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4 장

3

 

이튿날아침 허건은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흙두구리옆에 잠자리를 마련해놓고 억지로 잠을 청하던 통나무침상우에서 느지막하게 눈을 떴다.

두툼한 통나무벽에 굵은 가름살을 건너지르고 종이를 바른 봉창에는 해빛이 환하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가?》

허건은 침상우에서 등을 떼지 않은채 손을 드리워 흙두구리의 식은재를 만져보았다. 언제 불티가 꺼졌는지 재는 싸늘하고 가슴우에서 흘러떨어진 솜외투의 한가닥은 흙두구리의 안쪽에 젖혀져있었다.

허건은 흙두구리에 드리웠던 손을 올려 누운 자세에서 천천히 목깃이며 가슴앞자락을 더듬어보았다. 와이샤쯔에 넥타이를 매고 조끼를 입은대로 그는 누워있었다.

야밤삼경이 지나도록 백하일이와 강시중이가 떠나지 않고 최춘국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현당서기가 무슨 사람이냐고 힐난하며 애를 먹이던 일들이 갈피없이 떠올랐다. 그들은 송혜정이나 리유천이를 숙반에 잡아가두고 미비한 구석들을 따져보아야 하겠는데 현당서기가 길을 가는 달구지앞에 가로누운 사람처럼 말째게 장애를 놀아서 사건수습이 지연된다고 입씨름을 벌렸던것이다.

허건은 자기가 송혜정이나 리유천의 구속을 반대하는것은 최춘국의 주장에 맹목적인 호응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유격대와 근거지의 핵심이며 김일성동지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라는것과 그들의 과오라는것도 따지고보면 크게 과오라고 할만한것이 없으므로 구속을 반대하는것이라고 몇번이나 거듭하여 설명하고 주장하였던 일을 생각하였다.

허건은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강시중은 가련한 사람이야.》

허건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금 그 말을 되풀이하였다.

《강시중은 틀림없이 가련한 사람이지.》

그는 침상에서 벌떡 뛰여일어났다. 그 순간에 허건은 와이샤쯔에 조끼만을 입었다고 생각한 몸에 양복저고리가 걸쳐져있음을 의식하였다. 그는 가볍게 혀를 차고 뒤손질로 양복저고리잔등의 주름살을 더듬어펴면서 밖으로 나갔다.

어제저녁 리한상이가 현당에 들렸던 일과 출판소에 올라가 가지고온 짐을 봐주겠다고 약속했던 일을 생각하였다.

출판소에서는 세사람, 리한상이와 한무인, 박현숙이가 현당서기를 맞아주었다. 허건은 세사람중에서 한무인하고만 악수를 하고 나머지 두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었다가 그만두었다. 리한상이와 박현숙은 한창 등사를 밀고있던 참이여서 손에는 등사잉크가 발려있었다.

《그래 뭘 부지런히 찍고계시오?》

허건은 지도일군다운 침착하고 품위 느껴지는 거동으로 출판소안을 천천히 돌아가면서 이것저것 만져보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을 위한 문예물을 찍고있습니다. 한무인선생이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노래와 동요 동시들이 있습니다.》

박현숙이 기름 묻은 손을 종이에 닦으면서 대답하였다.

《노래라… 좋은것입니다. 혁명을 하자면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엄한 혁명은 장엄한 노래를 연출하기 마련입니다. 저 유명한 〈인터나쇼날〉의 노래도 프랑스의 혁명가들이 부른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혁명근거지에 노래가 없이야 되겠습니까.》

《정말 노래가 없이야 무슨 살 맛이 있겠나요, 호호.》

박현숙은 령롱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현당서기를 바라보면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현숙은 현당서기가 며칠전에 써서 올려보낸 맑스주의 해설문을 찍지 않고 아이들의 노래부터 찍고있는게 안된 일같아 속이 조마조마해있었는데 허건이 그처럼 대범하고 여유있는 소리를 해주자 기분이 들떠났던것이다. 동시에 박현숙의 들뜬 기분은 그대로 허건의 마음에 옮겨졌다. 허건은 노래에 대한 연설을 한참 계속하고나서 리한상의 공작보고를 듣고 그가 꾸려가지고 온 등사원지며 잉크며 종이묶음들을 살펴보았다.

