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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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드디여 왕이산의 일행이 나타났다.
눈보라가 약간씩 일고있는 행길로 두줄로 늘어선 병사들의 대오가 헐떡거리며 달려오고있었다. 그앞에 한사람이, 분명 왕이산이라고 짐작되는 한사람이 부대와 스무나문발자국이나 앞서 뛰여오고있었다. 부대와 그 사람의 거리는 순간마다 늘어났다. 저 사람이 왕이산인가? 저 사람이 부대를 버리고 혼자 올 작정인가?…
열어젖힌 저고리 앞자락은 날개처럼 펄럭거리고 가슴언저리는 벌겋게 드러났는데 모자가 없는 맨머리에는 더운 입김이 흘러나와 성에가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그것은 마치도 왕이산이 그새 겪은 마음고생에 머리마저 백발로 세여버린것 같았다. 마주 불어치는 세찬 바람에 살이 드러난 가슴언저리와 얼굴에 연신 눈가루가 들씌웠다.
《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바람소리를 짓누르며 울려왔다. 그제사
《
《나는 왕이산을 찾았지 왕청수를 찾지 않았소. 나는 북만땅의 왕이산을 알지 왕청수는 알지 못하오.
왕이산… 내가 찾는 왕이동의 동생은 어디로 갔소? 대답하오.》
《
《이러지 말고 일어나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부대의 수난사를 다 들었소.
아버지의 발구에 묶여갈 때의 아들된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겠소. 아들의 팔목에 결박을 지우는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어떻고? … 세상에 이런 가슴아픈 이야기는 많지 못하오. 그걸 왕이산이 겪다니…》
《
《아니요. 함부로 말을 그렇게 하지 마오. 그러지 말라구.》
《
왕이산은 말을 채 맺지 못하고 통곡소리를 내였다.
《진정하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소. 왕이산은 왕이산의 이름으로 잘 싸워 인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오. 인민에게서 수치를 들쓴 이름을 인민에게 참답게 복무한 혁명가의 이름으로 빛내야 하오. 나는 이자리에서 왕이산과 왕이산의 전체 부대를 유격대에 받아들이자고 하는데 어떻소?》
그 순간 왕이산의 등뒤에 담을 쌓고 서있던 병사들이 와 하고 환성을 터뜨리며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웃는 사람, 우는 사람… 그들의 감격은 하늘중천에 닿은듯싶었다. 그러나 왕이산만은 망연한 자세로 서있었다. 산골짜기를 진동하는 병사들의 환성은 어찌하여 일어난것인지, 저 사람들은 어째서 저렇게들 정신없이 얼싸안고 돌아가는것인지 그는 도저히 아무것도 똑똑히 리해하는것 같지 않았다.
왕이산은 병사들을 제지하려는듯 두팔을 벌리고 그들앞으로 갔다가는 누구에게도 말을 비쳐보지 못하고 뒤걸음쳐 물러났다. 그렇게하기를 그는 몇번이나 거듭하였다.
《병사들, 내 말을 들으시오!》
왕이산은 드디여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끓어번지던 병사들의 환호는 갑자기 가라앉았다. 그는 조용해진 병사들, 놀란듯한 의문이 실린 병사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척거리였다. 한결같이 커다란 의문이 새겨진 병사들의 얼굴에는 방금전에 피여올랐던 눈물겨운 감격이 빛살처럼 퍼져가다 굳어져버렸다. 그래서 아직 그들은 웃는듯도 우는듯도 하였다.
왕이산은 푸들푸들 입술을 떨었다.
《병사들,
병사들 !
그러나 우리는 아무튼 수치를 들쓴 대오가 아닌가? 우리는
언땅을 딛고선 왕이산의 두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말소리도 떨렸다. 헉헉 바람을 삼켜가면서 그는 가까스로 말을 번졌다.
병사들은 눈속에 발을 묻고 얼어붙은듯 까딱않고 서있었다.
북만의 강추위에 얼고 바람에 시달려 거무틱틱해진 얼굴에는 모진 세월의 온갖 고생과 가난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억물린듯한 반점같이 떠올랐다. 이 얼굴은 방금전의 환희에 빛나던 그 얼굴이 아니다. 빛이 사라져버린 얼굴들, 밝지 못한 사람들의 흐리멍텅해진 눈길에는 수심과 아픔이 가시처럼 박혀있었다.
