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의병들은 일어나라
3
(2)
미영이 그 시를 음미하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하지만 그 시는 우리 고장을 겉만 보고 지은 시예요. 차라리 제 시를 한수 들어보세요.
길가는 나그네들 험한 산길 싫다지만
산중에 사는 사람들 오히려 산이 좋다네
봄이면 당귀며 고사리 산나물이 좋구요
밤이면 앞개울에서 고기잡이 더욱 좋네》
갑자기 술좌석이 벅적 끓었다. 짝짝 손벽을 치는 사람, 쨍강쨍강 접시를 때리는 사람, 허허 소리내여웃는 사람, 한마디로 미영에 대한 감탄과 찬사의 소리였다.
《이 애, 그게 너의 자작시냐?》
《린영이 미영이한테 졌다. 듣던바대로 네가 영특한 애로구나.》
《그게 백호 림제(리조 중엽의 작가. 〈재판받는 쥐〉의 저자)의 시이구먼. 그렇더라도 마치 즉흥시처럼 얼른 대구로 읊어대니 그게 조련한 일인가.》
리춘영은 물론 안동에서 온 리범직이, 관동지방에서 온 리직신이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러는 사이에 미영은 밖으로 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어른들의 이야기에 끼여들었다는 무안하고 죄스러운 생각때문이였다.
아닌게아니라 안승우가 얼굴이 뻘개서 다시 볼부은 소리를 했다.
《계집이 버릇없기란… 아무리 가르쳐도 듣지를 않거던.》
《뭐가 어드래서? 사내처럼 시원시원해서 좋지.》
《아무러면 자네처럼 꽁하고 샌님같아야 좋을가?》
여럿이 떠들었으나 승우의 자세는 여전했다.
《저게 시집가서 남의 사내들앞에서까지 저러면 어찌겠나. 필시 좋아 안할것이거던. 시부모들은 또 뭐라고 할것인가. 어미없이 자란 계집이라 아비의 말은 도무지 듣지를 않거던.》
사람들이 그런게 아니라고 거듭 말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오래 굳어진 버릇이 어느덧 딸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로 몰아간것이 아닌지…
지금 그에게 살붙이라고는 미영이 하나밖에 없다. 벌써 몇해전에 온 마을을 휩쓴 알지 못할 전염병으로 안해와 함께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것이다. 미영이만은 서울에 있는 외가집에 갔다가 천행으로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 끔찍한 참변이 딸에 대한 애정을 곱절로 더해주었다. 승우가 상처를 한 후에도 재취를 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딸을 위한 생각에서였다. 그에게 계모의 화를 입지 않게 하자는것이였다. 그때 미영의 나이가 겨우 열세살이였다. 대신 집안의 크고작은 일이 다 미영의 어깨우에 얹혀졌는데 놀랍게도 그는 다닥치는 일을 잘 처리해나갔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한것은 아니고 승우나 또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이 나섰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모든 일을 그가 채잡고 운영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언제나 집안이 훤한것이라든지 손님들이 와도 무안해본적이 한번도 없는것이라든지 또 몇해가 가도 가산이 기울지 않는것이라든지 하는 모든것이 전수 미영의 덕분이였다.
그럼에도 승우가 항시 마음을 놓을수 없는것은 그것이 어미없이 자랐다는 선입견과 아울러 사내처럼 덜렁덜렁하고 어른들의 일에까지 끼여들어 아는체 하려는것이였다. 그것만이라면 또 몰라도 근대문명에 따라 자기도 신녀성이 되여야 한다며 서울사람들의 옷차림이 어떠하며 글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따위에 곧잘 신경을 쓴다.
그런것이 계집에게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계집이고보면 몸이 건강하여 시집가서 아이 잘 낳고 집안살림이나 잘하면 그만이지 하고 그는 생각하는것이였다. 그러한 생각의 뒤에는 미영을 어느 명문가의 집에 시집을 보내여 자기의 나머지 여생도 곡절없이 보내겠다는 속심이 깔려있었다.
《하사, 한잔 받으라구.》 하는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마주앉은 사람이 상너머에서 팔을 벌려 잔을 내밀고있었다. 승우가 그 잔을 받으려고 하는데 옆에 앉았던 리춘영이가 먼저 받아 꿀꺽꿀꺽 마시였다.
승우가 은근히 화가 동해 바라보는데 춘영이 하는 말이 가관이였다.
《잔이야 내가 먼저 받는게 옳지, 일개 고을의 사또가 아닌가.》
허허거리는 웃음과 한쪽눈을 찔끔해보이는 뒤에는 분명 딸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승우에 대한 힐난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승우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발끈 성을 냈다.
