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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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행군이 시작되였다. 행군대오에서는 강진옥이 못지 않게 맥을 추지 못하는 또 한사람의 유격대원이 있었다. 그는 출판소일군인 차일진이였다. 차일진이때문에 오성숙은 은근히 속을 태우고있었다. 차일진이만 아니라면 오성숙은 행군대오에서 떨어질 리유도 없거니와 오히려 무슨 일이든 한몫 단단히 했을것이다.

차일진이와 오성숙의 사이가 남다르다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행군대오에서 떨어져가게 된 녀대원들사이에서는 벌써 비밀로 되지 않았다.

행군이 힘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오성숙이가 차일진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의 일을 거들어주려고 애쓰는 모양이 심상치 않았으며 차일진이가 오성숙이 하는대로 묵묵히 순종하는것도 다 보통의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지금 차일진이 지고가는 배낭은 후렁후렁한 껍데기뿐이고 알속은 모두 오성숙의 배낭으로 옮겨졌다. 차일진은 총도 오성숙에게 넘겨주고 그대신 기다란 물푸레나무를 지팽이처럼 꺾어들고 허덕허덕 눈길을 헤쳐나가고있었다.

쉴참이 되면 오성숙은 배낭을 벗어놓고 날렵하게 돌아가며 삭정이를 모아다 고깔불을 피워 차일진의 몸을 덥혀주었다.

유격대에서 《야학선생》이라 부르는 차일진은 글밖에 모르는 서생이였다. 그가 혁명군에 참가한지는 겨우 다섯달밖에 안된다. 그는 성숙이가 지주집 종노릇을 하던 어느 촌에서 야학선생을 하였으며 성숙이가 유격대에 참군한지 한해반이 지나 유격구에 들어왔다.

성숙이가 지주집 종노릇을 하던 그 시절에는 차일진이가 성숙이에게 글을 배워주었으나 유격대에서는 성숙이가 여러모로 그를 도와주었다.

오성숙은 차일진이가 어려운 북만원정을 어떻게 이겨내랴 하는 근심이 노상 가슴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물푸레지팽이를 짚고 코허리에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허우적거리는 모양을 보느라면 저도 몰래 불쑥 불안이 솟구쳐오른다.

오성숙은 이따금 한량없는 근심을 담고 차일진에게 묻군하였다.

《이런 걸음으로 꽤 북만원정을 해내겠어요. 도중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테예요?》

《내가 쓰러지다니. 내가 쓰러지면 견뎌낼 사람이 도대체 누군가?》

차일진은 맥을 추지 못하다가도 큰소리칠 때는 볼만하였다.

《아이참, 모두들 자기처럼 허둥거리는가 생각해요?》

《괜찮아, 아무 걱정 말라구. 저들은 뭐 무쇠로 빚어놓은 사람들인가. 다 힘들어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을따름이란말이요.》

《내색하지 않는 그 의지가 얼마나 장해요. 다져먹은 결심이 강하면 어떤 역경도 헤쳐나가는것이 사람의 의지예요.》

《이것보지, 제법 연설을 들이대는군.》

《연설은 또 무슨 연설이예요. 나는 종살이를 해보았기에 그걸 알아요. 행군이 아무리 힘들면 종살이보다 더 힘들겠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 역스럽고 힘겨운 종살이를 꿋꿋이 견뎌내고 이제는 혁명군에 참가하지 않았나요?》

차일진은 문득 고개를 쳐들고 오성숙의 복스럽게 생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찍 종살이에 시달렸다고는 하나 고생에 치여난 녀자같지 않게 귀염성스레 생긴 오성숙은 차일진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였다.

