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6

 

식량을 실으러 떠나는 말발구들이 리호검로인의 야장간앞 넓은 공지에 주런이 늘어서있었다. 식량운반에 뽑힌 다섯필의 말발통에 편자를 갈아대고 발구들을 손질하느라 장밤 야장간 뜰안에서 망치를 뚝딱거리던 리호검로인은 지친 기색도 없이 남먼저 먼길 차비를 갖추고 행길에 나와있었다. 그는 식량운반에 떠나는 아들 며느리를 소북구에까지 바래주려고 사냥을 나갈 때의 차림처럼 록피바지에 도로기를 신고 곰가죽등걸이를 걸쳤으며 누런 탄알이 숭숭 박힌 넓은 탄띠를 배허벅에 거느적이 늘여띠고 쌍대배기렵총을 메고있었다.

말발구들이 서있는 야장간앞의 공지로는 부락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고있었다.

김진세로인네 집에서 가야하기슭으로 뻗어들어온 행길로는 한떼의 녀인들이 송혜정을 에워싸고 걸어오고있었다.

그들은 송혜정이 무수평공작지에 나가 반년나마의 시일을 바쳐가며 수고한 보람이 있어 요영구부락 사람들이 해춘을 맞이할 때까지 크게 낟알걱정을 안해도 살수 있게 되였다고 떠들썩하였다.

송혜정은 오늘 식량운반대를 데리고 무수평 방면으로 떠난다. 물론 무수평공작지까지는 다 안가도 될것이지만 중도에 운반해놓은 귀틀막동네까지 가재도 팔십리길은 가야 한다. 그래서 부락에서는 새벽부터 서둘렀다. 식량운반대에 뽑힌 사람들은 자위대와 청년의용군에서 선발된 끌끌한 청년들이였다. 부락사람들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옷이며 신발이며 도중식사들을 준비하느라고 바삐 뛰여다녔다.

야장간앞에서는 현당서기 허건이와 현정부회장 강시중이도 나와있었다. 백하일은 숙반공작대원을 데리고 말발구뒤를 돌아가고있었다.

허벅다리에 번쩍거리는 목갑총을 늘여찬 리유천이가 현당서기와 현정부회장과 마주서서 무슨 이야기인가 주고받고있었는데 백하일이가 뒤짐을 지고 이따금 그들앞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멀찌감치 행길가에 나가선 리호검로인은 슬밋슬밋 이쪽을 쳐다보면서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자기 아들 리유천이가 오늘 식량운반대 책임자로 뽑혀 저렇게 현당서기와 현정부회장을 상대로 의젓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있는데 저쪽 가야하기슭으로는 부락 아낙네들속에 한벌 에워싸인 혜정이가 걸어오고있었다.

부락사람들은 호검로인을 대하고 깍듯이 인사를 차리며 로인이 정말 기쁘겠다고 축하의 말을 하였다. 현당서기도 현정부회장도 다 그랬으며 백하일은 머리에서 모자까지 벗어들고 《로인님, 얼마나 기쁘십니까? 진심으로 로인님을 축하합니다.》하고 공손히 례의를 차렸다.

리호검은 세상이 온통 자기를 위해 빚어진것 같은 부푼 감정에 들떠올랐다.

혜정이를 에워싸고 앞으로 다가온 아낙네들은 한바탕 중구난방 떠들며 로인의 기분을 들썽하게 만들었다.

아버님은 오늘이 명절같겠구만요?》

현부녀회장이 온 얼굴에 활짝 웃음을 담고 한마디 말했다.

《여부가 있나. 그 식량이 어떻게 공작한 식량이라고…》

아버님은 그저 혜정이 고운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시는군요.》

《이사람들아, 말 말게. 그게 오죽한 역사였겠나? 내인의 힘으로… 생각만 해도 가슴뻐근해지는 일이라니.》

아낙네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식량운반대 책임자인 리유천이가 대렬을 정렬시켰다. 말발구 한대에 두사람씩 배치되여 모두 열명의 청년들이 발구의 앞뒤에 늘어서 있었다.

현정부를 대표하여 강시중이 짤막한 연설을 하였다.

