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제 4 장

1

 

백하일이 은밀히 정력을 기울며 안출해내려고 작정했던 거사는 일단 그의 뜻대로 결속을 보았다. 리유천이 책임지고 떠났던 식량수송대는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다섯대의 발구에 실었던 식량 전부를 빼앗기고 네사람의 인명손실까지 본채 근거지로 돌아왔다.

이 뜻하지 않았던 사건으로서 온 요영구골안이 뒤숭숭해졌다. 그 일을 계획하고 조직하였으며 결말까지 사전에 알고있었던 백하일이로서도 근거지안의 소란해진 분위기에 어지간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현당과 현정부는 물론이고 유격대에서까지도 이 일을 두고 론의가 많고 복잡한 분석들이 나돌았다.

백하일은 비등된 군중들의 기세를 타고 리유천이와 송혜정을 숙반에 불러다 책임을 따지려고 작정하였다. 책임을 따진다는것은 결국 숙반《감옥》에 가둔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일단 숙반의 《감옥》에 들어앉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얼마든지 죄를 만들고 사건을 꾸며 《민생단》으로 몰수 있는것이다. 그렇게 리유천이와 송혜정이만 《민생단》으로 만들어놓으면 그들과 관련시켜 근거지안의 끌끌한 사람들을 《민생단》련루자로 몰아낼수 있다. 빈틈없이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난 백하일은 스스로 숨가쁨을 느끼였다.

그는 유격대중대부에 올라가 방금 부락의 소식을 듣고 산에서 내려온 최춘국을 만났다. 최춘국은 중대정치지도원이고 장군님께서 돌아오실동안 유격대의 통솔을 책임진 지휘관이므로 그를 통하지 않고는 유격대원들을 숙반에 데려갈수 없었다.

뻘건 장화를 신고 팔을 꿰지 않은 솜동복을 어깨에 걸친채 휘적휘적 걸어들어오는 백하일을 띄워본 최춘국은 문지방까지 마주나와 그를 맞아들였다. 그러지 않아도 식량수송대가 입은 엄청난 재해로 하여 마음고생이 컸고 산에서 내려오던 길로 현당과 현정부에도 들렸던 최춘국은 숙반의 지도일군을 이번 사건의 중심인물로 대하지 않을수 없었다.

최춘국이 내주는 통나무의자를 받아다 깔고 창문옆에 비스듬히 앉은 백하일은 전에없이 눈에 피발이 서고 입술이 희슥희슥하였으며 볼편에는 수염이 더부룩하였다. 비록 목적과 지향이 달랐을뿐이지 백하일이도 몇밤을 뜬눈으로 밝혔다. 기실 이번 사건을 두고는 백하일이만큼 시간과 정력을 바친 사람이 있을수 없었다. 그는 며칠동안 열병을 치르고난 사람모양으로 볼편이 훌쭉해지고 코날이 성큼하게 솟아올랐다.

최춘국은 백하일의 수척해진 얼굴과 지친듯 통나무의자에 주저앉아 모질게 한숨을 내쉬는 모양을 묵묵히 바라보고있었다.

백하일은 여느때없이 낮은 말로 중대정치지도원을 찾아오게 된 리유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백하일은 이번 사건의 책임을 아마도 리유천이나 송혜정에게 물어야 할것이라고 하였다. 이 두사람외에 식량수송통로를 아는 사람이 없는데 적《토벌대》의 기습을 받았다는것이였다. 송혜정이 공작지에서 적을 달고 들어왔거나 리유천이 식량수송통로를 누구에게 발설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발생하였겠는가, 이러한 사실들이 본인들의 실수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목적으로 감행된것인지 그것도 분명치 않으므로 숙반에 데려가 사건을 해명해보아야겠다고 을러메였다.

최춘국은 백하일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나서 일을 그렇게 모질게 끌어가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송혜정이나 리유천은 다같이 혁명에 충실한 사람들로서 그들이 반혁명을 할 까닭이 있을수 없고 또 반혁명을 한다면 송혜정이 그새 적구에서 그렇게 많은 쌀을 근거지에 날라들여올수 없으며 리유천이 림시로 무은 소대를 책임지고 대북구와 소북구사이의 방어전투와 적숙영지를 치는 습격전투에서 그렇게 용감할수 없을것이라고 변호해나섰다.

최춘국은 성미가 조용하고 말이 없는 순한 사람이지만 혁명적인 원칙을 지키는데서는 여간만 강하지 않았다. 이것을 잘 알고있는 백하일은 한발 물러서서 일을 여유있게 끌고나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백하일은 현당서기와 현정부회장을 발동하여 최춘국에게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쓰는 동시에 송혜정이나 리유천을 의심하는 여론을 돌려야겠다고 타산하였다.