현당서기를 둘러싸고있는 세사람은 모두 기분이 흡족해있었다. 출판소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은 강시중이고 과거의 연줄로도 그가 밭은 사람이지만 감정이 통하는 사람은 허건이였다.

허건은 싱겁기도 한가 하면 소탈하기도 하고 객적은데가 있는가 하면 요긴히 맺고끊는데도 있으며 리론수준도 상당한 간부였던것이다.

허건은 문득 리한상의 종이묶음속에서 고기비늘모양의 신발바닥이 꽤 길고 넙적한 지하족 한컬레를 발견하였다.

《아, 이게 뭐요?》

허건은 그만 감탄조로 물었다. 몰라서 물은것이 아니라 그렇게 큼직한 지하족을 오래만에 보았기때문이였다. 그리고 그 신발이 자기의 요란히 큰 발에 꼭 맞을것 같은 생각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리한상은 신발을 주어가지고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것 참 희한한 일이요. 세상에 이런 횡재도 있는가?》

허건은 감탄하던 나머지 입맛조차 쩝쩝 다시였다.

이제는 이 지하족을 자기의 소유로 하고싶은 욕심이 한결 강해졌다. 허건은 현당서기로 소문이 난것보다 발이 큰 사람으로 더 소문이 났다. 근거지에는 허건의 발만한 사람이 또 한명 있었는데 그는 식량수송대 책임을 맡았던 리유천이였다.

허건은 현당서기라는 직무상의 덕분으로 사람들을 띄워 발에 맞는 신을 얻어도들이고 주문도 해다 신지만 리유천은 지하족 두컬레를 토막을 내여 한컬레를 만드는 방법으로 새로 조립해 신군하였다.

《리한상동무, 이 신발을 나한테 줄수 없겠습니까. 신 임자를 찾게 되면 내가 값을 치를터이니 그렇게 해주시오.》

《어서 그러십시오. 서기동지,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저에게야 이렇게 큰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리한상은 현당서기의 발이 그렇게 크다는것과 주어온 지하족이 그의 발에 맞으리라는 생각을 인차 해내지 못한것때문에 미안해하였다.

현당으로 내려온 허건은 장화를 벗고 지하족을 신었다. 약간 발등이 조이는감은 있어도 길이는 신통히 들어맞았다. 그는 아이들처럼 침상에서 일어나 한발로 뜀뛰기를 해보았다. 약간 발등을 조이는것 같은 그 감촉은 오히려 발허리를 단단히 잡아주는듯한 탄력이 있어 발을 움직이기가 경쾌하였다.

허건은 매우 기분이 흡족하여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른 한쪽에다 발을 밀어넣었다. 그때 어디선지 벌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얼가?)

허건은 발을 뽑고 신발안에다 손을 넣었다. 소리는 분명 지하족안에서 울려난것이였다. 손끝에 매끈거리는 종이감촉이 느껴졌다. 손가락사이에 끼워 뽑아보니 얇은 미농지가 끌려나왔다. 거기에는 깨알같이 박아쓴 글자들이 적혀있었다. 글자를 보는 순간 허건은 깜짝 놀라 침상에서 한발만큼이나 뛰여올랐다.

미농지에는 이런 글이 씌여있었다.

《28호 앞.

당신들의 성과를 축하한다. 속히 두번째 작전에 착수하라.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가 실현될 밝은 앞날을 위해 매진하라.