리유천이 출발구령을 내렸다. 말들은 일제히 언땅에 발통을 구르며 발구들을 끌기 시작하였다. 부락사람들이 따라가며 모두들 몸성히 잘 갔다오라고 소리소리 웨쳤다.

식량을 운반하러 가는 열명의 청년들중에서 총은 세사람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나머지 일곱명은 박달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를 꽁무니에 차고있었다.

호검로인은 식량운반대의 뒤에서 리유천이와 혜정이를 량쪽에 세우고 스적스적 걸음을 옮겨짚고있었다.

혜정은 눈굽이 뜨거웠다. 로인이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고 대견히 여기며 아들의 뒤바라지를 충실히 해오고있는가는 혜정이 너무나 잘 안다. 그것은 혜정이가 룡정바닥에 나가 공부를 하면서 리유천이라는 청년과 사귀던 그 시절부터 아들의 학비를 대주려고 짐승의 가죽을 등에 지고 룡정거리에 이따금 나타나던 포수로인을 자주 띠여보았기때문이였다. 아들을 공부시켜 세상앞에 의젓이 내세워보려는 로인의 굳은 결심이 아니였던들 가난한 포수의 아들이 중학교공부는커녕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했을것이다.

리유천의 성장을 위해 바쳐온 늙은이의 정성을 생각하는 혜정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룡정학교시절이 유정한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가난한 농군의 딸로 태여나 내내 굶주림에 쫓기며 살아야 했던 소녀시절의 혜정은 어떤 운명의 희롱으로 하여 녕안읍에서 자식없이 가죽도매상을 하는 한 장사군의 양딸로 들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룡정거리에 나가 녀고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 시절에 리유천이라는 청년을 알게 되였는데 그를 유심히 쳐다보고 은근히 호기심을 품어본것은 학교에서 운동회를 벌리던 날이였다.

문을 열어놓은 교실안에서 동무들과 함께 내다보려니 운동장에서 정구채를 들고 후위노릇을 하는 체격좋고 재빠른 한 청년이 눈에 띠였다. 녀학생들은 그가 멋진 자세로 공을 받아넘길 때마다 박수를 치며 정구선수의 자세로는 리유천학생이 대표적이라고 소근거렸다.

리유천은 멋지게 공을 다루다가 열에 한번쯤 실수를 할 때면 눈을 사르르 감으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것을 보는 교무주임선생은 《그 학생 인상도 좋거든.》하고 칭찬하기를 마지 않았다. 녀학생들은 경기과정보다 리유천의 움직임에 자연 눈길이 끌려가고있었다.

어떤 때 리유천의 전위가 공을 놓치고나서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볼 때면 리유천은 《네버마인》소리를 힘있게 지르고 달려나가 딩굴면서 받아넘겼다. 그러면 녀학생들과 교무주임선생은 함께 박수를 쳐 응원을 보내고 교무주임선생은 리유천의 태도를 고상한 스포츠적 도덕행위라고 높이 칭찬하였다.

리유천은 확실히 교원들과 학생들의 인기인물이였다. 그는 공부에도 남달리 특출하여 전교학생모임때 교장의 칭찬을 자주 받군하였다.

그러하던 리유천이가 얼마후부터 송혜정의 하숙집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세 동숙생 처녀들중에서 은경이라는 처녀가 리유천이를 이미부터 알고있었다. 리유천은 한주일이 멀다하게 처녀들의 하숙방을 다녀갔다. 그가 오는날이면 처녀들에게는 그대로 명절이였다.

리유천은 유식하기도 하고 이야기도 구수하게 잘하여 밤을 밝혀가며 들어도 처녀들의 눈은 새별처럼 빛났다. 자정이 넘으면 리유천은 처녀들의 하숙방을 나섰다. 처녀들은 리유천을 가운데 세우고 량옆에서 옹위하여 그의 하숙집 문밖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러나 처녀들이 돌아서면 여라문발자국뒤에서 슬근슬근 따라오는 리유천의 기미를 모두가 눈치챘으며 처녀들이 하숙집뜰안에 들어서는것을 보고야 돌아서는 리유천을 누구나 알고있었다.

