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2 장

6

 

마차는 울퉁불퉁하게 눈이 다져진 달구지길을 따라 장밤 내달렸다. 백송로는 횡도하자부근부락을 떠난 때로부터 일체 말이 없었다. 잠이 드셨나 하여 고개를 돌리고 눈여겨 살펴보면 의자등받이에 몸을 누인채 눈만 조용히 감고 명상에 잠겨있는 아버지를 현경은 발견하게 되는것이였다.

백송로의 입에서는 이따금 알릴락말락 한숨소리가 새여나올뿐이였다.

마차안은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볼수 없이 점점 얼어들기만 하였다. 짬이 휑하게 버그러진 문틈으로는 눈바람이 새여들고 널쪽을 깔고 풍천을 덮어놓은 마차바닥으로부터는 한기가 올리밀었다.

현경은 아버지가 걱정되였다.

《아버지, 부락에 들려 잠시 몸을 녹이고 가시자요. 이러다 아버지의 몸에 탈이라도 나면 어찌겠어요?》

《아니다. 좀더 가자꾸나. 이제 얼마간 더 가면 송선생의 집이 있다. 늙은이의 문안도 할 겸 거기서 언몸을 녹이자꾸나.》

백송로는 다시금 조용히 눈을 감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누이더니 점도록 말이 없었다.

현경은 눈바람이 새여드는 창유리에 이마를 붙이고 달빛에 드러난 눈덮인 산야를 내다보았다. 현경이가 서울을 떠나올 때만 해도 빨간 잠자리가 행인의 짐보따리에 붙어다니던 따스한 가을날이였는데 여기는 벌써 눈속에 잠겨있다.

(상해는 어떠할가?)

현경은 생각하고있었다. 그곳은 북만보다는 훨씬 남방이고 서울보다도 더운곳이다. 현경이가 그곳에 발을 들여놓게 될 때는 한창 좋은 상해의 가을을 보게 될것이라고 아버지는 이야기하였다.

《상해는 서울보다도 동경보다도 훨씬 크고 번화한 국제도시다. 아무러면 이 을씨년스러운 북만땅 같겠느냐? 어서 그곳에 나가 자리를 잡아라.》

아버지는 슬하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 딸을 앞에 불러앉히고 이렇게 타일렀었다. 현경은 아버지의 권고를 쉽게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어머니없이 홀로 외로이 지내는 그 아버지가 가긍하여 고국을 떠나온 몸인데 여기서 다시 상해로 가라고 하니 딸된 마음으로 쉽사리 그리할수 없었다.

현경은 울며불며 아버지의 권고를 뿌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 입밖에 내놓은 말을 쉽게 꺾는 성미가 아니였다. 이리하여 현경은 고국을 떠나온 몸차림그대로 다시 상해로의 먼 려행길에 오른것이였다.

아버지는 마록구에 있는 고모네 집에 떨어지고 자기는 동만에 나가 상해방면의 기차를 타게 될것이다.

현경은 조용히 눈물을 머금고 쓸쓸히 홀로 세월을 보낼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팔년전에 어머니를 잃었다. 마땅히 후실을 맞아들일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먼 친척되는 할머니를 한분 모셔다 때식을 끓이게 하고는 지금까지 홀아비생활을 계속하였다.

아버지는 본래 술과 담배를 모르는 정갈한분이였다. 그렇던 아버지가 곧잘 술에 취하시고 품에 담배쌈지까지 갖추게 되였으며 언제부터인가 약담배도 조금씩 하시는 눈치가 있었다.

얼마나 심사가 울적하셨으면, 얼마나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지탱하기가 지겨웠으면 숫눈같이 정갈하던 아버지의 의식이 그 지경으로 얼룩이 졌을가?

현경은 아버지의 곡절많은 인생을 더듬었다.

아버지의 선대들은 대대로 한글학자였다. 아버지도 역시 한글에 조예가 있었다. 이 어지러운 세상의 참혹한 비극이 내 나라 겨레의 운명을 그토록 무참히 짓밟지 않았던들 아버지는 어학계의 중진으로 한글연구에 뜻있는 한생을 바쳤을것이였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나라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게 되자 아버지는 그 당시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조직한 어떤 청년회에 들어가 대한문앞에서 시위투쟁을 벌렸었다.

그것이 빌미로 아버지는 체포되고 한해동안 옥살이를 하였으며 옥에서 풀려나온 뒤에는 가산을 팔아가지고 북간도에 들어가 몇사람의 애국지사들과 힘을 합쳐 조그마한 의숙 하나를 세웠다.

