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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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유천은 요영구근거지 방어전연인 대북구와 소북구사이의 도로차단계선에 나가있다가 부락으로 들어오라는 최춘국의 지시를 받고 창억이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는 열흘전에 혜정이가 근거지로 돌아온 일이며 북만에서 살고있던 혜정의 어머니가 막내딸 혜옥이를 데리고 요영구로 나와 김진세로인네 집에 와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발걸음엔 날개가 돋히였다.

리유천은 요영구마을에 당도하자 최춘국정치지도원에게서 새로 식량수송대책임을 맡고 현정부 강시중회장과 현당서기 허건에게 들렸다가 창억이네 집으로 내려와 혜정이 어머니앞에 인사까지 드렸다. 그리고 방금 가야하로 놋그릇 닦으러 나갔다는 혜정이를 찾아 개울가로 나갔다.

아낙네들이 나앉아 빨래하는 그아래쪽 안침진 강기슭에 연한 초록빛 저고리를 입은 녀자가 외따로 떨어져있는것이 보였다. 리유천은 그 녀자가 혜정임을 인차 알아맞혔다. 혜정이가 적구공작을 나갈 때 녀자숙소 홰대에 벗어 걸어놓은 저 초록빛 저고리를 본적이 있었다.

그 저고리는 혜정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동정밑과 고름, 소매 끝동에 감빛천을 넣고 겨드랑밑에도 같은 색의 삼각형 쪽무이천을 넣어 지은 초록빛 회장저고리는 혜정이가 지난해 북만에 나갔다가 잠간 집에 들렸을 때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앉아 바느질솜씨를 배워주면서 지은것이다.

리유천은 혜정의 등뒤로 다가갔다. 어깨며 등이며 팽팽히 헹기운 초록빛 저고리는 혜정의 몸에 조금 작아보였다. 한해전에 지은 옷인데 혜정에게는 벌써 작아졌다. 그러나 리유천에게는 그렇게 행기운 옷모양이 오히려 탄력이 있고 싱싱한 처녀의 모습을 보여주는듯싶어 좋았다.

혜정은 이제는 그만해도 좋을 놋그릇을 문다지며 행길쪽을 그냥 지켜보고있었다. 혜정은 리유천이가 산에서 부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그릇닦는 일을 만들어가지고 가야하로 나온것이다.

리유천은 혜정이가 누구를 기다려 저토록 넋이 빠져있는줄을 잘 알았다. 그는 일찌기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과 환희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 처녀가 자기의 귀중한 안해로 되여줄 사람이며 자식도 키우고 고생도 함께 하며 일생을 같이 살아갈 생활의 동반자임을 목메이게 느꼈다.

혜옥은 지금 언니에게서 조금 떨어진 강아래쪽에 가있었다. 부락에서 가야하 기슭으로 나오는 아저씨를 먼저 알아보고 살그머니 자리를 피해준게 틀림없다. 리유천은 이젠 혜옥이도 다 컸구나 하는 기쁜 생각을 하며 혜정의 등뒤에 다가가 나직이 불렀다.

《혜정이!》

그러나 혜정은 리유천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였다. 정신은 그냥 행길쪽에 가있었다. 리유천은 뿌드득뿌드득 눈을 밟으며 혜정의 앞으로 돌아나갔다. 자기의 눈앞에 그림자가 비끼고 사람의 형체가 뚜렷이 나타나서야 혜정은 고개를 쳐들었다.

《어마나.》

혜정은 손에 들었던 놋그릇을 뚤렁 떨어뜨리고 엎어질듯 땅을 짚었다. 놋그릇은 개장변의 조약돌에 부딪쳐 쟁강소리를 내고 디굴디굴 굴러 가야하 물속에 쩜벙 빠져들어갔다. 혜정은 달려가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물속에 손을 넣으려 하였다.

