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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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검정통치마우에 받쳐입은 혜정의 연한 초록빛 저고리에도 감빛이 무르녹게 어려있었다. 동정밑과 고름끈을 환하게 장식하고 소매끝동에 곱게 돌아간 감빛색천이 지는해의 여광속에 은근히 신비한 색조를 내뿌리며 리유천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부락쪽에서 김진세로인네 검정개가 엎어질듯 달려왔다. 코등과 네발족이 새하얗다고 부락애들이 군마라고 부르는 검정개는 혜정의 주위를 빙빙 돌며 치마자락을 물어당겼다.

《개가 왜 이럴가요?》

《그새 혜정에게 정이 들었는가보오.》

《아니예요. 그런것 같지만 않아요. 집에서 누가 나오는게 아니예요?》

바로 그때 저쪽 부락쪽에서 《혜정아!》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이, 이걸 어쩌나. 어머니가 나오셨어요. 좀 허리를 굽히고 앉아요.》

《공연한 걱정이요. 어머님이 혜정이 있는 강가에 나가보라고 눈짓을 하기에 나왔단말이요.》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리유천의 얼굴은 벌거우리해졌다. 그러거나말거나 혜정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혜정은 리유천의 거동을 살펴볼 계제가 없었던것이다.

《혜정아.》

또한번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예, 가요. 어머니!》

혜정은 바삐 양푼을 들어 머리에 이였다가 옆구리에 내려끼고 총총히 언덕으로 올라갔다.

《얘, 거기 우복동사람두 나갔니?》

우복동사람이란 리유천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혜정은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가까스로 대답하였다.

《여기 방금 나오셨나봐요. 이자 방금…》

《알겠다. 그럼 천천히 오렴. 나간 사람이 오래도록 소식이 없길래 궁금해 나왔다.》

혜정의 어머니는 개를 불러가지고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혜정은 어머니가 돌아들어간 골목을 지켜보다 말고 양푼을 눈속에 푹 박으며 주저앉았다. 얼마나 급하게 가슴이 쿵쿵 뛰였는지 모른다. 리유천이 나타나기전에는 어머니와 더불어 그리운 사람 이야기도 하고 그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가 걱정도 했는데 막상 제 사람이 옆에 와있으니 어머니 보기조차 어려웠다.

해떨어진 강변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리유천은 추워하는듯한 혜정이를 보자 부랴부랴 솜저고리를 벗었다. 그러나 혜정은 한사코 자기의 어깨에 솜저고리를 씌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지 마세요. 늘 한지에 나가있는 사람이 몸에 탈이라도 나면 어쩌겠어요. 가까이에서 보살펴드리지도 못하고… 그저 당신만 건강하면 돼요. 전 얘리얘리한 녀자같애두 고뿔 한번 앓아보지 못했어요.》

혜정은 오돌오돌 떨면서도 한사코 리유천의 어깨에 솜저고리를 씌워놓고야말았다.

《그럼 어서 갑시다. 이러다 가야하눈속에 혜정이를 얼궈붙여놓구 말겠소.》

리유천은 눈속에 박힌 양푼을 들어올렸다. 양푼밑굽에 얼어붙은 눈덩이가 한아름이나 달려올라왔다. 그들은 눈덩이를 떨어치느라 한참동안 즐거운 역사를 하였다.

《춥지 않우?》

《아니예요. 저는 이대로 밤을 밝혀두 좋겠어요. 외려 가슴이 막 더워나는것 같아요.》

리유천은 혜정의 잔등을 쓸어만졌다. 순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녀성의 머리기름냄새를 문득 감촉하였다. 몇달전 녀자숙소에 들렸을 때 무슨 산열매씨인가를 돌절구에 빻고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달군 돌우에 지질러놓고 기름을 내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때 받던 구수한 향기, 먹기도 하고 머리기름으로도 쓸수 있다고 하던 그 구면같은 반가운 감촉을…

해가 떨어진지는 오랬으나 흰눈덮인 대지는 아주 어두워지지 않았다. 혜정의 초록빛 저고리는 희슥한 빛으로 떠오르고 하얀 동정밑으로 돌아간 감빛 도련은 감실감실한 빛으로 조화를 바꾸었다. 부드러운 흰 광선에 둘러싸인 혜정의 얼굴은 그지없이 온화하고 부드럽게 리유천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집쪽에서 다시 어머니의 조용한 부름소리가 날아왔다.