차일진은 슬그머니 오성숙의 곁으로 다가가 귀속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나혼자 알고있는 비밀인데 한번 들어보오. 북만원정대를 한창 편성하던 어느날 장군님께서 우리 출판소에 들리신적이 있었댔소. 그때 나는 리한상동무와 함께 등사를 밀고 한무인이가 깡판글을 쓰고있었는데 장군님께서 내가 밀어낸 선전물을 들고 친히 읽어보시면서 지난 동기방어전투때에 출판소일군들이 등사기를 배낭에 넣어 지고다니면서 선전문을 써내고 함화공작도 하면서 아주 잘 싸웠는데 이번 북만원정에서도 출판소일군들이 한몫 단단히 해야 하겠다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는게 아니겠소.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리한상동무나 한무인동무들이 북만원정대에 망라되여 명성을 떨치게 되였구나 하고 못내 부러운 생각을 금치 못하고있었더랬소.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글쎄 장군님께서는 이번 북만원정대에 출판소일군중에서 차일진동무가 뽑혔다고 하시면서 차동무가 한몫 단단히 해주어야겠다고 고무의 말씀을 하시는게 아니겠소. 나는 자리에서 벌떡 뛰여일어나 등사기름이 묻은 손으로 장군님의 손을 부여잡고 울먹거리며 맹세를 올렸댔소. 기어이 기어이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겠노라고… 그러니 나를 너무 내려다보지는 말아야겠소. 장군님의 신임이 대단한만큼 격에 맞게 사람을 대해주어야겠단말이요.》

차일진은 진담인지 롱담인지 알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 외웠다.

《아이참, 그게 정말이세요?》

오성숙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아 의심쩍게 차일진을 굽어보고있었다.

처녀의 눈에는 묻어둘수 없는 간절한 소망이 안타까이 불타고있었다.

《정말 아니면 그런 거짓말도 꾸며낼가?》

《그런데 왜 이제야 그 말을 해요?》

《요긴한 기회에 써먹자고 아껴두었댔지.》

오성숙은 두뺨에 활짝 홍조를 띠우고 눈을 슴벅슴벅하면서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정말 남자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중대한 일을 혼자 가슴속에 묻어두고있다니요. 어쩌면 그럴수 있나요. 그런데 장군님의 신임에 보답할만한 자신이 있어요. 예? 어디 한번 대답해봐요. 내가 선전문을 쓸줄은 몰라도 등사를 밀어내는 일같은거야 왜 못하겠어요. 힘으로 할수 있는거라면 다 내게 맡겨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자요. 어서요.》

오성숙의 너무도 절절하고 감동적인 호소에 마음이 들떠오른 차일진은 저도 모르게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강진옥을 꽁무니에 달고 눈길을 헤쳐나가던 김택근소대장이 훌쩍 고개를 돌렸다.

《잘하는군, 잘해. 행군대오에선 이렇게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나와야 한단말이요. 난 언제 봐야 동무들이 부럽거든. 차일진동무, 그런데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기에 그렇게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오르는거요?》

《예, 제가 돌띠띤 분홍두루마기에 평산개가죽신을 신고 서울에 올라가 공부하던 때의 이야기를 해서 웃었답니다.》

차일진이가 시치미를 떼고 하는 말에 오성숙은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의 림기응변의 수완도 수완이려니와 차일진의 얼굴표정이 어찌나 천연스러운지 오성숙은 참을래야 참아낼수가 없었다. 성숙이가 벙어리장갑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웃어대는바람에 강진옥이도 깔깔대며 웃기 시작하였다.

맥없이 비칠거리던 행군대오가 웃음소리에 휘말려들자 김택근은 기분이 들썽해졌다. 그는 차일진의 이야기를 좀더 끄집어내여 사람들을 활기있게 만들어주려고 그더러 서울구경을 처음 하던 때의 이야기를 자상히 해보라고 부추겼다.

차일진은 반죽좋게 넌떡 받아들였다.

