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2 장

4

 

원정부대는 팔도하자와 이도하자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골막치기 귀틀막부락에서 하루밤을 묵어가게 되였다.

적의 마창 《토벌》근거지가 멀지 않은데다 횡도하자전투이후에 유격대의 행방을 찾아 갑자기 밀려든 적들이 사방에서 싸다니고있었으므로 부락의 경계를 물샐틈없이 하였다.

사위가 쥐죽은듯 고요해진 깊은 밤중이였다. 큰길쪽의 보초대에서 수상한 사람 두명을 붙잡았다는 보고가 왔다. 한흥권은 지체없이 하연성소대장을 보초대로 내보냈다.

소대장을 알아본 보초병은 단속해놓은 마차에서 떨어져 다가오더니 웬 마차가 보초소를 피해 길아닌 밭지경을 가로질러 부락을 빠져 나가기에 붙잡았다는것과 마차안을 살펴보니 늙은 로인과 젊은 녀자가 앉아있는데 입은것도 그렇고 말하는거랑 대단히 호사하게 사는 부르죠아같다고 하였다.

《알겠소. 저 사람들은 나한테 맡기고 동무는 보초근무를 단단히 서오.》

하연성은 마차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깊은 밤중이라고는 하지만 밝은 달이 대낮같이 떠있어 마차안을 환히 비치고있었다.

목깃에 털이 부르르한 외투를 입고 커다란 털모자를 쓴 로인이 얼룩덜룩한 범가죽으로 아래도리를 감싸고있는데 로인의 옆에는 쎄라복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둘러감은 녀자가 놀란 눈을 치켜뜨고 하연성을 바라보고있었다.

북만의 이름있는 독립운동자인 백송로와 그의 딸 현경이였다.

백송로는 상해로 찾아가는 딸을 배웅할 겸 팔도하자의 동생네 집으로 내려왔다가 유격대가 부락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을 빠져나가던 참이였다.

《어디로 가시는분들입니까?》

하연성의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말없이 마차의 발디딤대에 한발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안을 기웃거리고있는 유격대원들의 거동만을 눈여겨 살피고있었다.

《얘, 현경아, 담배나 한대 물려다구.》

로인은 마차밖에 서있는 사람의 존재는 아랑곳않고 조용하고 나직한 말로 딸을 향해 말하였다. 딸은 담배갑을 찾느라 손가방도 뒤지고 무슨 짐짝같은것도 어루더듬고 하다가 구석에 세워놓은 거문고줄을 건드려놓았다.

때없이 마차안에서 울려나온 거문고소리에 하연성은 깜짝 놀라 마차의 발디딤대에서 얼른 발을 내렸다.

여간만 호사하게 사는 사람들같지 않다. 하연성은 어둑시그레한 마차안에 대체 어떤 물건들이 들어있나 하는데까지 호기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사이에 딸이 담배갑을 찾아 아버지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드렸다. 하연성은 성냥불이 확 하고 켜지는 순간에 한결 똑똑히 드러난 로인의 얼굴과 처녀의 옆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로인의 눈덕엔 장미가 수북하고 검실검실한 큰 눈엔 누런 안경을 꼈는데 땀구멍이 숭숭한 커다란 코며 묵직하게 생긴 입언저리가 헐치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대신 처녀는 로인의 딸같지 않게 귀엽고 아름다왔다.

처녀는 로인의 담배에서 떨어지는 재가 무릎우에 덮은 범가죽을 태울가봐 두손으로 재를 받고있었다. 로인은 풀썩풀썩 담배를 태웠다.

페장까지 구수하게 파고드는 담배연기가 마차안에서 흘러나와 하연성의 크게 벌린 코구멍으로 날아들었다.

(제기랄…)

하연성은 여전히 코구멍을 벌름거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어디로 가시는분들인데 야밤삼경에 길을 떠났습니까?》

다시 묻는 하연성의 목소리에는 벌써 순탄치 않은 의심이 느껴졌다.

백송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로인은 마차의 등받이에 반몸을 누이고 고달픈 심신을 하소하듯 담배만을 빨아대고있을뿐이였다.