《그러지 마오. 손이 새빨갛게 얼었구만.》

리유천은 날쌔게 손을 넣어 놋그릇을 집어냈다. 혜정은 리유천의 손에서 놋그릇을 받을념도 못하고 서있었다.

《이게 얼마만이요?》

리유천은 감격에 사무친 목소리로 묻고 혜정의 얼굴을 넋없이 들여다보았다.

《반년이 좀 지났어요. 지난 사월 초엿새날에 떠났다가 옹근 여섯달하고 열이틀을 지내고 돌아왔어요. 꽤 오랜 시일이 흐른것 같지요?》

혜정은 하루하루를 손꼽아넘기며 목마르게 기다렸던듯 목소리마저 젖어있었다.

《한 십년세월이 흐른것 같소. 그새 어떻게 지냈소. 고생이 말이 아니였을테지?》

《솔직한 말로 좀 힘들었어요. 고장이 생소한데다 적구공작경험이 없어 더더구나 안타까웠답니다.》

《그랬을거요. 그렇지만 장군님께서는 혜정동무를 두고 언제나 치하의 말씀만 하셨소. 혜정동무가 적구에 나가 식량공작을 잘하는 덕에 근거지살림이 많이 피였다구말이요.》

《저두 들었어요. 박현숙동무랑도 그러더군요. 장군님께서는 북만땅에서 설을 지내고 오실것 같다구 하더군요. 그런데…》

혜정은 새삼스레 리유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까닭모를 불안을 드러내였다.

《어떻게 원정부대에서 떨어지셨나요. 장군님곁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수 없다고 하시던분이…》

《그럴만한 일이 있었소. 장군님께서는 소부대를 이끌고 적구에 나가 부단히 교란작전을 하여 근거지에 놈들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소. 작금년간의 유격근거지방위경험은 유격대가 근거지에 눌러앉아 달려드는 적들만 칠것이 아니라 맞받아나가 적의 후방을 답새겨 놈들을 아연실색케 하고 사면팔방으로 적의 력량을 약화시켜 소멸해야 한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고 하시였소.》

혜정은 소리없이 모두었던 숨을 내쉬며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겠어요. 그러니 적구로 나가야 되겠군요.》

《장차는 그래야 될것 같소. 그런데 당면해서는 식량수송대 책임자로 지명됐소.》

《예? 거기서말예요?》

혜정은 깜짝 놀라 두눈을 크게 떴다. 혜정에게는 자기가 공작해 들여온 식량을 리유천이가 실어나른다는것이 별로 쑥스럽게 생각되였던것이다.

《별걱정 다하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대오에서 행군도 하고 전투도 하고 적구공작도 같이 하는것이 유격대생활이 아니요. 아무 생각 말고 식량을 무사히 실어나를 준비나 하기요.》

그때 혜옥이가 강아래쪽에서 아저씨를 부르며 달려올라왔다.

《혜옥이로구나?》

《아저씨!》

《혜옥아!》

리유천은 달려온 혜옥의 손을 부둥켜잡고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그새 어떻게 지냈느냐. 고생이 말이 아니였을테지?》

《그럭저럭 지냈어요. 지난 여름철에는 어머니가 앓으셔서 고생이 컸어요. 그래도 늘 어려운 때 이 놋그릇들이 우리를 도와주군했어요. 놋그릇 몇틀을 팔아 약을 샀답니다. 식량도 조금 사서 보태구요.》

혜옥이는 리유천의 손에 들려있는 놋대접을 받아 양푼우에 앉혀놓고 그 양푼을 리유천의 앞에 내보였다. 리유천은 감개무량히 그 번쩍거리는 놋양푼이며 그안의 놋그릇들을 굽어보았다.