《내가 서울구경을 처음 하기는 지금으로부터 열다섯해전 내 나이 열두살되던 해 봄이였지요. 남대문정거장은 현재와 같은 벽돌건물이고 순사의 모자테는 흰빛이였으며 광화문은 닫긴채 서있었습니다. 그만하면 나도 운수는 괜찮았던가봅니다. 시골보통학교를 마치자 할머니는 아비없는 자식이 대처에 나가 치여야 큰사람 된다고 서울로 떠나보냈지요. 그때 나의 차림새, 그것은 돌띠띤 분홍두루마기에 평산개가죽신을 신고 괴나리보짐에 책보퉁이를 짊어진 촌뜨기 소년의 모습이였답니다. 그날 할머니는 업어기르던 손자놈의 서울 간다는꼴이 숙성도 하고 초라하기도 하시여 십리길을 쫓아오시며 〈얘, 일진아, 너의 아비는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고 수년간을 집을 나서 객지방랑을 하다가 뜻도 이루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는데 너만은 어떻게든 성공을 하여라.〉이렇게 부탁하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날 경의선렬차는 촌뜨기소년을 삼등차칸에 담아 싣고 남대문정거장에 들어가게 되였는데 앞으로 가던 기차가 갑자기 뒤걸음치는데 놀라 삼종형님의 손에 매달려 벌벌 떨고있으려니 술주정군 삼종형님이 〈얘, 서울은 눈감으면 코도 베여먹는다는곳이야.〉하고 덧짐을 치는통에 한결 더 놀라 형님의 뒤를 따라 구름다리를 오르내리다가 나와보니 정거장밖이 아니겠습니까?》

김택근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연신 고개방아를 찧었다. 오성숙이, 강진옥이 그리고 나머지 녀대원들도 차일진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듣고있었다.

그때 누군가 김택근에게 한흥권중대장이 이리로 내려오고있다고 귀띔하였다. 모두들 깜짝 놀라 령길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말을 탄 한흥권중대장이 뽀얗게 휘몰아치는 눈발속으로 기세좋게 말을 달려 내려오고있었다.

차일진은 바빠맞은 소리로 오성숙이에게 자기 총을 달라고 볶아댔다.

《옳아요. 총을 제꺽 메라요. 그리고 지팽이는 슬그머니 던져버려요. 꿋꿋한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게 아니예요.》

오성숙의 충고에 기동을 차린 차일진은 한흥권중대장의 눈에 띄우지 않게 끌고가던 회나무막대기를 멀찌감치 던져버렸다. 그리고 옷차림을 살펴보느라 부산을 피웠다.

《비슷하오. 동무들, 이제야 끌끌한 유격대원들 같구만. 중대장동무앞에 지친 기색들을 보이지 말고 씩씩하게 걷기요. 우리에게 여유가 있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한바탕 웃어대도 나쁘지 않겠소.》

한흥권중대장이 대원들앞에 다달았을 때에는 한창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오르고있었다. 한흥권은 등자에서 발을 뽑고 갑자기 고삐를 채여 옆으로 말을 돌리면서 큰 목소리로 웨쳤다.

《행군대오에서 뒤져가지고도 배포유하게 웃음판을 벌릴수가 있는가?》

김택근소대장이 얼른 한흥권의 앞에 나섰다.

《방금 차일진동무가 흥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웃었습니다. 글쎄 차일진동무가 처음 서울 올라가던 때에 룡산역에 도착한 기차가 뒤걸음쳐서 남대문정거장에 들어가는것을 보고 그게 무슨 큰 사고인가 해서 벌벌 떨었다질 않습니까.》

한흥권은 말갈기우에 고삐를 던져버리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댔다. 그가 얼마나 통쾌하게 웃었는지 놀란 말이 앞발을 쳐들고 매샘이를 쳤다. 그통에 의젓한 자세로 한흥권이앞에 서있던 강진옥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뒤걸음쳤다. 그리하여 또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차일진동무가 가관이거든. 아무튼 야학선생의 입에 말이야 부족할라구. 내 보기엔 동무들이 지친 티를 보이지 않으려고 허장성세를 떠는것 같은데 명심해두오. 행군에는 에누리가 있을수 없소. 중대와의 거리를 조이시오. 김택근동무, 알겠소?》

《중대장동지, 알만한데 잠간만 쉬여갈수 없겠습니까?》

김택근은 대원들을 조금이라도 쉬게 하려고 중대장의 눈치를 보며 말하였다.