한순간에 사람들이 이렇게도 딴 모습으로 변해버릴수 있단말인가?
《아니요. 당신들은 아직 우리를 알지 못하오.》
사람들의 가슴을 쩡 울리는
《우리는 혁명을 하겠다는 사람과는 언제나 손을 잡소. 그들의 과거가 어떠했건 그들과 손을 잡는단말이요. 비록 혁명앞에 일시 죄지은 사람이라도 자기를 뉘우치고 혁명을 하겠다고 나서면 주저없이 손을 잡소. 나는 왕이산의 부대와도 손을 잡게 된다는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걱정하지 마시오. 인민은 언제나 자기의 진정한 아들을 알아보는 법이며 인민을 위해 참답게 살려는 사람은 어디서나 인민의 지지를 받게 되는 법이요. 나는 당신들도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믿으며 그것을 굳게 확신하고있기에 아무런 주저도 동요도 없이 당신들과 손을 잡는것이요.》
와―하고 병사들은 다시한번 목멘 환성을 터뜨렸다. 깊은 상처인양 험상궂게 얼어붙었던 병사들의 얼굴은 따스한 봄볕에 눈녹듯 녹아내렸다. 수심과 아픔이 얼룩져 빛이 없던 눈길에는 환희의 불꽃이 튕겨나고있었다.
병사들은 아까처럼 얼싸안고 돌아갔다. 그리고 아까처럼 왕이산은 어리둥절해 서있었다. 이 기적같은 사실이 꿈인지 생신지 알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감격, 이런 행복에 습관되지 못한 사람이였다.
놈들에게 쫓기고 인민에게서 돌림을 받으며 두더지처럼 숨어살아야 하는 가긍한 인생이 언제나 그림자같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 욕스런 인생에 금을 긋고 무서운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재생의 길을 걸을수 있게 된것이였다.
왕이산은 감격에 차오르는 가슴을 들먹거리며 다시한번
아, 우리는 얼마나
왕이산은 옷섶을 적시며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누군가, 아귀센 손으로 그의 어깨를 휘여잡아 병사들의 소용돌이속에 끌어들였다.
이게 누군가? 색날은 군복을 입고 커다란 개털모자를 쓴 이 사람이? …
아, 새신랑! 그대의 눈물겨운 정상을 가슴속으로만 슬퍼하며 홀로 부락에 떨궈놓고 놈들에게 쫓겨 허둥지둥 달아난 이 부대장을 잊지 않고
찾아온 진실한 사람, 죄진 마음에 선뜻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왕이산은 드디여 동료의 손을 잡고 병사들의 무리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병사들과 얼싸안고 울며 웃으며 기쁨에 겨워 돌아갔다.
이날밤
《하연성동무, 이제부터 왕이산부대는 이곳에 남아 이 지대의 〈토벌대〉들을 족치고 놈들의 쫓김을 받는 반일부대들을 건져내여 한데 집결하는
어려운 활동을 하게 되오. 앞으로 이들은 주보중유격부대와 합세하여 북만유격전선의 일익을 당당하는 혁명력량으로 발전할것이요. 그러므로 동무가
소대를 데리고 왕이산부대에 남아 그의 손발이 되여주어야겠소. 우리가 저 멀리 대구, 소구, 마록구일대에 적들을 달고 내려가 무리죽음을 시키고
녕안읍으로 다시 진격해들어갈 때는 북만땅은 혁명의 불도가니로 끓어번질거요. 우리 그때 다시 만납시다. 동무가 맡고있는 임무가 조련치 않는데
《
《알겠소. 걱정하지들 말라구.》
《하연성동무가 신랑의 시중을 어떻게 들어주나 걱정했더랬는데 그만하면 대반노릇을 썩 잘한셈이요. 그 깐깐한 김택근이까지도 나중에는 감탄하고말았으니까.》
《
《그래, 그건 흥미있는 말이요. 아무튼 대반이야 신랑을 내세워야지. 왕이산부대장은 사람들속에 비적대장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요. 그가 지난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인민의 아들로 사랑을 받게 되자면 하연성동무의 힘이 크게 바쳐져야 할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