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2 장
11
눈덮인 북만의 겨울밤은 캄캄하게 어두워지는 때라고는 별로 없다. 눈이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내리덮인 날이 아니면 대체 흰 밤이 계속되는것이다.
새로 꾸린 주보중의 밀영에 밤이 닥쳐왔으나 잠자는 사람이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낮이나 다름없이 바쁘게 뛰여다녔다. 원정부대는 행군준비를 하느라고 잠잘 사이가 없었으며 주보중의 유격부대는 그들대로 원정부대의 행군준비를 도와주느라고 바빴다.
동만의 유격구들을 일거에 《소탕》하려는 관동군사령부의 《위공》작전에 따라 동만의 유격구들을 기습하는 북만의 《토벌》거점들을 모조리 소탕해버리시기 위해 벼르고 벼르시던 그 길에 큰걸음을 내디디시여 오늘은 이 땅에 와계신것이였다.
그러자면 원정부대는 적어도 왕복 천여리를 훨씬 넘어서는 어려운 행군을 해야 하며 적의 《토벌》거점들을 소멸하는 간고한 전투들을 줄곧 벌려나가야 하는것이다.
이것은 실로 간단한 용단으로 이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장군님께서는 밤이 지새는줄 모르고 수십번도 더 거듭하여 무르익히신 큰 작전의 구상을 다시 또다시 돌이켜보시는것이였다.
방금 숲으로 떠오른 쪼각달은 사방이 훤하게 트인 공간속에서 별로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지는 못하였으나 눈우에는 희미한 나무그림자들이 가로눕기 시작하였다.
마치 길우에 목책을 건너지른듯이 나타난 나무그림자들을 소리없이 밟고나가시던
《벌써 밤이 이렇게 지났는가?》
하마카강의 습한 안개가 밀림속을 자욱하게 감도는데다 로야령이 찬기류가 보이지 않는 눈사태마냥 산발들을 휘감고 내리밀리는바람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원정부대가 행군해나갈 경박호대안은 어떠할것인가?
바로 이때문에 지휘관들은 원정부대에서 허약한 동무들을 주보중의 밀영에 남기고 끌끌한 대원들만 데리고 떠나자는 요구를 한두번만 제기해오지 않았다.
(동만의 많은 사람들이 권고했듯이 준비된 대원들만 데리고 원정길을 떠나왔다면 오늘에 와서 부디 이런 난사에 부딪치지 않아도 될것이였으며 머지 않아 눈앞에 다닥칠 한결 더 복잡한 사변을 예감하면서 마음을 번거롭히지 않아도 얼마든지 될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가 부디 그렇게 할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될 사람들이였기에 힘들어도 신입대원들을 데리고 로야령을 넘었으며 지금도 그들을 이끌고 어려운 원정길을 헤쳐가려고 고심하고있는것이 아닌가?)
바람 없는 잠풍한 숲속에서는 무수한 서리꽃이 날아돌았다. 아득한 수림의 상가지에서 떨어져내린 서리꽃은 층층으로 가지를 뻗고 늘어진 서리꽃들에 덜맞히여 무수히 작은 비말들을 뿌리는가 하면 때로 덩어리를 이루기도 하고 어떤곳에서는 눈우에 솟아오른 마른 양초잎을 스치며 떨어지는 소리가 사륵사륵 일어났다.
하마카강에서는 흰 면사포같은 안개가 떠올라 수림의 변두리로 끝없이 밀려갔다. 골짝바닥의 길들과 나무들은 안개의 장막속에 묻혀버리고 산중턱의 나무들도 밑동아리를 안개속에 묻고 허공중에 떠있는듯이 신비하게 솟아있었으며 그 신비경을 이룬 산중턱의 나무들사이로는 난데없는 사람의 검은 형체들이 휙휙 미끄러져가고있었다.
고요하기 이를데 없던 수림의 공지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부산스레 일어났다.
《거기 발구길에 나타나신분이 주보중동지가 아닙니까?》
저쪽에서는 아무 반향이 없이 부지런히 지팽이만 내짚더니 그만 힘이 지친듯 눈속에 발을 묻고 멎어서며 코등만을 내놓고 온통 얼굴을 뒤덮었던 커다란 털모자를 벗었다.