《제가 사또라고 해서 아무데 가서도 사또인가. 제발 이런 좌석에서까지 저만 저인체 말게.》
같은 량반이라고 해도 벼슬하는 관리이고보면 딱 질색하는 승우였다. 그래서 이곳 군수와도 사이가 좋지 못한것으로 고을에 소문이 나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야 나라가 인정하는 일개 고을의 현감이요, 사또가 분명하지. 그만큼 내 입에 들어오는것도 많아야 할게 아닌가?》
《그런즉 자네도 알만 해. 고을의 장관이랍시고 사람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고 토색에는 또 얼마나 극성이겠는지.》
《흥, 말도 말게. 벼슬 한자리를 얻어하게 되면 그날 밤부터 아첨군들이 찾아들고 뢰물이 굴러들거던. 그런자들을 보면 무척 사랑스럽고 믿음이 가지만 말대답이나 톡톡 하고 제 소견머리나 고집하는자들을 보면 낯색부터 찡그려진단 말이야. 이건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만들어주어서 그런것일세.》
《흥, 내 친구 하나가 고을의 사또가 되였길래 신세를 져볼가 했더니 안되겠군.》
누군가 이죽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리춘영이 얼른 받았다.
《이 사람이 모르는군.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다는것은 곧 너를 구속한다는것이다.〉 하는 말이 있지 않나. 신세같은것은 말도 말게.》
춘영이 원래 롱담을 좋아하는데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요령까지 배워서 제법 능청을 부렸다. 그러나 승우는 더욱 앵돌아져서 상에서 벌컥 물러나앉더니 장죽을 빼여물었다.
《실컷 그래보게. 하지만 그때에는 우리의 벗이 아니구 도학군자가 되지 못한다는것을 명심하게. 우리가 애초에 의암선생에게서 글을 배울 때 모두가 도학군자가 될것을 목표하지 않았던가. 했던것을 이제 현감벼슬 한자리 얻어하더니 순간에 탐관오리가 되여버렸구만.》
《글이라는것이야 철없을 때 하는것이구 아래사람들이나 하는것이지 웃사람들이 언제 책같은것을 펴볼새가 있구 또 그럴 필요나 있다던가. 원, 저렇게두…》
《그러니 자넨 밤낮 아첨군들의 말이나 듣고 그들이 맞춰주는 비위에 따라 정사라는것을 하고있겠군. 더럽다, 더러워. 퉤…》
승우가 참지 못해 때아닌 깃부채를 들고 화락화락 젓다가 춘영의 옆에 대고 침을 뱉는 시늉을 하였다. 이번에는 춘영이 발끈해서 얼굴의 땀을 씻어내며 이것 보아라 하고 달려들 자세를 취하였다.
바로 그때 갑자기 좌중을 짓누르는 귀설은 소리가 울려나왔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리린영이가 상앞으로 제비처럼 입술을 쪽 빼들고 지지위지지를 외우고있었다.
순간에 웃음판이 터졌다. 지어 다같이 성이 올랐던 안승우와 리춘영이마저 입을 벌쭉거리다가 허허 너털웃음을 터쳤다.
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라고 하는것은 그들이 어렸을 때 외우던 공자의 말이다. 즉 《아는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것은 모른다고 하는것이 곧 아는것이다》라는 뜻인데 그때 그들은 그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누구나 애를 먹고있었다. 그중 안승우만은 누구보다 빨리 따라외울뿐아니라 그 발음이 제비의 울음소리와 하도 비슷해서 자주 놀려대군 했는데 지금 린영이 그때의 흉내를 내는것이였다.
모두가 허리가 끊어지라 웃어대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소리가 그들을 한바탕 웃기였다.
《독식락여 중식락 숙락!》
그 《독식락여 중식락 숙락》이라고 하는것은 《혼자서 먹는것이 좋으냐 여럿이 먹는것이 좋으냐》하는 뜻으로서 원래는 맹자가 왕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독악락여 중악락 숙락》이라고 했던 말이다. 즉 《음악을 혼자 듣는것이 좋으냐 여럿이 듣는것이 좋으냐》하는 뜻으로 했던 말인데 그들이 글공부를 하면서 그 소리를 개구리울음에 비유했을뿐아니라 먹는다는 의미로 와전까지 했던것이다. 그 소리만은 이 자리에 없는 김복한이가 특별히 잘해서 의암선생에게서 칭찬을 받았다. 한것을 그들은 복한이 식성이 좋아서 몸에 맞게 비유를 잘했을뿐이라고 하면서 그를 노상 놀려주군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아득한 옛일로 되여 하나의 즐거운 추억으로 밖에 남지 않았다. 한바탕 웃고나자 그것도 사라지고 보다 급한 눈앞의 현실이 다가왔다. 나라가 위태롭다는것이다.
왜놈들이 내 나라를 침노하고있다. 조선이라는 신성스러운 나라가 저 바다건너 섬오랑캐족속들의 발굽에 짓밟히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놓여있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 모여앉았다. 방금 주고받은 롱담이나 언쟁들조차 그 심리적압박감속에 제나름으로 터쳐놓은 반감일수 있다.
