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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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군님께서는 왕이산의 온몸에 가시처럼 박힌 무수한 고통과 매 순간순간 그가 느끼고 체험했을 쓰라림과 비분의 절정에 스스로 자신을 세워보시는것이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왕이산의 운명에 가해진 처참한 고난의 세례를 알수 없을것이며 그의 눈물겨운 시련의 력사이자 그의 부대 전체 병사들의 운명의 력사인 절통한 수난사를 생생한 의식에 감수할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자주 문을 열어보시였다. 외투도 걸치시지 않으신 몸으로 눈가루들이 날리는 삽짝밖에 나가시여 한동안씩 기다리기도 하시였다.

드디여 왕이산의 일행이 나타났다.

눈보라가 약간씩 일고있는 행길로 두줄로 늘어선 병사들의 대오가 헐떡거리며 달려오고있었다. 그앞에 한사람이, 분명 왕이산이라고 짐작되는 한사람이 부대와 스무나문발자국이나 앞서 뛰여오고있었다. 부대와 그 사람의 거리는 순간마다 늘어났다. 저 사람이 왕이산인가? 저 사람이 부대를 버리고 혼자 올 작정인가?…

장군님께서는 바삐 행길로 마주나가시였다. 왕이산은 저고리 앞자락을 열어젖히고 장갑도 끼지 않고 뻘건 주먹을 가슴앞에 꽉 끌어올린채 언땅을 탕탕 구르며 달려오고있었다.

열어젖힌 저고리 앞자락은 날개처럼 펄럭거리고 가슴언저리는 벌겋게 드러났는데 모자가 없는 맨머리에는 더운 입김이 흘러나와 성에가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그것은 마치도 왕이산이 그새 겪은 마음고생에 머리마저 백발로 세여버린것 같았다. 마주 불어치는 세찬 바람에 살이 드러난 가슴언저리와 얼굴에 연신 눈가루가 들씌웠다.

장군님께서는 눈앞이 흐려지시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시였다.

장군님!》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바람소리를 짓누르며 울려왔다. 그제사 장군님께서는 분명히 안계가 열리는 똑똑한 눈길로 앞에 와 선 사람을 바라보시였다.

장군님, 제가 왕청수입니다.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온 왕청수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더할나위없이 가슴이 저리신듯 고개를 저으시였다.

《나는 왕이산을 찾았지 왕청수를 찾지 않았소. 나는 북만땅의 왕이산을 알지 왕청수는 알지 못하오.

왕이산… 내가 찾는 왕이동의 동생은 어디로 갔소? 대답하오.》

장군님의 격한 목소리가 울리자 왕이산은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장군님, 제가 왕이산입니다. 왕청수가 아니라 왕이동의 동생인 왕이산이올시다. 장군님밖에는 왕이산을 찾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버지까지도 왕이산은 비적대장이라고 내몰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장갑도 끼지 않은 뻘건 손을 눈속에 내려짚고 어깨를 떨고있는 왕이산을 부축해 세우시였다.

《이러지 말고 일어나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부대의 수난사를 다 들었소.

아버지의 발구에 묶여갈 때의 아들된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겠소. 아들의 팔목에 결박을 지우는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어떻고? … 세상에 이런 가슴아픈 이야기는 많지 못하오. 그걸 왕이산이 겪다니…》

장군님, 저는 아버지에게 팔을 묶이울 때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팔을 뽑고 도주할 때는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듯했습니다. 아무리 야단을 치고 잡아묶는다고는 했지만 아들의 손을 묶는 아버지의 손은 모질지 못했습니다. 팔목에 노끈이 걸쳐있을뿐 팔은 훌렁훌렁했습니다. 아버지의 정이 채 묶지 못한 그사이로 팔을 뽑고 도망치려니 죽고싶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불효막심한 자식으로 될바엔 살아 무엇하랴 하는 생각이 가슴을 마구 허비였습니다. 그러나 강도 일제와 싸우겠다는 그 강심으로 벋디디고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도적대장이 갈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갈았습니다. 장군님께서 왕이산을 찾으시니 왕이산이 있지 왕이산은 벌써 세상에서 죽어없어진 사람입니다.》

《아니요. 함부로 말을 그렇게 하지 마오. 그러지 말라구.》

장군님께서는 사정하시듯 말씀하시였다.

장군님, 장군님의 말씀은 천만번 고맙지만 왕이산이 살아있으면 안됩니다. 왕이산이 나타났다면 인민들은 먹을것도 주지 않을것이고 왕이산이 유격대에 들어갔다면 왕이산이 있는 유격대는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겝니다.》

왕이산은 말을 채 맺지 못하고 통곡소리를 내였다.