그러나 이름이 의숙이지 학생은 오십명도 되나마나하였다.

이 적은수의 동포자녀들을 교육하고 뒤바라지를 하는데도 재정이 모자랐다. 그리하여 불과 오륙년을 가까스로 지탱하던 의숙을 해산하고말았다.

그뒤에 아버지는 서간도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당시 교포들의 자치기관으로 경학사가 조직되여있었고 경학사의 부속기관으로 독립군양성과 교포교육을 촉진하는 강습소가 세워져있었다. 여기서 아버지는 조선말과 조선력사, 지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간곳마다에서 자금난에 모두들 허덕였다. 강습소 운영자들은 국내에 사람을 보내여 자금을 취해오는 한편 황무지를 일구고 인삼밭을 가꾸어보느라 했으나 그해의 대흉년에 페농을 하고 경학사와 독립군양성소도 해산할수밖에 없었다. 서간도의 독립운동자들은 대부분 상해로 나가고 아버지는 북만주로 다시 들어갔다.

북만주땅에서는 김좌진이 신민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고있었다. 아버지는 김좌진의 수하에서 독립군의 양성에 힘을 바치며 자금조달을 위해 국내에도 몇번 드나들었다.

이무렵에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토벌》이 심해지기 시작하여 독립군들은 똑똑한 근거지도 없이 로상걸식을 하면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아버지의 나이는 벌써 륙십이 가까왔다. 아버지는 녕안촌에 자리를 잡고 야학을 열어 동포자녀들에게 애국정신을 키워주는 한편 군자금을 모아 김좌진의 독립군에 섬겨주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득바득 모아 보내준 군자금은 모두다 김좌진의 방탕한 생활에 바쳐지고 독립군의 군자로는 씌여지지 않았다. 사실 이때의 독립군운동이라는것은 벌써 이름만이 남은 때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처지는 서산락일의 운명에 처하였다. 북만땅에서는 독립군의 존재를 볼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1932년에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지자 형식만으로 존재하고있던 독립군마저 중국본토로 들어가고말았다.

넓으나넓은 북만천지에 홀로 남은 아버지의 신상은 고독하기 이를데 없었다. 조그마한 녕안촌에서 야학방이나 열어 동포자녀들을 가르친댔자 이 나라의 광복운동에 무슨 도움을 줄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이즈음 녕안땅에는 일본놈군대가 날마다 들이닥쳐 어찌다 읍거리에 나가면 누런 군복이 길바닥에 한벌 깔리고 왜놈의 사택들이 곳곳에서 키돋움을 하며 일어섰다.

이리하여 아버지는 이 북만땅에서 오랜 나날 흘러보낸 애국운동에 금을 긋고 상해로의 출발을 계획한것이다. 상해쪽에 나가면 한때 손잡고 독립운동에 정진하던 동지들이 있다.

그쪽의 독립운동상태는 어떠한것인지? 이 만주땅에 일제의 괴뢰만주국이 세워진이상 일본놈의 세상이 된것은 번연한 일이고 따라서 조선의 독립운동자가 울짱을 박고 살아가기는 더없이 고달픈것이니 중국대륙으로 흘러들어가는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아버지는 생각하고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고국에서 찾아온 딸더러 상해로 떠나보내게 된것이며 그곳에서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게 되면 곧 뒤따라가 그들속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차비였던것이다.

이 모든것을 생각하자 현경의 눈에는 절로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두눈을 깊이 감고 심뇌에 싸여 말없이 명상에 잠겨있는 아버지의 심사가 헤아려졌다.

들은 차차 밝아왔다. 가도가도 끝없는 눈덮인 산야가 눈앞으로 흘러지나갔다. (조선의 독립은 이제 어디에 기틀을 마련하고 일어선단말인가? 상해에 조선독립의 활로가 아버지의 념원처럼 열려있을것인가, 거기서도 조선의 래일, 민족의 래일을 쳐다볼수 없다면 한생을 나라의 독립을 바라고 이방의 거친 산야를 헤매인 아버지의 막대한 수고는 어찌돼야 하나?)

현경은 차차 밝아오는 들과 함께 불안스레 눈앞에 비껴흐르는 알지 못할 위협에 가슴을 떨며 아버지의 쿨럭쿨럭하는 기침소리를 듣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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