한해가 지나갔다. 은경이는 학비를 이어댈수 없는 집의 딱한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곧 자기가 어떤 회사일을 보는 청년에게 시집을 가는데 아버지의 강요로 일이 그렇게 된것이라는 편지가 왔다. 리유천이와 은경이를 늘 함께 눈앞에 그리며 은근히 자기의 동숙생처녀를 부러워했던 혜정의 생각은 부질없는것으로 되고말았다.

혜정은 떠나간 은경이와 불행에 빠진듯한 그의 처지를 가긍히 생각하며 장밤을 눈물로 보냈다.

은경이가 떠나간후에는 혜정이가 리유천의 하숙집으로 나다녔다. 그러는사이에 그들은 서로가 남다른 정을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며칠만 못보아도 마음이 안달아 못견딜 지경이 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그들의 사랑이 아니였다. 혜정은 리유천을 너무나 깊이 존경하고 신뢰하고있었기때문에 함부로 이성의 감정을 품을수 없었으며 리유천은 또 그대로 너무나 순결하고 례절바르고 학업에 열성인 처녀의 나무랄데 없는 그 품성에 감복하여 사랑의 감정을 섞어보지 못하였다.

한창 단풍이 진하게 물든 가을이였다. 그날도 혜정은 처녀들의 독서조에 리유천을 모시려 그의 하숙에 갔다. 그런데 리유천은 없고 웬 로인이 리유천의 하숙방 문턱을 베고누워 코를 골고있었다. 처녀는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잠자는 로인의 허리에는 누런 총알이 숭숭 박혀있는 넓은 탄띠가 돌아갔고 바지는 사냥군들이 흔히 입는 록피바지를 입었는데 구석쪽에 강철빛이 번들거리는 쌍대배기렵총이 세워져있었다. 그 포수로인이 리유천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 혜정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생각을 하게 되였던가? …

포수로인은 그후에도 이따금 나타나군하였는데 짐승의 가죽을 등에 지고 내려와 그것을 팔아가지고는 아들의 학비를 대주군하였다.

다시 한해가 지나갔다. 송혜정이 리유천을 사귀여 두해를 보낸셈이다. 그 두해가 막 지나갈무렵의 어느 여름날에 리유천으로부터 봉서 한장이 날아왔다.

지척에 살면서 무슨 엽서를 띄우나 하는 생각으로 무심히 봉서를 째고 속지를 뽑아보던 혜정은 깜짝 놀랐다. 유천은 자기가 경찰의 추격을 받기에 자상히 쓸 겨를도 없고 또 그럴 계제도 못되여 어딘가 급히 떠나면서 몇자 적는다고 하였다.

그후에는 정말 리유천을 만나볼수가 없었다. 리유천에게서 보내온 옥색 봉투가 혜정의 품속에서 이따금 그의 체취를 느끼게 할뿐 달리는 그를 감촉해볼수가 없었다. 혜정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공허란 무엇인가를 알았으며 인간에게 들이닥친 허무의 고뇌란 얼마나 참기 어려운것인가를 속속들이 느꼈다.

혜정은 리유천이 떠나간후 얼마 있지 않아 학교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양아버지집으로 내려갔다.

양아버지가 장사밑천을 잃고 혜정의 학비를 대줄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집으로 돌아간 혜정은 처음 몇달동안 소학교에서 선생노릇을 하다가 운영난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골방처녀로 되고말았다. 이럴 즈음 혜정에게는 혼사말이 분주히 나돌았다. 어떤 때는 순사시험에 합격했다는 청년이 혼사말을 붙여오는가하면 어떤 때는 홀태바지에 각반을 치고 일본식 쪽발로 된 지하족을 신은 측량기수라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고 철도역에서 화물을 취급하는 역부나 헌병보조원 같은것이 오기도 하였다.

혜정은 리유천의 존재가 이때처럼 안타까이 그리워진 때는 일찌기 없었다.

이때 마을에 없던 야학이 불시에 생겼다. 어디서 학식있는 청년이 나타나 야학을 열고 글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혜정은 골방속에 앉아서도 매일같이 야학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이웃집처녀가 혜정이더러 야학에 나가보자고 너무 졸라대여 한번 구경이나 하리라 생각하며 야학방에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

야학선생은 다름아닌 리유천이였던것이다. 리유천을 길거리에서 보기만 해도 옷자락을 감아잡고 따라갈것 같던 송혜정이였지만 막상 그를 눈앞에 대하자 질겁을 떨며 집으로 도망쳐오고말았다. 그리고 골방속에 들여박혀 기쁘고 행복한 나머지 장밤 울고 또 울었다.