08호》

허건은 그처럼 기쁘게 신어보려던 지하족생각마저도 감감 잊어버리고 뜻밖에 나타난 종이쪽지만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왜놈특무기관에서 근거지안에 박혀있는 밀정에게 보내는 지시문이 틀림없었다. 성과를 축하한다는것은 식량수송대가 기습을 당한 그 사건을 두고 말하는것이며 두번째 작전에 착수하라는것은 식량수송대가 기습을 당한것과 같은 또 다른 사건을 만들라는 지시라고 허건은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이 지령을 보낸 특무기관은 어디에 있고 그것을 받아야 할 밀정은 어디에 있으며 이 지령서를 날라오다 길에 떨어뜨린 련락원은 누구이겠는가? 그것이 장사군일가? 아니면… 이 신발을 우연한 기회에 나에게 주게 된 리한상일가? …

사건이 하도 갑작스럽고 어마어마한 까닭에 생각도 또한 그렇게 갑작스럽고 어마어마하게 내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어마어마하고 종잡을수 없는 생각들은 일찌기 이런 일을 겪어보지도 못했고 이런 일을 해낼만한 능력도 구비하지 못하고있었던 허건에게 돌연 당황함과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미농지를 펴들고 넉줄밖에 안되는 글줄을 열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생각은 맑아지는것이 아니라 복잡해졌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현정부회장이 들어섰다. 그는 현정부에서 묻어놓은 감자움을 현당에서 손에 넣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당서기를 규탄하자고 찾아온것이였다.

《허건동무, 현당이 늘 이렇게 세도를 쓰면서 현정부사업을 간섭하고 나설테요?》

《무슨 소리요. 현당이 세도를 쓰다니?》

《현정부가 농사를 지어 묻어놓은 감자움을 현당에서 손에 넣자고 하는거야 세도지 뭐요. 현당이 스스로 내세운 정부를 현당이 가로 타고 내리누를터이요?》

그제사 허건은 강시중이 자기를 찾아온 목적을 드디여 깨닫고 깊이 한숨을 쉬였다.

《회장동무, 지금 그런걸 론의하고있을 때가 아니요. 이 종이쪽지를 좀 보오.》

강시중은 종이쪽지를 받아들고 방금전에 허건이가 그랬듯이 넉줄밖에 안되는 글줄을 읽고 또 읽었다. 그는 무엇을 착안한듯 신중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의심스럽다는듯 가로 흔들기도 하였다.

《이걸 백하일동지한테 알려드렸소?》

강시중은 응당 그랬으리라는 생각으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다시금 미농지의 글줄을 밟아갔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허건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하였다.

《백하일동지한테는 알리지 못했소.》

《아니, 어째서 알리지 못했소?》

《당황한데다가 나 스스로의 결심을 가져보자고 부심했었소. 어쨌든 나야 현당서기가 아니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건 백하일동지에게 선참 알려야 할 일이요. 이런 일은 숙반지도일군의 권한에 속하오.》

허건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퉁을 놓았다.

《여보, 강시중동무. 동무는 어째서 말끝마다 백하일의 이름을 코에 걸고드는거요. 그가 아무리 숙반의 일군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현의 지도일군이니 품위는 있게 놀아야 한단말이요.》

강시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씽씽 팔을 저으며 문께로 걸어갔다.

《허건동무의 충고는 혁명질서를 세워나가려는 현당서기의 말이라기보다 무정부적 망발을 고창하는 오유라고밖에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허건동무는 이 강시중을 다시한번 똑똑히 알아야 하오. 강시중은 혁명을 위해 태여났구 혁명을 위해 죽을 사람이요. 혁명이 내 넋이구 내 삶이란말이요.》

강시중은 어제밤처럼 문을 활짝 열어놓은대로 가버리고말았다. 처마밑에서는 바람이 달려지나면서 문을 닫아줄것처럼 휘감아흔들었으나 바람의 세력이 그렇게는 강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문이 아주 닫겨지지는 않았다.

허건은 문을 닫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찬바람이 몰려들어오는 방안에 그냥 우두커니 서있었다. 무엇이 무엇인지 알수가 없었다. 백하일이 여느때없이 독을 쓰고 돌아가는 일도 강시중이가 심상치 않게 백하일의 품에 기여들어 소란을 떠는것도 따지고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백치 않았다. 그리고 식량수송대가 입은 피해나 그것을 둘러싸고 다시 계속되고있는 적의 준동은 더구나 알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무엇인지 알수 없는 그 란리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 자기가 백하일이와 마주앉아있어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지금의 이러한 순간을 강시중에게 밀어두고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어떤 잠재의식이 피끗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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