다도 그의 몸에서 그러한 결심을 찾아보고 빈 구석도 가려내려는듯 집요하고 지어 엄숙하기까지 하였다.
《제가 돕기만 하겠나요. 무슨 일이든지 시켜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뭘 바라고 생눈길을 걷어차면서 달려왔겠나요?》
길을 에돌사이가 없어 곧바로 생눈길을 차고 온 박현숙의 신발은 그새 눈녹은 물로 즐벅해있었다.
《그렇다면 됐소.》
허건은 한사람의 지지자라도 얻은것이 마음에 든든한듯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백하일의 숙반본부 마당에는 방금 리한상을 묶어온 숙반대원들이 흥분한 걸음걸이로 바삐 돌아가며 무엇인가 하고있었다. 한사람은 뒤울안쪽으로 달려가고 다른 한사람은 뒤울안에서 방금 달려나오며 또 한사람은 행길쪽으로 냅다 뛰여가고있었다. 행길쪽으로 달려가는 사람에게 방금 지시를 내린 장지연이 커다란 자물쇠를 들고 서있었다.
뒤울안에서 갑자기 야무진 도끼질소리가 일어났다. 그 소리는 언 대기를 짱짱 가르고 산자들이 어설프게 드러나보이는 숙반본부 처마밑에 메아리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허건은 그 소리를 도끼질소리가 아니라 누구에게 뭇매를 안기는 채찍소리로 착각하고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요?》
《도끼질소립니다.》
장지연이 의아쩍게 허건을 쳐다보며 대답하였다.
《동무는 현당서기를 보고도 인사 한마디 건늴줄 모르오?》
《미안합니다. 저는 사람을 몰라보았습니다.》
《사람을 몰라보다니, 이 협착한 요영구골안에 현당서기가 몇사람이나 있소?》
《한사람뿐입니다. 서기동지.》
《그렇소. 나 한사람뿐이요. 그런데 어째서 나 한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지경으로 분별이 없어졌소?》
장지연은 대답을 못하고 겁먹은 눈으로 허건을 지켜보았다.
언제나 유명한 이 인물의 힐난을 받게 되면 땀을 동이로 뽑군하는 장지연이였지만 지금은 한결 더 유명하게 보이는것이였다. 얇은 창문 저쪽에는 숙반대원들이 왕벌처럼 옹위하고있는 백하일이 범처럼 도사리고있으나 현당서기에게는 백하일이쯤도 안중에 없는상싶었다.
《동무네가 포승을 지워왔다는 리한상은 어디 있소?》
《뒤울안 창고에다 가두었습니다.》
《장작이랑 마구랑 집어넣던 창고에 혁명동지를 가두어?》
《그건 백하일동지의 지시로…》
장지연은 낮은 말로 대답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자물쇠는 뭔가, 창고에 잠글건가?》
《예.》
《잘하는군, 잘해. 아주 잘해!》
허건은 그렇게 조소하고나서 재빨리 발을 옮겨 숙반사무실로 들어갔다.
담배연기가 뽀얀 방안에는 이편을 정면으로 향하고 어깨에 솜저고리를 걸친 백하일이가 장화목다리를 말채찍으로 뚝뚝 두드리며 앉아있고 그와 대각으로 치우쳐 강시중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다.
강시중을 보는 순간 허건은 아연해졌다. 현당에서 헤여진뒤로 아직까지 백하일의 턱밑에 마주앉아있는 강시중은 도대체 무슨 사람인가?
강시중이도 백하일의 면전에서 허건이와 마주친것을 난처한 일로 생각하는 모양으로 그의 얼굴에는 자못 당황한 빛이 나타나있었다.
그러한 당황함은 백하일의 얼굴에도 비껴있었다.
방안에는 잠간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사람은 마치 서로 똑같이 누구에게서 무안을 당하고난 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허건은 자기가 선자리에서 돌아설것인가 아니면 강시중이같은 인간앞에라도 적당히 자리를 골라잡고 앉아야 할것인지 알수 없어 무뚝뚝하게 서있었다.
《왜 그러고 섰소. 앉으시오.》
백하일은 자기앞에 빈 통나무의자가 하나 있고 강시중이 자리를 좁혀주면 그곁에도 앉을수 있었으나 자기가 깔고앉았던 의자를 들어 허건에게 내주었다.
《아니, 그럴것이 없소.》
허건은 백하일의 앞에 있는 통나무의자를 창문밑에 끌어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회장동문 현당에서 떠난뒤로 지금까지 그냥 숙반에 앉아계셨소?》
《그저 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나니 시간이 걸렸지요.》
《거야 내가 상관할바가 아니지요. 그런데 그 미농지는 어떻게 했소? 물론 백하일동무에게 내보였겠지요?》
허건은 좀 걸고들 심산으로 곱지 않게 말을 번졌다.
《방금 받았소.》
백하일이가 강시중을 앞질러 대답하면서 도대체 무슨 일로 그러냐는듯 허건을 치떠보았다.
《이런 일이 생기면 응당 현정부회장이 아니라 현당서기가 먼저 찾아주어야 하오. 이건 뭔가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소?》
백하일은 네모난 턱을 불쑥 쳐들고 힐난조로 물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하는 이야긴가요?》
백하일은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수 없는듯 좌우를 둘러보았다. 허건은 같은 질문을 강시중에게 되풀이하였다.
《회장동무가 말해보오. 백하일동무는 어떤 의미로 나에게 묻는거요?》
《거야 알수 없는 일이지요.》
《왜 알수 없는 일이겠소. 당신은 내가 미처 생각을 돌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해있는 사이에 앞질러 채가지고 숙반에 올라오지 않았소. 백하일동무는 이런 일에 현당서기가 선참 뛰여들었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러한 우선권을 당신에게 양보한셈이요.》
허건은 그러한 우선권을 강시중에게 떼웠다고 해야 할것을 양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부디 떼웠다고 직판대기로 쏘아붙이는것보다 한결 더 신랄하고 모멸적인 뜻으로 들렸다.
《허건동무, 여기는 숙반이요.》
백하일은 직무상의 관습으로 되여버린듯한 침착하고 랭정한 목소리로 오금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