《진정하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소. 왕이산은 왕이산의 이름으로 잘 싸워 인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오. 인민에게서 수치를 들쓴 이름을 인민에게 참답게 복무한 혁명가의 이름으로 빛내야 하오. 나는 이자리에서 왕이산과 왕이산의 전체 부대를 유격대에 받아들이자고 하는데 어떻소?》

그 순간 왕이산의 등뒤에 담을 쌓고 서있던 병사들이 와 하고 환성을 터뜨리며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웃는 사람, 우는 사람… 그들의 감격은 하늘중천에 닿은듯싶었다. 그러나 왕이산만은 망연한 자세로 서있었다. 산골짜기를 진동하는 병사들의 환성은 어찌하여 일어난것인지, 저 사람들은 어째서 저렇게들 정신없이 얼싸안고 돌아가는것인지 그는 도저히 아무것도 똑똑히 리해하는것 같지 않았다.

왕이산은 병사들을 제지하려는듯 두팔을 벌리고 그들앞으로 갔다가는 누구에게도 말을 비쳐보지 못하고 뒤걸음쳐 물러났다. 그렇게하기를 그는 몇번이나 거듭하였다.

《병사들, 내 말을 들으시오!》

왕이산은 드디여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끓어번지던 병사들의 환호는 갑자기 가라앉았다. 그는 조용해진 병사들, 놀란듯한 의문이 실린 병사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척거리였다. 한결같이 커다란 의문이 새겨진 병사들의 얼굴에는 방금전에 피여올랐던 눈물겨운 감격이 빛살처럼 퍼져가다 굳어져버렸다. 그래서 아직 그들은 웃는듯도 우는듯도 하였다.

왕이산은 푸들푸들 입술을 떨었다.

《병사들, 장군님께서 인민앞에 수치를 들쓴 이름을 혁명가의 이름으로 다시 빛내야 한다고 하셨으니 나는 이제 죽어도 원이 없는 사람이요. 내 살아도 죽어도 장군님의 이 사랑과 믿음만은 저버림없이 굳세게 싸워나갈것이요.

병사들 !

그러나 우리는 아무튼 수치를 들쓴 대오가 아닌가? 우리는 장군님의 유격대오에 참가할지언정 당분간 이 소식이 인민들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소. 장군님 유격대에 왕이산부대가 들어갔다는것을 세상이 알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방금전까지도 이 생각을 못했소. 오직 장군님을 따라야만 살길이 열린다는 생각만을 했더랬단말이요.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보면 이래서는 안될것이요!》

언땅을 딛고선 왕이산의 두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말소리도 떨렸다. 헉헉 바람을 삼켜가면서 그는 가까스로 말을 번졌다.

병사들은 눈속에 발을 묻고 얼어붙은듯 까딱않고 서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병사들앞으로 걸어나가시였다. 방금전까지 번열에 몸이 달아오르던 병사들이 추위에 떨고있는것 같았다. 서로 의지하려는듯 빽빽이 다가붙이고 선 어깨우에는 눈가루들이 날려와 쌓였다.

북만의 강추위에 얼고 바람에 시달려 거무틱틱해진 얼굴에는 모진 세월의 온갖 고생과 가난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억물린듯한 반점같이 떠올랐다. 이 얼굴은 방금전의 환희에 빛나던 그 얼굴이 아니다. 빛이 사라져버린 얼굴들, 밝지 못한 사람들의 흐리멍텅해진 눈길에는 수심과 아픔이 가시처럼 박혀있었다.

한순간에 사람들이 이렇게도 딴 모습으로 변해버릴수 있단말인가?

장군님께서는 사람들의 어깨우에 날려와 쌓인 눈을 털어주시며 빛이 없는 수심낀 그 얼굴들을 둘러보시더니 무엇인가 강하게 부정하시듯 고개를 저으시였다.

《아니요. 당신들은 아직 우리를 알지 못하오.》

사람들의 가슴을 쩡 울리는 장군님의 목소리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우리는 혁명을 하겠다는 사람과는 언제나 손을 잡소. 그들의 과거가 어떠했건 그들과 손을 잡는단말이요. 비록 혁명앞에 일시 죄지은 사람이라도 자기를 뉘우치고 혁명을 하겠다고 나서면 주저없이 손을 잡소. 나는 왕이산의 부대와도 손을 잡게 된다는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걱정하지 마시오. 인민은 언제나 자기의 진정한 아들을 알아보는 법이며 인민을 위해 참답게 살려는 사람은 어디서나 인민의 지지를 받게 되는 법이요. 나는 당신들도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믿으며 그것을 굳게 확신하고있기에 아무런 주저도 동요도 없이 당신들과 손을 잡는것이요.》

와―하고 병사들은 다시한번 목멘 환성을 터뜨렸다. 깊은 상처인양 험상궂게 얼어붙었던 병사들의 얼굴은 따스한 봄볕에 눈녹듯 녹아내렸다. 수심과 아픔이 얼룩져 빛이 없던 눈길에는 환희의 불꽃이 튕겨나고있었다.

