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2 장
7
한흥권은 김택근소대를 데리고 이도하자주변의 부락들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소대에는 강진옥이와 두명의 녀대원이 끼여있었다.
오성숙이와 차일진은 출판소일로 기본대오에 남았다.
다정한 동무들과 헤여진 강진옥은 때없이 쓸쓸한 생각에 잠겨 그들을 생각하였다. 그렇건만 떠나올 때 그들은 진옥이더러 이제 한흥권중대장과 가까이 있게 되였으니 얼마나 기쁠터이냐고 그리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축복까지 해주었다.
정말 내가
강진옥은 별로 구슬픈 생각이 들어 몇발자욱앞에서 걸어가고있는 한흥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라고는 하였으나 따로 호전이 남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슴에 사무쳐있는 그리운 정을 주고받은 때가 거의 없었다.
로야령을 넘어 북만땅에 행군해 들어오는 과정에는 말할것도 없었고 횡도하자부근부락에 머물러있는 며칠동안에도 이런 일이란 있어보지 못했다. 조용히 지나온 나날을 더듬어올라가 마촌이나 혹은 요영구에서 두해 가까이 보내는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깡그리 더듬는다해도 별로 류다르게 추억될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것이다.
한흥권은 언제나 일에 몰려 돌아가는 사람이다보니 자기의 사생활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며 강진옥은 강진옥이대로 자존심이 강해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무튼 강진옥은 혁명가들의 생활자체가 비상히 준엄하고 격동적인것만큼 자기들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도 보통인간들의 애정처럼 평범할수 없다는 견해를 항상 견지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강진옥은 다정다감하고 친절하며 눈썰미있게 련인을 보살피는 청년을 보게 되면 별로 쑥스러운 생각이 들고 우리는 저런 식으로 사랑을 해서는 안되리라는 일종의 자기 긍지까지 느끼군하였다.
강진옥은 한흥권중대장이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를 몸가까이 느끼면서도 서뿔리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것을 한두번만 보아오지 않았으며
그때마다 한결 더 강렬하게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는
습관이란 참으로 이상한것이였다. 한번 그렇게 형성되여버린 사랑의 감정은 수년세월을 거듭하는 사이에 이제는 어느편에서도 쉽사리 그것을 깨뜨려버릴수 없는 공고한것으로 되고말았다. 진옥은 한흥권중대장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애착심을 상상속에서만 키워가고있었다.
그러나 요즘 진옥은 자기
하나하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한흥권이와 자기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라는것은 한낱 선언뿐이고 실제상으로는 남남끼리나 다름이 없이 소격하게 살아온것 같은 구슬픈 생각이 꼬리를 휘저으며 일어나는것이였다.
더구나 많지 않은 사람들속에서 여느때없이 한흥권의 존재를 몸가까이 느끼게 되는 이즈음에는 너무도 어설프게 흘러온 지난날들이 다시다시 추억되였으며 앞으로는 어찌될가, 이후에도 호두알처럼 단단히 여물어버린 이 애정이 변함없이 이어질가 하는 일종의 불안이 가슴 한구석을 쓸쓸하게 파고드는것이였다.
언제부터 진옥의 마음속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것인가? 조용히 지난 일을 거슬러올라가면 로야령을 넘어올 때 중대와 따로 떨어진 조그마한 대오에서 오성숙이와 차일진의 남다른 사랑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이전의 그 도고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진옥의 보루는 조금씩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것이였다.
진옥은 처음 오성숙이와 차일진의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나 그런 일이 자주 거듭되는 사이에 줄곧 그것을 목격하게 되자 어느덧 그들의 애정이 사랑스레 리해되고 부럽게도 여겨졌으며 오성숙의 손에서 별의별 시중을 다 받고있는 차일진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느낌마저 품게 되였다.
그리고 자기가 한번도 오성숙이처럼 지극하게 한흥권중대장을 사랑해주지 못한 일종의 쓸쓸하고도 동정에 사무친 감정에 젖어들었다.
진옥은 예전처럼 한흥권의 얼굴을 대할수 없는 자기 모순속에 한발한발 잠겨갔다. 자기를 둘러싼 녀성들의 세계에서는 항상 오성숙이라는 성실한 녀자가 살고있었으며 남달리 부지런하고 열성스레 뛰여다니는 그가 눈앞에서 얼른거리였다.
녀대원들은 오성숙을 생각해서도 차일진을 돕고 즐겁게 그의 시중을 들었다. 진옥이 역시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왜 자기들사이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만 생각되는가? 진옥은 두어발작앞에서 허벅다리에 드리운 싸창을 가볍게 눌러잡고 다른 한팔을 휘저으며 걸어가고있는 한흥권을 눈물겹게 지켜보고있었다.
진옥은 한흥권의 쭈글쭈글한 털모자며 나무가지에 긁혀 솜이 터져나온 솜저고리의 째진 자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로야령을 넘어올 때 산뜻하게 다리에 감았던 행전은 어디 갔는지 없어지고 불에 그슬린듯 싯누래진 낡은 행전이 감겨있었다.
진옥은 차마 못볼것을 본것 같은 생각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만약 자기가 오성숙이였다면 한흥권의 몸이 이렇지는 않았으리라는 아픈 가책이 든다.
이것이 사랑일가? 이것이 애착일가?
강진옥은 자기도 오성숙이처럼 살고싶은 그리고 보통녀자로 소박하게 생각하고싶은 부드러운 지향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며칠동안 이도하자주변을 돌고난 한흥권은 좀더 넓은 범위에서 주보중부대를 찾기 위해 소대를 몇개 소조로 나누어 부근 마을들과 목재판들을 돌아보게 하였다.
한흥권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면서 이틀에 한번씩 이도하자에 정해놓은 귀틀집으로 련락을 띄우라고 하였다.
강진옥은 김택근의 소조에 망라되여 한흥권중대장과 헤여졌다. 이러고보니 강진옥으로서는 별로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기들의 일이란 이렇게밖에 될수 없는것이구나 하는 남모를 쓰라린 아픔이 가슴 한구석을 허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