《글쎄 주보중동지가 틀림없겠지요. 그렇지 않고야 지팽이에 몸을 싣고 분주히 나다닐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보중은 털썩 어디엔가 주저앉았다. 흰눈속에 가리워 무엇인지 똑똑히 알수 없으나 그것은 옆으로 가로누운 진대나무같았다.
《김일성동지, 어서 이리와 앉으십시오. 부근부근한게 방석같은 맛이 드는군요.》
주보중은 털모자를 들어 옆자리의 눈을 쓸어내고 지팽이로 진대통을 텅텅 두드렸다.
《그런데 이 새벽바람에 어찌된 일입니까?》
《사냥을 나왔지요. 이왕이면 김일성동지와 헤여지는 이 마당에서 즐거운 한때나마 보내고싶어 사냥을 조직했답니다.》
《사냥이요?》
《그럼요.》
《아니, 날도 채 밝기전에 사냥을 하다니요.》
《괜찮지요. 이런 희끄무레한 밤에도 사냥을 한답니다. 아무튼 김일성동지께서 북만땅에 오셨는데 이곳의 유별난 사냥구경이라도 하셔야 기념으로 남을게 아닙니까.》
주보중은 지팽이로 앞에 서있는 노가지나무를 두드렸다. 순간 그물처럼 엉켜진 나무가지들이 부르르 몸을 떨고 뒤흔들리자 공중에 신비한 둥근 우산을 휘감고있던 서리꽃들이 나무가지로부터 분리되여 잠시동안 허공에 그대로 떠있다가 우수수 소리를 내면서 주보중의 발치에 무너져내렸다. 한쪽 발을 서리꽃속에 묻고 한쪽 어깨에도 서리꽃을 함뿍 들쓴 주보중은 이 밀림속에서의 상봉을 유난한 감격으로 체험하는듯 눈을 슴뻑였다.
《참, 아름답지요, 김일성동지?》
《예, 더 이를 말이 없습니다. 좋은 경치에 훌륭한 벗을 대하고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내가 방금전에 저쪽 숲변두리로 스키를 탄 웬 사람들이 피꿋피꿋 지나가는것을 보았는데 그들이 혹시 사냥에 떨쳐나선 동무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들이지요. 한데 그들은 별로 신통한 재능들이 없는 몰이군이랍니다. 나의 부대에 단 한사람의 유명한 사냥군이 있는데 그는 총을 쏘아 짐승을 잡는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짐승에게 바줄사래를 던져 걸어채는 묘한 솜씨를 가지고있답니다. 이런 사냥이 아니라면 내가 부디 이 일을 조직할리 만무하지요.》
주보중은 신이 난듯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돌려 발구길쪽으로 지팽이를 내짚었다. 그는
《주보중동지, 사실 사냥이라는건 구경하는 재미보다 뛰여다니며 땀을 흘리는 재미가 더 좋지요. 주보중동지가 몸이 조금만 나아 지팽이를 짚고라도 달릴수 있다면 몰이군들속에 섞여 한바탕 짐승을 몰아대는 일에 뛰여들판인데…》
《참 구미가 동하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진작 그랬으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일성동지와 함께 짐승몰이도 하고 원정길을 함께 떠나기도 하구요. 그런데
《무슨 말씀인지 어서 하십시오. 혹시 우리들사이에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것이 아닙니까?》
《옳습니다. 바로 그 문제지요. 김일성동지는 나더러 병인의 몸으로 천여리의 원정길을 밟아낼수 없다고 밀영에 떨어져 치료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요?》
《물론 부상자들이 밀영에 남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김일성동지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원정부대에도 부상병들이 있으며 부상자보다 못지 않게 행군에 힘들어하는 대원들이 있다는겁니다. 그래서 그 동무들도 나와 함께 부상처도 치료하고 몸이 약한 동무들은 몸보신도 하고 그랬으면 어떨가 하는 의향입니다.》
《예, 그 문제말이지요. 하긴 나도 방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고있던중입니다. 그런데 거기 대한 나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김일성동지, 좀 가만계십시오. 내 이야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원정부대에서 부상자들과 몸이 약한 동무들을 밀영에 남겨두면 좋겠다는것은 내 생각만이 아니라 부대의 관리를 직접 책임지고있는 지휘관들의 의향이기도 합니다. 연길중대 중대장동무는 부상자들과 허약자들을 그냥 데리고 떠났다간 부대의 민첩한 기동에 큰 지장과 혼란을 줄수 있겠다고 심히 우려하는겁니다. 그야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 아닙니까?》
