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2 장

1

 

1934년 11월 초순, 이해에 네번째로 내린 눈이 수림을 하얗게 뒤덮고 련사흘째 아우성치는 눈보라가 사위를 온통 재빛세계로 뒤덮고말았다.

한낮때에도 공중에 떠있는 해는 눈보라의 장막속에서 빛을 잃고 야장간의 단쇠마냥 벌거우리하게 나타났다.

령상에서 간단없이 밀려내리는 눈보라가 빽빽이 우거진 수림의 상가지들을 후려치고 커다란 다래나무넝쿨을 통채로 공중높이 떠날리며 태질하는 사이로 문득 난데없이 사람을 태운 두필의 말이 후닥닥 뛰여나왔다.

말들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면서 눈에 묻힌 령길을 습보로 달려오르고있었다. 그 길은 팔도하자에서 이도하자로 넘어가는 달구지길이였다.

말탄 사람들은 유격대의 군복을 입고있었는데 한사람은 얼굴에 보슴털이 보르르한 애된 소년이고 다른 한사람은 나이가 지숙히 들어보이는 체격좋은 젊은이였다.

그들은 밤새 령길을 톺아오른듯 귀덮개를 내리드리운 모자털 가생이에 성에가 하얗게 불려있었다. 해는 방금 떠올라 눈빛보다 별로 밝지 못한 누르끼레한 빛을 수림의 언저리에 간신히 뿌리고있었다.

말탄 사람들은 령상에서 사선으로 비쳐오는 해빛을 받으면서 가던 길을 한동안 달음쳐올랐다. 그들은 이따금 말을 세우고 주위를 유심히 살피군하였다. 말들은 불안하게 투레질을 하였다.

소년유격대원은 갈기쪽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진정하라는듯 말목을 두드렸다.

그 순간 무엇인가 휙하고 앞으로 지나갔다.

《푸수리!》

소년유격대원의 입에서는 환성이 터져올랐다. 부드럽고 긴 날개로 언 대기를 총알처럼 가르고 지나간 커다란 재빛 푸수리는 길우로 꼿꼿이 날아가 늙은 설송의 상고대우에 발톱을 박고 내려앉았다.

《중대장동지, 푸수리예요. 이렇게 높은 산속에도 푸수리가 살아요?》

《유격대가 가는곳이면 어디서나 푸수리가 날지. 저 푸수리는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우리와 같이 떠나 뒤틀라즈에서 묵고 거기서 편성된 북만원정부대와 함께 다시금 길을 떠나 횡도하자전투랑 치르고 지금토록 우리앞에서 날고있는 새야. 저 푸수리는 어쩌면 원정부대의 파수병인지도 몰라.》

《비슷해요. 정말 비슷해요.》

소년유격대원은 등자에서 발을 뽑고 높은 안장우로 댕그랗게 다리를 가드러올리며 죽겠다고 웃어댔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북만원정부대의 왕청중대 한흥권중대장과 사령부 나팔수 김청해이다.

열흘전에 동만땅을 떠난 북만원정부대는 횡도하자에서 군중정치사업을 활발히 벌리고 달려드는 《토벌대》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히고 나서 주보중의 밀영을 찾아 이도하자방향으로 행군을 다그치고있었다.

북만땅에서 유격대를 조직해놓고 혁명을 하려고 애쓰는 주보중이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장군님께 몇번이나 서한을 보내고 사람을 띄우고 하였는지 모른다.

장군님께서는 횡도하자전투를 치르고나서 곧 주보중유격부대를 찾아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한흥권의 정찰조는 다섯사람으로 무어져있었는데 세사람은 수림속으로 말을 달리고 두사람은 길을 밟아 올라갔다.

장군님께서 앞에서 나타나는 불의의 정황을 나팔로 신호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청해가 정찰대에 망라된것이였다.

원정부대는 왕청, 연길, 훈춘에서 우수한 유격대원들로 한개 중대씩 뽑아 대오를 편성하였다.

눈보라가 아우성치는 로야령을 넘어와 횡도하자전투를 치르고 쉴사이 없이 주보중유격부대를 찾아 길을 떠난 원정부대는 참으로 힘든 행군길을 헤쳐가고있었다. 그중에서도 왕청중대에 배속된 녀대원들과 출판소일군들이 누구보다 힘들어하였다. 그들은 왕청중대의 기본력량인 김택근소대에서 행군하고있었는데 한사람두사람 떨어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왕청중대와 훈춘중대의 중간에서 조그마한 대오를 짓고 걸어가고있었다. 그속에는 왕청중대에서 《야학선생》이라 부르는 출판소의 안경쟁이 차일진이와 사령부작식대성원이며 유격대가수인 강진옥이, 차일진의 애인인 오성숙이, 그밖에도 두명의 녀대원과 김택근소대장이 들어있었다.