《이사람들아, 이젠 그만 들어오지.》

《예, 곧 갑니다. 어머니!》

이번에는 리유천이 대답하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젊은이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한마디 하였다.

《자네 제 좋은 생각에 애를 박달나무처럼 얼궜겠네. 아무튼 이제야 제 사람이나 같으니 얼궈두 녹여두 나야 무관하지.》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다시없는 행복이 어려있었다. 어머니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이사람들아, 주인댁과 이웃들에 인사를 잘 차려야겠네. 주인댁에서 자네들을 위해 감자떡을 하구 국수를 눌렀네. 사돈아버님은 사냥한 꿩을 들구 오셨구. 그뿐이 아닐세. 누구는 술받아오구 누구는 녹두묵을 만들어오구 누구는 북어식혜까지 들고와 온 집안이 잔치집같이 흥성거리네. 세상에 이런 고마울데라구 어디 있겠나…》

김진세로인네 집에서 사람들이 떠들썩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빨리 가자. 일 한가지라두 도와야지.》

어머니는 신바람나서 홀개바람으로 걸어갔다. 혜정은 정신이 얼떨떨한 가운데 눈물나는 생각이 들어 총총히 어머니를 따라섰다. 리유천은 조금 뒤에서 걸었다.

김진세로인네 집 뜨락은 불빛이 환하였다. 누군가 재간모퉁이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짐승의 발족을 그스르고있었다. 열어놓은 부엌문으로는 김이 타래져나오는데 뿌연 김속에서 국수분틀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람들이 보였다.

《잘 내려간다.》

한마디 늘어지게 먹이는 사람은 대장간에서 풍구질을 해주는 술대포령감이다. 장지문을 펄쩍 열어젖히고 한사람이 외양간모퉁이에 대고 소리쳤다.

《이사람아, 곰의 발통은 기름이 빠지지 않게 그스르기만 해야 하네.》

《예.》

신칙하는 사람은 리호검로인이고 대답하는 사람은 창억이다. 남편이 불에 그슬려놓은 곰의 발통을 받으러 가느라고 함지를 들고 달려나오던 보금이가 혜정이네를 띠여보고 일이 난듯 돌아서더니 부엌문앞에 대고 소리쳤다.

《어머니, 기다리던분들이 와요. 꽁꽁 얼어서 오는군요.》

일제히 아래웃방문이 펄쩍펄쩍 열리며 사람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히야, 좋은판이로다.》

풍구질군이 한마디 먹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중구난방 롱질을 하며 떠들썩했다.

리호검로인이 사람들을 말렸다.

《이사람들아, 젊은이들이 몸둘바를 모르게 그러지 말구 어서 안아들이게.》

《아따, 이 령감님은 혜정이 고운 생각에 롱말 한마디도 못하게 한다니.》

풍구질군의 나무람소리에 흐아- 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보금이가 혜정의 손을 잡아 부엌안에 들여세웠다. 창억이 어머니가 가마전에 붙어앉았다가 혜정이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라구. 혜정이가 콩고물을 잘 낸다고 하기에 기다리던 참이지, 어디 가늠해보게. 콩비린내는 좀 지운듯한데 뜸을 올리면 되겠는지.》

혜정은 아래웃방 터지게 모여들어 벅적거리는 사람들에게 깊이 머리숙여 인사를 올리고 보금이 시어머니가 넘겨주는 나무박죽을 받았다.

 

×

 

이날밤 현당에서는 백하일이와 허건이가 마주앉아 식량수송대 책임자로 뽑힌 리유천을 놓고 복잡한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백하일은 허건이더러 중요한 식량수송대 책임을 리유천에게 맡길수 있느냐고 거듭거듭 따져묻고있었다.