그는 유격대에서 나오는길로 곧장 현당에 들어가 허건에게 방금 최춘국이를 대하고 하던 말을 비쳤다. 그리고나서 유격대 정치지도원이 이번 사건의 발생경위를 우연적인 일로 치부해버리는것 같은데 혁명경력이 오랜 허건동무가 계급적원칙을 옳게 세워나가야겠다고 하였다.

항상 돌진적이고 억센 기상을 갖추고있는 백하일이와는 달리 점잖은 학자풍의 외모를 구비하고 옷차림이며 행동거지까지 거기에 맞추어하고있는 허건은 지금도 여느때의 그 침착하고 여유있는 거동을 허물지 않으면서 통나무사무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천천히 손가락장단을 울리고있었다.

《백하일동무, 일을 너무 과격하게 내미는게 아니시오. 아무러면 송혜정이나 리유천동무들이 반혁명을 할수 있겠소? 그들은 누구못지 않게 계급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요. 나는 그걸 믿소.》

백하일은 사뭇 놀랍다는듯 허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당신도 최춘국동무처럼 이번 사건의 발생경위를 우연적인 일로 보고 덮어주자는거요?》

《우연이고 필연이고간에 죽도록 고생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반혁명의 감투를 함부로 들씌워서는 안된다는거요. 현당은 그렇게 문제를 과도히 세워나가는걸 반대하오. 그래서는 안되오.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해서 문제를 분별있게 따지고 들어가야지 어마어마한 가정을 앞세우고 거기에 맞추어 론리를 전개하자고들어서야 되겠소. 백하일동무, 너무 그러지 맙시다.》

백하일은 이게 무슨 망발이냐는듯이 대번에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발생된 사건이 얼마나 엄중한데 그런 배포유한 소리를 하오. 나는 이번에 우리가 입은 손실에 대해서 물론 가슴아프게 생각하지만 유격대 중대정치지도원동무와 현당서기동무를 만나고 나서는 생각되는바가 많소. 언제부터 우리 일군들이 이토록 평화로운 기분에 잠겨있게 되였는가 하고 심각히 생각하게 된단말이요.》

《백하일동무, 그거야 너무 심한 말이 아니요.》

《아니요. 너무 심한 말이라니?… 결코 그렇지 않소. 나는 아까 최춘국동무를 만나서는 별로 론쟁없이 순순히 나와버리고말았댔소. 왜 그랬는가? 현당서기동무를 믿었기때문이요. 국내의 그 삼엄한 백색테로하에서도 혁명적기개를 굽히지 않고 싸워온 허건동무의 붉은 의지를 믿었던거요. 당신이야 내가 감옥투쟁을 하던 그 시절에 벌써 서울장안에서 리론이 좋고 기개가 당당한 열혈투사로 소문이 났던 사람이 아니요. 그래서 녀학교 고운 처녀들의 련정마저 불러일으켜 세론이 있었던 당신이였지.

내가 이런 간고한 환경에서 그 시절의 로맨틱한 이야기를 꺼내는것은 마음의 여유가 있거나 한번 웃어보자고 해서 그러는게 아니요. 오히려 간고하던 그 시절을 회억하며 혁명적의지를 가다듬자고 그래서 하는 소리란말이요.

그런데 지금의 허건동무는 뭐가 되였소? 모든것을 평화주의적으로 사고하고있단말이요. 현당서기가 이렇게 되면 사태가 어떻게 되는가? 여보, 내 말을 막지 말고 마저 듣소.》

백하일은 허건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중둥무이시키려고 하기때문에 성급히 그렇게 눌러놓고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도 잘 아는것처럼 당이란 뭔가? 그것은 로동계급의 전위대이며 혁명의 수뇌부요. 당이 혁명을 지도한단말이요. 근거지의 혁명을 누가 지도하는가, 그것은 역시 당이 하고있소.

일본제국주의 강도배들은 조선인민을 향하여 군대만 동원하고있는것이 아니라 경찰, 헌병, 재판기관과 같은 폭압기구를 죄다 발동하고있소. 그런데 우리에게는 뭐가 있는가? 유격대와 당밖에 없소. 경찰도 없고 헌병도 없고 검사도 없고 판사도 없단말이요. 당이 이 모든것을 하고있소. 그러니 당은 경찰로도 헌병으로도 검사로도 판사로도 될수 있으며 응당 돼야 한단말이요. 적이 열개의 몽둥이를 가졌다면 우리도 열개의 몽둥이를 가져야 하오.》

허건은 통나무책상앞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구두발소리를 울리면서 창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창턱에 한손을 내짚고 한손은 조끼주머니에 찌른채 고개를 약간 젖히고 피곤한듯 서있었다.