《있을법한 일이지요.》
《그것 보십시오. 김일성동지의 생각도 크게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따지고보면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는 여기 북만땅에 와서 새삼스레 느끼는 고충이 아니고 동만땅에서 원정부대를 편성하고있을 때에 생겨난 난사입니다.》
《아, 그렇군요.》
주보중은 놀랍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적지 않은 간부들속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됐었습니다. 이를테면 준비된 동무들을 선발하여가지고 북만원정을 해야 한다는것이였지요. 그렇지만 나는 선뜻 그 견해에 동의할수 없었습니다. 싸움이 조금 간고해지거나 형세가 어지간히 불리해지면 누구의 입에서나 준비된 사람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말이 울리군하는데 준비된 사람들이란 따로있는게 아니지요. 그들도 처음에는 혁명이란 뭔지 알지도 못했고 오늘과 같은 간고한 행군을 해볼 생각은 꿈에도 못했으며 총알 한알에 왜놈 한놈씩 쏘아넘기는 명사수가 된다는것을 상상도 못해본 사람들이 아니였습니까? 오직 간고한 투쟁속에서 그들은 끌끌한 혁명가로 자라나 어려운 한모퉁이를 떳떳이 맡아나설수 있는 투사로 된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에게는 준비된 혁명가란 따로있는것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그렇게 성장하게 된다는 견해가 확고하게 뿌리박혀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혁명가들을 키워 장차 광활한 지대에로 진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조선과 전 만주의 넓은 지대에서 유격전을 벌려나가려면 실로 얼마나 많은 혁명가들이 요구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준비된 혁명가들을 어디서 데려오기라도 하겠습니까? 우리 손으로 키워내는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북만원정이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믿음직한 혁명가들이 수없이 자라나리라는 기대를 언제나 간직하고있으며 북만원정을 끝내고 조국으로, 백두산지구로 나가게 될 때에는 혁명가들의 대오가 지금보다 열배 스무배로 성장하게 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연 얼마나 커다란 우리의 행복입니까? 그래서 난 동만땅에서 북만원정부대를 편성할 때에도 신입대원들을 적지 않게 망라시켰으며 지금도 그 동무들을 데리고 어려운 원정길을 헤쳐가리라는 결심을 조금도 드티지 않습니다.》
《내 한흥권동무에게서 원정부대에 신입대원이 많다는 말을 듣고 설마 그렇게야 대오를 조직했을가싶은 의문을 바이 버리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것이 죄다 리해됩니다. 김일성동지, 부탁컨대 어데서나 건강에 류의하셔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주보중동지.》
주보중은 미끄러운 비탈길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 참 희한한걸. 저것 보십시오. 몰이군들의 산병선이 나타났습니다.》
몰이군들의 넓은 산병선은 차츰차츰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산밑으로 길지 않은 낭떠러지가 들여다보이는 골짜기로 폭을 좁혀나가기 시작하였다.
《옳지, 걸려들었군!》
주보중은 문득 지팽이를 높이 들어 웨쳐대며 비탈길을 내리달렸다. 그러다가 문득 아픈 다리를 헛짚고 옆으로 곤드라졌다. 그통에
두분의 웃음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
《야, 대단한 수확이다!》
몰이군들이 스키를 벗어들고 승벽내기로 웨쳐대면서 등판으로 뛰여올라왔다. 바줄을 던진 몽골족청년은 어느새 낭떠러지밑으로 팽팽히 헹기운 바줄을 내리잡고 쏜살같이 미끄러져내려갔다. 표범같이 날랜 동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