《아무튼 다행이다. 나는 혜옥이가 아릿다운 처녀로 싱싱 자라나는게 늘 걱정이였다. 마창지주놈들이 어디 둔한놈들이냐, 게다가 촌에서 처녀들을 홀쳐가는 뚜쟁이놈들도 싸다니지, 지난해 녕안읍에 가보니 촌에 가서 처녀들을 홀쳐다가 돈있는놈들에게 팔아넘기는 뚜쟁이놈들이 처녀들을 마차에 싣고 대낮에 길거리를 지나다니지 않겠니. 혜옥이가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

《그게 정말이세요?》

혜옥은 어떤 불안과 근심을 품어안은듯한 착잡한 눈길로 리유천을 지켜보있다.

《정말 아니면 뭐겠니. 내가 혜옥이를 얼마나 기다렸다구 그러니?》

《저두 그걸 알아요. 그래서 한시바삐 요영구로 오고싶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아저씨에게 짐이 되는것 같아요. 아저씨는 우리때문에 힘들어하구 부담을 느끼지는 않겠어요? 근거지살림이 퍽 어려운것 같아요.》

리유천은 혜옥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혜옥이 말대로 근거지에서는 다 힘들게 산다. 먹는것도 바르고 입는것도 바르다.… 다만 여기서는 굶어도 벗어도 우리 세상이라는 그 한가지 기쁨이 있는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 목숨보다 귀중한 자유다. 그래서 혁명가요에는 〈목숨은 버리여도 자유 못버려〉하는 구절이 있는거란다.》

《알아요, 그게 뭔지…》

혜옥은 대답하고나서 아저씨의 팔을 끌어다 가슴에 꼭 품어안았다.

《나는 우리 아저씨가 제일 좋아.》

《나도 혜옥이가 제일 좋단다.》

《정말?》

《정말 아니구.》

혜옥은 리유천의 수염발이 검실검실한 얼굴을 눈여겨 살피더니 불쑥 근심스레 한마디 하였다.

《아저씨는 축간것 같아요. 앓지는 않았어요?》

《아니.》

《내내 싸움을 했었나요?》

《그렇단다.》

《배고프지 않아요?》

《괜찮다.》

《옷이랑은 어떻게 빨아입나요?》

리유천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혜옥의 깜빡거리는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 걱정은 절대로 말아라. 유격대는 뭐든지 제 손으로 할줄 알아야 한단다. 우리는 혁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빨래같은게 무엇이게 제 손으로 못하겠냐.》

혜옥은 대중할수 없는 어떤 근심에 눌려 우두머니 서있었다.

《아무리 유격대가 그렇기로 언니가 옆에 있는데 자기 손으로 빨래하겠나요. 그건 어머니가 허락지 않을거구 언니두 그렇게는 못해요. 언니를 옆에 두구 홀몸처럼 궁상스레 그러지는 말아요. 갈아입을 옷이 없으면 밤새 빨아서 아궁에 말리워드릴테니 덞은 옷이랑 그냥 걸치구 다니지는 마세요. 아무리 가난하구 힘든 살림이래두 우린 아저씨의 한몸은 어떻게든 가꾸어세울래요. 그게 우리네 행복인줄 아세요.》

리유천은 허허 하고 대범히 웃음으로 넘길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은 눈굽이 뜨겁고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혜정이도 목이 메여 고개를 숙였다. 리유천은 자기가 안해를 가진 사람이라는 뚜렷한 의식이 다시금 뇌리에 갈마든다.

혜옥이는 산에 해놓은 나무를 끌어오겠다고 먼저 자리를 떴다.

혜옥이 떠난 다음에도 그들은 한동안 그리운 회포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해는 어느덧 서켠으로 기울었다. 리유천은 고개를 젖히고 감개무량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얇은 고기비늘모양의 흰구름이 넘어가는 해의 빛살을 받아 가장자리를 연분홍빛으로 곱게 물들이고있었다. 그 부드러운 여광은 다시 대지에 뿌려져 눈덮인 가야하의 언덕이며 얼음강판이며 강건너둔덕우의 대장간과 부락집들을 모두 불그레한 감빛으로 물들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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