나라가 위태롭다. 장차 이 나라를 어떻게 건져낼것이냐…
《미영아, 술 더 가져오너라!》
다시 술상에 다가앉은 춘영이 소리쳤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던 미영이 문가에 나타났다.
《술이 없어요. 아니, 마셔선 안돼요.》
그 소리를 듣고있던 승우가 춘영의 편을 들었다.
《어른들앞에서 또 무슨 대답질이냐. 어서 가져와!》
《큰
《큰아버지가 언제 오실줄 알구. 어서…》
승우의 마음이 돌아선것을 보자 모두가 성수가 나서 술을 더 요구했다. 그러나 미영은 대답을 안하고 입만 사려물었다.
그가 말하는 큰아버지란 곧 의암 류린석이다.
성이 류가인 그가 안미영의 큰아버지가 될수는 없다. 그러나 미영은 문중의 개념에서보다 린석을
그만큼 지금 미영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고 사람까지 보내여 모셔오게 한 린석을 애타게 기다리고있는것이다.
언제면 오실가. 빠르면 오늘이라도 당도할수 있을터인데. 큰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더니 곧장 누군가의 높고 긴 소리가 방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대장님 행차이시요. 의암선생님이 당도하시였소!》
방안사람들이 후들쩍 놀라 일어서고 미영은 어느새 뜰아래로 뛰여내렸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활짝 열린 대문으로 린석이 들어서는것을 보았다.
흰 무명도포에 검은 통영갓을 쓰고 바지를 가뜬히 동여맨 발목아래에는 목까지 올라온 갖신을 받쳐신었다. 많지 않은 수염은 이미 반백이 지났으나 얼굴에는 아직도 진한 홍조가 어리고 희열이 넘쳤다. 환한 웃음으로 뜰안을 둘러보는 눈에는 열정이 이글거리고있었다.
《대장님께 문안드리오. 원로에 수고하셨소이다!》
《귀체만강하셨나이까. 만년축수를 바라옵니다!》
각기 제나름대로 올리는 인사소리가 뜰안을 울렸다. 린석은 한사람한사람을 일으켜세우며 답례를 했다.
《고맙네. 음, 자네도 왔군. 잘 왔네…》 하고는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승우가 그를 아래자리에 앉히고 같이 온 김복한과 주용규를 그옆에 앉히였다. 이윽하여 모두가 자리를 차지하자 린석이 말하였다.
《이렇게 모두들 모여와주어서 고맙네. 그 수고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겠네. 다만 여기 괴은 리춘영이를 비롯해서 모두 힘든 고행길을 스스로 택한데 대하여 고맙게 여길뿐이네. 나로 말해도 애초에 의병을 호소할 때 무슨 의병대장이 되자고 해서였겠나. 다만 왜놈들과 일어나 싸우자고 호소만 했을뿐인데 여러분들이 먼저 모여왔기에 같이 힘을 써보자고 달려왔네.》
《선생님, 이것은 정당하며 마땅히 그렇게 되여야 하는 일인줄로 압니다. 선생님은 평시에 나라라는것은 우리가 딛고선 땅이고 하늘이며 먹고 쓰고사는 모든것을 안겨주는 근본이라고 하시였습니다.
이제 그것을 잃고나면 어디에 가서 의지할 곳을 찾겠습니까. 아울러 저희들을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모든것을 의탁하는것은 마땅한 도리이며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리춘영이 먼저 말하고 그앞에 엎드렸다. 뒤따라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리며 합창을 했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이끌어주십시오.》
린석은 수염을 쓸어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러나 이 일은 오직 여럿이 일심협력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나설 때에만 성공할수 있네. 이것을 잊지 말것만 바라네.》
여럿이 또다시 머리를 방바닥에 조아리고 모두를 대표하여 먼저 안승우가 한잔 따랐다.
린석이 기분좋게 그것을 받아마시였을 때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미영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누구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그대로 문앞에 무릎을 꿇고 린석을 향해 큰절을 했다.
《큰
《큰
저는 오늘 큰
린석은 그의 마디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며 연해 웃음을 금치 못하였다.
《네가 한해사이에 또 몰라보게 이뻐졌구나. 이젠 시집을 가야지. 신랑감은 골라놓았니?》
《큰아버진 또… 난 의병이 될래요. 녀자도 싸울수 있지요?》
《네가 의병이 되겠다구? 난 녀자가 의병이 되였다는 말을 여적 듣지 못했다.》
《음? 큰아버지가 격문에 그렇게 쓰구선, 왜놈과 싸우는 일에는 남녀로소 존비귀천을 가리지 말고 모두 떨쳐나서야 한다구.》
《그랬던가? 그럼 미영이도 싸워야지. 창칼을 들고 전장엘 함께 나가보자꾸나.》
그 소리에 모두가 따라웃었다. 구석구석을 살피며 주안상을 주관하던 안승우도 그 소리에는 따라웃지 않을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