《참 뭐가 뭔지 모르겠구려. 난 그저 명백한 사실에 기초해서 문제를 파보자는걸 주장하오.》

《현당서기동무, 그건 그리 어려운게 아니요. 그 사람들을 문제시할만한 일들이 실지로 발생되지 않았소. 사건의 공정을 곰곰히 따져보오. 〈토벌대〉놈들이 식량수송대를 습격했을 때 그들은 필경 수송대 전체를 죽이거나 붙잡을수 있었으며 수송대의 책임자인 리유천이는 더구나 전투에서 죽거나 붙잡혔어야 옳았소. 량단간 어느 한가지로 끝을 보았어야 옳았단말이요.

그런데 〈토벌대〉는 식량을 빼앗고 사람 몇을 죽이는것으로 만족하고 물러가버렸소. 허건동무는 이 심상치 않은 사실을 어떻게 보고있소?》

《생활에서야 얼마든지 그럴수 있지 않소. 백하일동무도 근거지방어전투를 해보아 체험했겠지만 고지우에 탄약이 다 떨어지고 내리굴릴 돌멩이까지도 거덜이난 순간에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들던 놈들이 이상하게 순순히 물러가버리는 때가 있소. 놈들이 한번만 더 공격해올라오면 근거지가 녹아나는판인데 바로 그 순간에 놈들이 스스로 물러간단말이요. 이런 경우에 문제를 어떻게 고찰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발생한 이러저러한 필연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러한 결과가 빚어졌다고 보아야 하는거요. 이를테면 적들이 몇십번 공격을 해보아야 고지의 방어가 여간 세차지 않으니까 그만 포기하고 가버렸는데 고지에서는 바로 그 순간에 탄약이 떨어지고 무져놓은 돌멩이까지 다 써버려 그야말로 비극적인 환경에 이르렀단말이요. 얼마나 놀라운 사변의 극적인 련관이요. 사건의 내적흐름은 지극히 론리적이고 필연적이였지만 우리의 눈에 나타난 외적인 결과는 극히 우연적인 현상밖에 없었던거요. 이러한 경우에 우리가 인간의 지성이 도달하지 못한 공간에서 벌어진 필연적인 현상을 리해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론리를 앞세워 사건의 내적순환과정을 파괴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필경 비맑스주의적 과오의 시궁창에 떨어지고말거란말이요.》

그 순간 백하일의 얼굴은 마치 야장간의 단쇠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격동적인 흥분으로 하여 심장이 터질것 같았다.

《허건동무, 동무에게서는 언제나 말썽인 그 리론의 창고가 또 터지기 시작했소. 여기에 리화녀전이나 연세대학의 녀학생들이 모였다고 리론의 분수를 쏴갈기는거요? 여기는 근거지의 현당본부며 계급전쟁의 백병전이 벌어지고있는 일선초소요. 문을 열고 밖에 나서기만 하면 실패하고 돌아온 식량수송대의 랑설로 온 골안이 술렁대고있소. 사람을 잃어버린 집들에서는 현당과 숙반의 지도자들이 자기 남편과 오빠의 원쑤를 어떻게 갚아주는가를 똑똑히 바라보고있단말이요. 우리에게 무슨 권한이 있고 시간이 있어 리론을 운운하며 평화주의를 설교할수 있소? 이것이야말로 혁명앞에는 죄악일거요.》

《백하일동무, 당신이 규정한바와 같이 내가 리론의 분수라면 당신은 뭐가 될것 같소. 내가 입심 사납게 마주서서 한때 〈엠엘〉당의 중진이였던 당신을 모욕할수는 없지만 부디 한마디 한다면 너무 어마어마하게 사변을 강조하는 그 과격한 성미만은 버려야 한다는거요. 송혜정이나 리유천이 같은 핵심적인 유격대원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였다가 어떻게 할려고 그러시오?》

허건은 조금 타협조로 나왔다.

《무슨 소리요. 혁명적원칙이 있고 군중이 지지하는데 못할것이 뭐가 있는가?》

《그렇지 않지요. 절대 그렇지 않단말이요.》

조금 굽어들려던 허건이가 다시 주장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군중의 지지로 말하면 그들이 대단하오. 최춘국이나 송혜정이나 리유천이 같은 사람들을 인민들이 지지하고있단말이요. 결코 당신이 아니요. 당신은 권한과 혁명업적으로 그들의 머리우에 군림하고있지만 인민들과 피가 통하는건 오히려 그들이요. 그리고 현당은 또… 인민들의 기분이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소. 숙반에서 아주 확실한 자료를 걷어쥐고 유격대원들을 구속하기전에는 현당이 동의를 못하오!》

백하일은 창턱앞에서 홱 돌아서서 헤쳐놓은 양복저고리 앞자락을 펄럭거리며 통나무책상앞으로 돌아가고있는 허건을 주의깊이 굽어보았다. 그저 리론의 분수인게 아니라 세상을 깐깐히 살피고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손을 써가지고는 유격대의 핵심을 어쩌지 못한다는 생각을 집요히 추구하고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허건이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백하일에게는 좀더 요긴하고 실용적인 다른 한가지 일로 덧짐을 쳐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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