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6 회)
제 3 장
4
이날은 이렇게 모든것이 평온하고 흥성하는 가운데 지나가는것 같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얼음밑에서도 강물은 용용히 굽이치며 흐르듯이 다가올 사변을 앞두고 빈틈없는 싸움이 준비되여나가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유격대원들과 부락인민들이 한데 어울려 잔치를 치르느라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있는가운데 지휘관들을 데리시고
치렬한 격전을 벌리게 될 부락앞의 강버덩으로 나가시여 지형료해를 하고 전투조직을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해가 설핏해진 이른저녁때나 되여 부락으로 돌아오시였다. 울바자너머로 장군님을
알아본 잔치집주인령감이 헐레벌떡 달려나왔다.
《장군님, 어디 가셨기에 이제야 오십니까? 잔치보러 온 이웃부락 로인들이 장군님을 뵙겠다고
뜰안이 터지게 앉아있습니다.》
로인은 장군님을 모시고 팔을 휘저으며 걸었다. 로인은 본시 머리에 망건을 쓰고 망건우에 탕건을 쓰고 탕건우에 갓을
썼더랬는데 갓과 탕건은 어디다 벗어버렸는지 간곳없고 지금은 망건만이 댕그랗게 남아있었다. 그나마도 끈이 풀려 풍잠을 단 웃머리가 옆으로 찌부러져
기울거렸다.
《장군님, 내 오늘 너무 기뻐 몇잔을 들었습니다. 앞길이 캄캄하게 막혔던 우리 딸애가 시집을 갑니다. 우리 딸애는
스물한살 난 처녀고 우리 사위는 서른세살 난 장정입니다. 처음보는 사람들은 수염이 시커먼 신랑이 홀아비가 아닌가 하여 기웃거리는데 알쭌한
총각입지요. 부락늙은이들은 나먹은 장정이 장가를 든다고 쾌자를 입히고 갓을 씌우자고 하였지만 그렇게는 할수 없고 이영풀로 결은 조립을 씌웠더니
문밖에서 애들이 〈초립동〉, 〈초립동〉하며 놀려대질 않겠습니까? 장군님, 이 늙은것이 제 흥에 겨워 참아내지 못하고 술
몇잔 들이켰는데 용서해주십시오.》
《아버님, 그런 말씀도 하십니까. 이런 기쁜날에 술에 좀 취하시면 어떠십니까.》
농민은 장군님을 모시고 기세가 충천하여 뜰안으로 들어섰다. 장군님을 뵈오려고 상을 물리고도
그냥 버티고앉았던 부락사람들이 멍석우에서 소란을 떨며 일어섰다.
장군님께서는 모자를 벗으시고 동네의 늙은이들앞에 정중히 허리굽혀 인사를 드리였다.
한흥권중대장이 때마침 장군님옆으로 슬며시 다가와 귀속말을 외웠다.
《장군님, 저쪽 삽짝모퉁이를 좀 보십시오. 아까부터 굴갓을 쓴 중이 어슬렁거리는데 별로 수상합니다.》
장군님께서 한흥권이 손짓하는대로 삽짝밖을 내다보시였다. 흰장삼을 입은 우에 가사를 걸치고 굴갓을 쓴 중이 념주를
들고 불경의 한구절을 중얼거리면서 시주의 집 문전을 거니듯 왔다갔다하였다.
《저 중이 놈들의 꼬드김을 받은 밀정이 아닐가요?》
《그런것 같지 않소. 저 중도 큰 구경거리가 생겨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것 같소.》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 찬찬히 살펴보니 중은 정말 불경을 외우는 소리를 겉으로 낼뿐 굴갓밑에서 돌아가는 령리한 눈은
이쪽 신방쪽을 유심히 들여다보고있었다.
넓은 세상천지를 좁다하게 돌아치는 중이건만 이런 구경거리는 처음보는 판이다. 굴갓밑에서 해를 보지 못한 중의 비석같이 창백한 흰 얼굴에는
인생의 락을 처음 느껴보는듯한 온화한 미소가 퍼져가고있었다.
그때 한 청년이 잔치집 뒤울안을 헤치고 장군님의 상을 차리고있는 과방으로 뛰여들었다. 과방과 부엌봉당의 사람들이
떠들썩 고아치며 청년을 붙잡았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구 함부로 달려드는거냐. 고기를 담은 목기를 밟아대면서 뭘하자구 과방에 달려들었어?》
청년은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가슴앞에 꿍져안은 물건을 흔들기만 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자 한결 더 놀라 아우성을 쳤다.
그것은 산림경찰대의 옷과 모자, 칼이였다. 과방의 소요를 알아채고 달려간 한흥권중대장이 청년을 데리고 장군님앞으로 왔다.
《장군님, 산림경찰대놈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소? 그런데 이 물건들은 어디서 난거요?》
장군님께서는 청년이 안고 온 산림경찰의 옷과 모자며 칼을 만져보시였다.
가까스로 가쁜숨을 가라앉히고 어지간히 숨소리가 부드러워진 청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장군님, 방금전에 산림경찰대가 저쪽길모퉁이에서 나를 불러가지고 허드레옷 한벌을 가져다달라기에 덧저고리 하나와
꿰여진 솜바지를 갖다주었더니 그것을 제몸에 걸치고 이걸 벗어서 나한테 주면서 이 부락에서 유격대가 왕이산부대병사의 잔치를 치러준다는게 사실이냐,
잔치는 어떻게 되여가구 유격대는 얼마나 와있느냐 이런걸 대구 캐묻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유격대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잔치를
치러주는것은 사실이라고 하니까 자기가 잠간 잔치구경을 하고 가겠는데 이 옷이랑 칼이랑 좀 보관해달라는겁니다. 그럼 후에 크게 알아주겠다고
하면서요… 바로 저게 그놈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청년이 알려드리는대로 길건너 귀틀집 굴뚝모퉁이에서 어슬렁거리고있는 키큰 사나이를 살펴보시였다.
장군님의 눈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오르고있었다.
《한흥권동무, 일은 바라는대로 척척 돼가는것 같소. 글쎄 몇해전에 저 산림경찰대놈들이 반일부대가 부락에 머물러있다는걸 눈치채고 〈토벌대〉를
끌고와 저기 부락앞의 강버덩에서 한개 중대나 되는 병사들을 몰살시켰다고 하오. 강이 온통 피바다가 되였다는거요. 그때부터 부락사람들은 불쌍한
젊은이들의 혼백이 깔린 강이래서 종아리를 걷고 건느지 못하고 통나무다리를 건너지르고 다니게 되였다고 하오. 그때 죽은 반일병사들의 가족이 이
부락에도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니요? 우리 동무들에게 주의를 주어 누구든 저 사람을 놀래우지 말라고 하시오. 유격대가 잔치판에 흠뻑
빠져있다는 인상을 주는게 좋겠소. 이제 저 사람이 돌아가면 오늘밤중으로 이 소식이 녕안읍의 경찰서장 귀에 날아갈것이고 목단강의
〈토벌대〉본부까지도 들었다놓을거요. 그리고보면 놈들이 큰길가에서 수송대를 공격한 유격대가 노루목촌으로 들어가 군중정치공작을 벌리고있다고
생각할것은 틀림이 없소. 그러니 여기서 큰싸움을 벌릴 차비들을 해야 하오.》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있는 한흥권은 목이 메여오르고 눈굽이 뜨거워나는 감동을 느끼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장군님, 알겠습니다.》
한흥권은 장군님의 앞을 조용히 물러나 사람들사이로 소리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