아침이 되자 이웃집 처녀가 혜정에게 쪽지편지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리유천이가 혜정이더러 오늘밤 야학에 꼭 나와달라는 부탁을 적은 편지였다. 혜정은 하루동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수가 없었다. 혜정은 해가 떨어지기바쁘게 야학방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나오지 않은 야학방 한쪽구석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리유천이 나타나기를 안타까이 기다렸다.

그때 와락 문이 열리며 난데없는 경찰이 뛰여들어와 혜정을 잡아 묶는것이였다. 그와 함께 야학방에 일찍 나왔던 두명의 청년도 묶이였다.

경찰은 혜정을 리유천이와 내통되여있는줄로 알고 물매를 안기기 시작하였다.

《대라! 네가 야학선생하구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청년이 독립운동을 하는놈이다. 네가 그놈의 손에서 놀아난 계집이 분명하니 그자가 간곳을 대라!》

놈들은 이렇게 씨벌이며 족쳐댔다.

그 순간 혜정의 눈앞에는 섬광과도 같은 밝은 광채가 어리는듯싶었다.

리유천이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이라니?… 송혜정은 리유천의 이름이 경찰대의 취조실에서 장엄히 울려나왔을 때 죽어도 살아도 리유천을 따라가리라 불타는 열망을 간직하고 또 간직하였다.

송혜정은 경찰놈들이 내리치는 채찍이 아픈줄 몰랐다. 그는 이 채찍이 리유천을 대신하여 리유천을 바라고 리유천을 사랑하면서 한몸에 들쓰는 채찍이라고 생각할 때 채찍의 아프고 쓰린 맛을 몰랐으며 그 뼈저린 채찍의 모진 세례를 넘어 언젠가는 가닿고야말 광명한 세계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열렬한 애정에 깊이깊이 고무되여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송혜정에게는 오래지 않아 인생의 다시없는 비극이 닥쳐오고있었다. 경찰의 손에서 간신히 풀려난 혜정이를 양아버지라는 장사군이 어떤 늙은 지주에게서 술공장을 세울 장사밑천을 받고 그의 첩으로 들여보낼 계략을 꾸미고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혜정은 밤으로 집을 뛰쳐나 유수청자에 있는 어머니에게 왔다가 다시 함마하자의 귀틀막 화전촌으로 옮겨갔는데 거기서 독립군의 몇명 동료들과 함께 장군님을 찾아가는 리유천을 만나게 되였다.

그후 혜정은 리유천을 따라 동만땅으로 나왔다. 이 동만땅에 나와 혜정은 오래전에 집을 떠나 소식없던 송명준오빠가 장군님의 전사로서 국내공작에 파견되여있다는 기쁜 이야기도 듣게 되였다. …

식량운반대는 어느덧 소북구골짜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큰길로 빠져나가면 적구다.

리유천이와 송혜정은 로인과 헤여지려고 잠간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벌써 소북구골짜기입니다.》

《알고있네.》

로인은 완연히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아버님, 이 먼길을 나오셨다가 이제 혼자걸음으로 힘들어 어떻게 가시렵니까?》

혜정은 로인과 헤여져야 할 아픈 생각에 눈언저리를 붉히고있었다.

《가긴 어디로 간다는건가? 나는 안가네. 이 소북구에서 자네들을 기다리겠네.》

로인은 헌헌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여기서 기다리시다니요? 바람가림도 없는 한지에서 어떻게 기다리겠나요?》

《한지가 아닐세. 나는 소북구에 나와있는 최춘국정치지도원을 찾아가 자네들이 돌아올동안 유격구방어지구에서 싸우게 해달라고 조를터이네. 땅을 파고 들어앉아 기여드는 왜놈들을 족치는데야 이 범포수를 따를 사람이 있을라구.》

로인은 어깨에서 꼴망중태를 벗어 아들의 어깨에 지워주었다. 중태속에는 먼길 가는 두사람을 위해 호검로인이 정성껏 꾸려넣은 길량식과 깔고앉을 노루가죽과 동상입은 상처에 바를 소주 한병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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