불어치는 눈보라가 이따금 마차안에 싸락눈과 함께 회오리바람을 휘저어놓았다. 그때마다 딸이 아버지의 외투깃을 여며드리며 너무도 완고하게 말이 없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지켜보고있었다.

《사실은 저 급한 일이 있어서 밤중에 길을 떠나는길이랍니다.》

처녀는 속이 떨려 제대로 발음을 못하면서 생각나는대로 주어섬겼다.

《급한 일이라니요. 무슨 급한 일입니까? 혹시 우리가 알아서 안될 일이기라도 합니까?》

하연성의 깐깐한 물음은 다시한번 처녀에게 더할나위없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 저의 아버님이…

《어서 말씀하십시오. 겁나실건 없습니다.》

하연성은 될수록 침착하고 조용하게 말을 이으려 하였으나 밤새 추위에 떨고 입언저리가 얼어들어 번져놓은 말소리가 별로 무뚝뚝하게 들렸다. 처녀는 바람가림으로 무릎을 감쌌던 범가죽이 미끄러져내릴 지경으로 온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백송로는 말없이 범가죽을 집어 딸의 무릎을 감싸주고 명주양말을 신은 다리도 털속에 묻어놓았다.

《얘야, 현경아…》

백송로는 딸더러 너무 그러지 말라는듯 덤덤히 입을 열었다. 처녀는 재빨리 아버지의 입언저리를 손으로 막았다. 공연히 아버지가 단속하는 사람의 기분을 건드려놓을가봐 겁이 났던것이다.

백송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저의 아버님이 갑작스레 탈이 났어요. 그래서 용한 의원에게라두 찾아가려고.》

그 창황중에도 처녀의 깔끔한 가슴에선 그런대로 그럴듯한 말이 새여나왔다.

《로인님께서 탈이 나셨다구요. 그래 의원을 찾아가는 길이란말이지요?》

《예, 그래요. 이건 조금도 거짓없는 사실이랍니다.》

《그렇다면 왜 행길을 따라가지 않고 길없는 밭지경을 가로질러 나갑니까?》

《저희들은 이 부락사람이 아니기에 방향도 모르고 게다가…》

처녀는 입술이 딱딱 얼어붙는 추위속에서도 손에 땀을 움켜쥐고 림기응변의 말을 번져나갔다.

《당신들이 이 지방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밤에 의원은 갑자기 어디가서 찾겠습니까?》

《그건말예요. 녕안읍으로 올라가려고 그러지요. 녕안에 가면 우리 집도 있고 또…》

《그런데는 어째서 녕안읍과 반대쪽으로 마차를 몰아갑니까. 그것 참 이상하군요. 하는 말들이 동에 닿지 않으니…》

처녀는 입을 다물고 마차밖에서 발을 옮겨디디며 고개를 기웃거리고있는 하연성을 주시하고있었다.

하연성은 처녀의 말속에서 어느 한마디도 똑똑히 믿어볼것이 없다고 단정해버렸다. 처녀가 말하는대로 로인이 병자도 아니고 신수가 멀끔한 사람인데 유격대를 속여넘기려고 수를 쓰고있다고 생각하고있었다. 하연성은 이 사람들의 신분을 똑똑히 알아야겠고 게다가 이 사람들을 부락에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로인님께서 갑자기 탈이 나셨다면 유격대군의의 치료를 받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마차를 돌려세우십시오. 이 야밤중에 무인지경 들판길에 나선다는것도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하연성은 마차군에게 어서 부락으로 말머리를 돌리라고 하였다. 방수포와 가죽으로 유개를 해씌운 려행용마차는 달빛에 창유리를 번쩍거리면서 부락을 향해 돌아섰다.

백송로는 딸의 손을 찾아쥐고 조용히 쓸어만졌다. 처녀는 아버지의 손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쳤다. 아닌말로 자기 한몸이 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아버지만이라도 별고없이 무사했으면 하는 눈물겨운 갈망이 솟구쳐올랐다.

밖에서는 유격대원이 마차군에게 좀더 빨리 몰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녀는 하연성의 무뚝뚝한 말소리를 들으면서 어쩌면 저렇게도 인정머리없는 유격대원에게 붙잡혀 욕을 당하게 됐을가싶은 안타까움과 비감한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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