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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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영구 출판소에서 선전문도 쓰고 등사를 밀기도 하는 리한상은 연길현 해란구유격구에 나가 등사잉크며 원지, 종이들을 해결해가지고 남양촌, 의란구, 백초구, 쌍하진의 적구를 거쳐 근거지로 돌아오고있었다.

조직에서 임무를 받고 떠날 때는 한 열흘기한이면 될것으로 타산하였으나 해란구에 나가보니 등사잉크를 마련하는 일이 어렵게 되여 계획분의 절반만 해결받고 남양촌에서 얼마, 백초구에서 얼마, 쌍하진에서 또 얼마 하는 식으로 보충하다보니 기일보다 한주일이나 더 늦어져 꼭 열여드레만에 돌아오는 길이였다.

리한상이 걷고있는 소북구 뒤골짜기 오솔길은 한때 송혜정이가 공작지에서 돌아올 때 지름길이라고 잡아들었던 길이다. 요영구에서 쌍하진이나 대두천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큰길을 따라가지 않고 대개는 이 지름길을 타고다녔다.

리한상은 문득 가던 길을 멈추었다. 새빨간 물감봉지 하나가 떨어져 흰눈을 점점이 물들이고있었던것이다. 리한상은 얼른 주저앉아 절반밖에 날리지 않은 물감봉지를 정히 집어들고 덧종이로 차곡차곡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이 물감봉지 하나면 박현숙을 얼마나 기쁘게 해줄수 있을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근거지녀성들에게는 물감이 귀하였다. 이런 물감봉지 하나를 구하려면 귀밀쌀 두되는 주어야 할것이다. 리한상은 제법 흐뭇한 기분으로 몇걸음 옮겨놓았다. 그런데 저 앞을 보니 또 파란 물감봉지 하나가 떨어져 귀퉁이로 가루를 흘려놓은것이 있었다. 그것을 줏고나니 황동비녀 하나와 골무 한개가 또 떨어져있었다.

리한상은 어떤 잡화상이 정신없는 걸음으로 가다가 흘려놓은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생한 지하족 한컬레가 또 떨어져있는것이 아닌가? 리한상은 이 잡화상이 큰 손해를 본다고 혀를 찼다. 그는 이 물건들을 걷어안고 빨리 따라가면 물건임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하족을 집어들자 눈을 털 사이도 없이 줄달음을 치기 시작하였다. 근거지부락까지 바쁜 걸음을 놓았으나 행상은커녕 사람의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떨어진 부락은 어둠속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리한상은 출판소에 올라가던 길로 현당에 들려 허건에게 가지고 온 물건들을 내보였다.

허건은 시간이 없이 바삐 돌아가면서 후에 출판소에 올라가 자세히 볼터이니 얼른 꾸려가지고 먼저 올라가라고 하였다.

현당에는 백하일이와 현정부회장인 강시중이 와있었다. 그들사이에는 자못 심중한 문제가 론의되였던 모양으로 그들의 얼굴빛은 모두 상혈되여있었다. 어떻게 보면 백하일이와 강시중이가 한편이 되여 허건이와 승벽내기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리한상은 아무것도 모르는척하고 현당을 나와 창문의 투박한 가름살이 장방형의 그림자를 던지고 누워있는 마당을 성큼성큼 지나갔다.

리한상은 한번 벗어난 길을 손더듬으로도 찾을수 없어 저앞의 산자드락 귀틀집 이영밑에서 뿌옇게 새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고 한대중으로 곧게만 걸어갔다.

리한상이가 더운 때 추운 때를 가리지 않고 하얀 와이샤쯔에다 넥타이를 매고 조끼우에 현대류행이라는 깃이 넓은 양복저고리를 멋지게 걸쳤던 그 몸에 두툼히 솜을 두고 누빈 기다란 솜저고리를 입고서 장 몇해 이 북방의 혹한과 혹설을 이겨내고있다지만 그는 발바닥의 느낌으로 험한 밤길도 씽씽 더듬어나가는 진짜 북방인의 생활감각은 체득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희끄무레 떠오르는것을 길이라고 짐작하고 발을 내짚는 벌방도회인의 습관과 체취를 버리지 못하였다.

리한상은 밭고랑새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구뎅이속에 풍덩 주저앉기도 하면서 가까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으며 그냥 한곳에서 뿌옇게 빛을 던지는 산자락의 귀틀집 들창을 목표로 그냥 걸음을 내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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