병사들은 아까처럼 얼싸안고 돌아갔다. 그리고 아까처럼 왕이산은 어리둥절해 서있었다. 이 기적같은 사실이 꿈인지 생신지 알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감격, 이런 행복에 습관되지 못한 사람이였다.

놈들에게 쫓기고 인민에게서 돌림을 받으며 두더지처럼 숨어살아야 하는 가긍한 인생이 언제나 그림자같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 욕스런 인생에 금을 긋고 무서운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재생의 길을 걸을수 있게 된것이였다.

왕이산은 감격에 차오르는 가슴을 들먹거리며 다시한번 장군님을 눈물속에 우러렀다.

아,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위인을 눈앞에 바라보고있는것인가. 나와 나의 병사들의 기구한 운명을 의탁할 위대한 어버이품을 오늘에야 찾았다. 이로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의 길이 마련된것이 아닌가! …

왕이산은 옷섶을 적시며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누군가, 아귀센 손으로 그의 어깨를 휘여잡아 병사들의 소용돌이속에 끌어들였다.

이게 누군가? 색날은 군복을 입고 커다란 개털모자를 쓴 이 사람이? …

아, 새신랑! 그대의 눈물겨운 정상을 가슴속으로만 슬퍼하며 홀로 부락에 떨궈놓고 놈들에게 쫓겨 허둥지둥 달아난 이 부대장을 잊지 않고 찾아온 진실한 사람, 죄진 마음에 선뜻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장군님앞에 나서서 부대의 처참한 정상을 아뢰인 나의 벗! 고맙다. 새신랑, 장군님을 받들고 우리 언제나 가까운 벗으로 살자!

왕이산은 드디여 동료의 손을 잡고 병사들의 무리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병사들과 얼싸안고 울며 웃으며 기쁨에 겨워 돌아갔다.

 

이날밤 장군님께서는 원정부대의 출발을 앞두고 하연성소대장을 부르시였다.

《하연성동무, 이제부터 왕이산부대는 이곳에 남아 이 지대의 〈토벌대〉들을 족치고 놈들의 쫓김을 받는 반일부대들을 건져내여 한데 집결하는 어려운 활동을 하게 되오. 앞으로 이들은 주보중유격부대와 합세하여 북만유격전선의 일익을 당당하는 혁명력량으로 발전할것이요. 그러므로 동무가 소대를 데리고 왕이산부대에 남아 그의 손발이 되여주어야겠소. 우리가 저 멀리 대구, 소구, 마록구일대에 적들을 달고 내려가 무리죽음을 시키고 녕안읍으로 다시 진격해들어갈 때는 북만땅은 혁명의 불도가니로 끓어번질거요. 우리 그때 다시 만납시다. 동무가 맡고있는 임무가 조련치 않는데 자신있게 해낼수 있겠소?》

장군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령관동지의 작전적구상을 빛나게 관철하고 대오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무쪼록 어려운 길에 몸조심하십시오. 저희들은 오로지 사령관동지의 안녕만을 빌뿐입니다.》

《알겠소. 걱정하지들 말라구.》

장군님께서는 하연성을 힘껏 포옹하시고 한마디 즐거운 롱담을 건네시였다.

《하연성동무가 신랑의 시중을 어떻게 들어주나 걱정했더랬는데 그만하면 대반노릇을 썩 잘한셈이요. 그 깐깐한 김택근이까지도 나중에는 감탄하고말았으니까.》

장군님, 그러니까 제가 이번에는 왕이산부대장의 대반노릇을 하게 되는것이 아닙니까? 대반이라는게 알고보니 순전히 신랑의 손발이 돼야 하겠더군요. 자칫하면 신랑을 누르고 제가 나선다는 시비를 듣게도 되구요. 백선일중대장동지는 저를 보고 대반이라는게 신랑을 내세우지 않고 제가 나서 독판치기를 한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가 좀 두덜거리기는 했지만 중대장동지의 충고를 제때에 받지 않았던들 큰 사단을 일으킬번했습니다.》

《그래, 그건 흥미있는 말이요. 아무튼 대반이야 신랑을 내세워야지. 왕이산부대장은 사람들속에 비적대장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요. 그가 지난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인민의 아들로 사랑을 받게 되자면 하연성동무의 힘이 크게 바쳐져야 할거요.》

장군님께서는 다시한번 하연성을 힘껏 포옹하시고 원정부대에 출발구령을 내리시였다. 원정부대에는 산판과 주변의 귀틀막동네에서 유격대를 탄원해나선 청년들이 수많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하연성소대가 떨어진 원정부대의 행군종대는 짧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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