산발을 타는데 능수인 김택근소대장이 뒤떨어진 사람들속에 끼여가고있는것은 자신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행군에 지쳐빠진 사람들을 한흥권중대장의 엄한 눈초리앞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김택근은 자그마한 회나무막대기를 하나 구하여 그 한끝을 강진옥의 손에 쥐우고 앞에서 길을 헤쳐나가고있었다.

강진옥은 김택근소대장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몇번이나 회나무막대기를 뿌리쳐버렸으나 혼자힘으로는 도저히 행군대오를 따라가기 어려워 할수없이 김택근의 신세를 지고있었다.

수림속에서 간단없이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은 신통히 녀대원들의 머리우에 눈가루를 휘뿌리면서 앙탈을 부렸다. 이럴 때면 강진옥은 뽀얗게 눈앞을 휘젓고 돌아가는 눈장막속에서 길조차 가려보지 못하고 김택근이 이끄는대로 발을 옮겨놓았다.

김택근소대장은 회오리바람에 휘감기지 않고 슬쩍슬쩍 걸음을 내딛는데 어쩌면 자기는 매양 눈보라속에 부대끼며 허우적거려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가만히 눈여겨 살펴보면 눈보라는 김택근의 앞에까지는 발밑으로 슬근슬근 기여들었다가 바로 자기 눈앞에 이르면 기세를 돋구고 심술을 부리는것이였다.

김택근은 이따금 고개를 돌려 눈발속에서 허우적거리고있는 강진옥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눈길에서는 언제나 앞선 사람보다 뒤에선 사람이 눈가루를 뒤집어쓰기마련인데 강진옥이로서는 이 간단한 리치를 아는것 같지 않다.

진옥은 마주쳐오는 눈바람을 피하려고 고개를 외로 돌리고 코살을 찡그리고있었다.

유격대의 가수라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균형잡힌 몸매에다 미모의 얼굴을 가진 강진옥은 원정대의 꽃이라고 할만한 처녀였다. 군모밑으로 흘러내린 몇오리 윤기도는 머리카락이 희고 반듯한 이마우에서 간단없이 휘저어대고 호심처럼 깊어보이는 검은 눈에는 은근한 생각이 어려있었다. 강진옥은 언제 보나 사색적인 표정을 갖춘 처녀였다.

국내의 어느 녀고보에서 공부를 하던중에 동흥중학에 다니던 오빠가 옥살이를 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룡정바닥에 들어왔다가 오빠의 학우였던 한흥권을 알게 되여 몇해 그와 사귀는 사이에 혁명의식을 깨우치고 그를 따라 혁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는 처녀다.

《암만해도 모를 일이거든.》

김택근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눈속에 박힌 발을 뽑아올리느라 숨을 헐떡거리며 안깐힘을 쓰고있는 강진옥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예요?》

강진옥은 김택근의 말소리를 얼핏 알아듣고 이마우에 흘러내린 군모를 밀어올렸다.

《범같은 한흥권중대장이 어떻게 되여 이렇게도 섬섬약질인 강진옥동무를 사랑하게 되였는지 아무리 해도 모를 일이란말이야.》

《뭐 범이 어쨌다구요. 이렇게 사나운 날씨엔 범같은 짐승도 얼씬 못한단말예요?》

김택근은 입을 크게 벌리고 눈바람에 숨이 차 하면서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강진옥이도 덩달아 웃었다.

《진옥동무, 소대장동지가 뭐라고 해요?》

옆에서 따라걷던 오성숙이가 슬며시 끼여들며 물었다.

《글쎄 이렇게 사나운 날씨엔 범같은 짐승도 얼씬 못한다구 그러지 않어요.》

《아니예요. 진옥동무, 범같은 한흥권중대장이 어떻게 진옥동무를 사랑하게 되였는지 모를 일이라고 그러는거예요.》

《어마나!》

강진옥은 어망결에 뒤걸음쳤다.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녀대원들은 가뜩이나 맥빠진 걸음에 배를 그러안고 웃다나니 모두들 눈속에 주저앉고말았다.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고 어떤 녀대원들은 아예 배낭까지 벗어놓고 쉴차비를 하였다.

《자 동무들, 그만 웃고 일어들나오. 한흥권중대장동무가 불쑥 나타나면 어쩔려구 그러오.》

한흥권중대장의 이름이 불리우자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벌떡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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