《중대정치지도원이 보증하고나서는 사람이니 믿어야 할가보오. 내 보기에도 그 사람이면 해낼것 같소. 백하일동무에게는 왜 믿음이 안가시오?》

《아주 믿음이 안간다기보다 주저되는바가 있어 그러오. 리유천은 독립군에서 넘어온 사람이 아닌가? 사람의 경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요.》

《그래도 리유천은 실천속에서 검열된 사람이요. 싸움도 잘하고 일반의 평정도 좋소. 더구나 그는 김일성동지의 신임을 받고있는 유격대원이요.》

《여보, 그런 소리 마오. 신임을 받는다는 사람이 혁명의 수뇌부를 해치려고 했는가? 김일성동지께서 자신의 문제와 관련되니 너그럽게 봐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까지 같은 립장을 취할수 없지 않소. 현당서기동무가 이걸 놓쳐서야 되겠소?》

허건은 자못 얼굴빛이 심각해졌다. 그 일을 돌이키면 허건에게도 주저되는바가 없지 않다. 그렇다고 유격대정치지도원이 추천을 하고 현당과 현정부에서 토의하여 결정한 사람을 이제 바꿔치운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허건의 난감해하는 기색을 눈치챈듯 백하일이 좀 양보하는척 어조를 누그러뜨리고 말하였다.

《정 교체하기가 난처하면 그대로 하는수밖에 없을거요.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찬성하지 않았다는것만은 념두에 두오. 현당의 숙반사업을 지도방조하고있는 내 처지로서는 그럴수 없는거요. 이걸 리해해주어야 하오. 매사에 참견한다고 노여워마오. 나야 현당을 도와주자는 생각밖에 뭐가 있겠소.》

사실 백하일이야말로 리유천이 식량수송대 책임자로 뽑힌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있었다. 리유천은 독립군출신이라는 경력으로 오래전부터 백하일의 모략대상으로 지목되여오던 사람이였으므로 이번 기회에 그를 물고늘어져 근거지에서 복잡한 사태를 빚어내려고 작정하고있었다. 바로 그것을 위해 현당서기에게 자기의 청백성을 미리 시위하는 가짜 연극을 놀았던것이다.

현당에서 나온 백하일은 가야하 강뚝에서 《행상인》을 만났다. 그는 식량수송대가 어느 방향으로 떠난다는것과 《토벌대》가 식량수송대를 공격하여 사람을 두어명 죽이고 식량을 뺏은후 나머지사람은 고스란히 돌려보내여 이쪽 공작을 추진하는데 도움이 되게 해달라고 하였다.

백하일은 강뚝을 따라 올라오다가 김진세로인네 집앞으로 돌아가는 달구지길에 접어들었다. 그리로 곧장 올라가면 자기의 거처가 나지는것이였다.

갑자기 김진세로인네 집에서 여러 사람들이 희희락락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하일은 삽짝모서리에 붙어서서 안의 동정을 살폈다. 산에서 내려온 리유천이와 공작지에서 돌아온 혜정이를 위해 부락사람들이 모여든 모양이다.

부엌쪽에서 바가지장단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고 리호검로인의 선소리가 터졌다.

 

불무 딱딱 불어라 이 쇠가 어데 쇤가

함경도는 단천쇠 황해도는 재령쇠

평안도는 운산쇠 강원도는 녕월쇠

경상도는 웅변쇠 전라도는 놋봉쇠

경기도는 안성쇠, 충청도는 뭇봉쇠

요영구 혁명쇠요 왕청땅 폭탄쇠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목소리를 합쳐 기세좋게 받아넘겼다.

 

이 쇠 한개 값이 얼마 왜놈군대 한개 대대

풀무질군아 바람 불어라 메질군아 힘껏 쳐라

 

백하일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어금이를 뿌드득 소리나게 억물고 삽짝모서리에서 스르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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