《무슨 소리요. 산발을 타는데 펄펄 나는 동무가 이만한 행군에 지쳐버렸단말이요. 대원들을 이런 식으로 감싸려 해서는 안되오. 동무는 뒤떨어진 사람들속에서 어물거리지 말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오.》

한흥권이 엄한 소리로 김택근을 눌러놓고 말을 달려나가려는 때에 훈춘중대와 함께 행군하시던 장군님께서 다가오시였다.

한흥권은 안장우에서 몸을 날려 땅바닥에 내려섰다.

《왕청중대에서 떨어진 동무들이로구만. 어떻소. 행군이 꽤 힘들지?》

장군님께서는 이런 행군에 처음 나선 차일진이와 녀대원들을 눈여겨보시면서 따뜻하게 물으시였다.

장군님, 물론 행군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견뎌낼수는 있습니다. 중대장동무의 명령대로 중대를 따라가겠습니다.》

강진옥이 앞가슴을 팽팽히 펴고 구슬같은 맑은 목청으로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진옥동무의 대답이 마음에 드오. 그러나 힘들면 쉬기도 해야지. 차일진동무는 어떻소?》

장군님, 이런 행군이 처음이다보니 힘든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도 얼마든지 견딜수 있습니다.》

차일진은 장군님앞에서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지 않으려고 배낭끈을 바싹 당기고 코등으로 밀려내린 안경을 재빠르게 올려붙였다.

《견딜수 있다?》

장군님께서는 의미있게 고개를 끄덕이시며 차일진의 어깨너머로 후렁후렁한 배낭을 넘겨다보시였다.

《그런데 차일진동무의 배낭은 왜 그렇소?》

《제 배낭말입니까, 사실은 저…》

차일진이 전에없이 갑자르며 대답을 못하자 오성숙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여 안절부절 못하였다. 김택근이 차일진이와 오성숙을 두둔하려고 무슨 말인가 바삐 얼버무렸다.

《행군에 지친 동무들을 도와주는것은 필요한 일이요. 오성숙동무는 유격대의 녀장사인데 이번 행군길에서 차일진동무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면 아주 좋은 일이요. 차일진동무, 등에 진 배낭속엔 무엇이 남아있소?》

장군님, 등사기와 원지, 등사잉크입니다.》

《제일 무거운 짐들이 남아있군. 차라리 그걸 좀 나눠지지.》

《제가 등사기를 벗어놓고야 무슨 출판소일군이겠습니까? 저에게는 총과 같이 귀중한것이 등사기입니다.》

《들었소? 중대장동무, 차일진동무의 립장이 이렇거든. 행군에서 좀 지치긴 했지만 가슴속에 다져먹은 결심이야 얼마나 뜨겁소. 이제 여기서 잠간 쉬여가면 어떨가?》

장군님께서는 쉬여갈 장소가 마땅하겠는지 주위를 살펴보시며 한흥권의 대답을 기다리시였다.

한흥권은 령마루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보라속에 막힌 뿌연 공간을 근심스레 바라보았다.

《령마루까지는 십리길이 남았습니다. 눈보라가 더 세차지기전에 령을 넘어야 할가봅니다.》

장군님께서는 대원들의 얼굴을 살펴보시다가 김택근에게 시선을 멈추시였다.

《김택근동무는 어떻소. 동무들을 데리고 내처 령우에 오를만 하오?》

김택근이 대답을 망설이자 한흥권의 엄한 눈길이 그에게로 날아왔다. 김택근은 한흥권의 눈치를 모르는체 고개를 돌리면서 대답하였다.

장군님, 저는 좀 쉬여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장군님께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였다. 대원들을 쉬우고싶어하는 김택근의 마음을 알아보신것이다.

《김택근동무가 지쳤다면야 여느 동무들은 말할것도 없지. 쉬여가는게 좋겠소. 한흥권동무, 중대를 쉬우도록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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