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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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현 숙반공작위원회사업을 담당하고있는 백하일은 한때 반일자위대가 쓰던 병실을 자기의 거처로 삼았다. 그는 여기서 먹고 자고 사무를 보았다. 큰 너렁청한 방의 중간에 외벽을 쳐서 간을 막은 그 한쪽은 침실로 쓰고 다른 한쪽은 사무실로 썼다.

백하일은 후리후리한 키에 이마가 벗어지고 눈섭이 류달리 검으며 그 검은 눈섭밑에서는 언제나 광채를 뿌리는 이글이글한 눈이 날카롭게 돌아가고있었다. 얼굴은 철색이고 입술은 두텁고 턱은 약간 앞으로 내밀려있었다. 그래서 그의 인상은 언제나 무엇을 향해 완강히 돌진하는듯한 모양이였다.

요즈음 백하일은 자주 말을 타고 부락들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사이에서 떠돌아가는 말들과 그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살피고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남이 알지 못하는 어떤 계책이 꿈틀거리고있는것 같았다.

오늘도 부락을 한바퀴 돌고 어지간히 지친 몸으로 김진세로인네 집앞을 지나면서 보려니 다리에 각반을 치고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진 행상군이 쉰 목소리로 아낙네들이 모여선 우물가를 향해 싸구려 소리를 지르고있었다.

요즘 근거지마을에는 이런 행상군이 드문히 나돌아간다. 엿장사, 독장사, 약장사도 다니고 둥근 채바퀴를 산같이 짊어지고 채를 메워주겠다는 채장사도 다니며 절쿤 고망어장사, 북어장사도 다닌다. 우물가의 아낙네들이 벌써 행길로 뛰여나와 보따리행상군을 둘러싸고 떠들어대고있었다.

백하일은 길섶으로 말을 몰아가면서 무심히 봉당우에 펼쳐놓은 울굿불긋한 행상보따리를 내려다보았다. 말발굽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행상인이 백하일을 빤히 올려다보면서 인사치레로 낡은 맥고모를 약간 들었다놓았다. 그 순간 백하일은 깜짝 놀라 행상인을 굽어보았다.

그는 금강지방의 라주경찰서 위생계 경찰이였다. 이를테면 자기 고향 이웃촌의 태생으로 한때는 자기 집 마름이였고 그후는 순사시험에 합격하여 경찰이 된 사람이다. 지금은 연길헌병대 가또중좌의 련락원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는가? …)

백하일은 은근히 가슴이 활랑거리고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내색을 않고 말을 때려몰아 자기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요영구의 숙반사업을 책임지고있는 장지연을 불러다 지금 부락을 나돌고있는 장사군들의 신분을 조사해야겠으니 독장사, 북어장사, 보따리행상인을 차례로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어느새 그의 잔등에는 식은땀이 내돋았다. 그는 옷을 갈아입을념도 없이 방안을 돌아갔다. 지나간 날의 일들이 돌이켜졌다. 동경류학시절부터 공산주의운동에 뛰여들어 경시청의 요시찰인물로 늘 감시를 받던 일, 조선에 건너온 다음에는 또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요시찰대상이 되여 감시와 미행과 추적을 당하며 한시도 편한 잠을 못자던 일, 그러다 종당에는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던 일, 그때는 백하일이 조선안에서 당당히 이름을 날리던 혁명가였고 《엠엘당》의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매일같이 계속되던 심문과 고문, 집재산을 팔아 경찰에 찔러넣고 아들을 찾아와 이제라도 전향문에 도장 하나 박고 목숨이라도 건지라고 애원하던 부친… 그러나 그때는 죽어도 공산주의밖에는 믿을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이였다.

그렇던 이 백하일이가 어찌하여 일본사람들앞에 전향문을 쓰고 오늘은 그들의 충실한 심복이 되여 공산주의와 생사판가리싸움을 벌리게 되였는가? …

아무리 복잡한 인간의 사고와 감정도 따지고보면 그것은 극히 명백한 하나의 단순한 진실에 귀착되여있기마련이다.

자기는 돈 있는자, 권세 있는자로서 결국 무산자들과 뜻을 같이할수가 없으며 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자기의 체내에 소화할수 없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한것이였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옥중생활과정에서 일어났다. 결국 자기에게는 자기의 갈길이 따로 있다는것을 백하일은 새롭게 절감하였다. 그것을 위해 백하일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가짜혁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요란한 혁명가로 소문을 내면서 전주감옥에서 《옥중투쟁》이라는것을 벌리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도중 호송경찰을 까부시고 기차에서 《도주》하여 동만땅에 발을 붙일 때는 일본경무청내에서까지 조선의 친일인사로 그의 이름이 불리워질 정도였다.

백하일을 조종하는 상전들의 계획은 컸다. 그들은 백하일을 혁명진영에 깊숙이 박아넣을 타산밑에 그의 목에 가짜현상금까지 내걸고 체포소동을 벌렸다.

백하일은 조선에서만아니라 만주일판에서도 두드러진 인물로 되였다. 그가 동만땅의 혁명조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는 이미 《혁명가》로서의 그의 《권위》가 당당히 담보된 뒤였다. 그는 구당, 현당 서기의 자리를 눈깜빡할사이에 거치고 지금은 숙반공작위원회에서 판을 치고 돌아갔다.

이사이에 백하일의 머리우에 앉아있는 직속상전들도 특무의 활동상 편의에 맞게 적당히 바뀌여졌다. 이를테면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특무로부터 간도 총령사소속의 특무로, 관동군사령부소속 간도륙군특무기관 특무로 부단히 자리를 바꾸면서 새로 정해진 상전들과 일을 하였던것이다. 지금은 연길헌병대장 가또중좌가 백하일의 직접 조종자였다.

백하일의 이 모든 내막을 알고있는 사람은 그의 상전들밖에는 없었다. 요영구유격구에서는 더구나 그것을 알수가 없었다. 심지어 국내에서 한때 《엠엘당》골간간부중의 한사람으로 있었던 현당서기 허건조차도 그것을 몰랐다.

장지연은 백하일의 지시대로 숙반대원들을 데리고다니면서 장사군들을 붙잡아들였다. 백하일은 보따리행상인을 만나는 진속을 감쪽같이 숨겨야겠기에 독장사와 북어장사를 엄중히 심문하고나서 독장사는 믿을수 있으나 북어장사는 믿을수 없으니 숙반에 끌어다 가두라고 하였다.

방안에서 사람들이 다 나가버리자 행상인은 백하일에게 가또의 지령을 전하였다.

그것은 김일성장군께서 원정부대를 데리고 북만에 가계신사이에 근거지를 내부로부터 와해할데 대한 헌병대 중좌의 특별명령을 구체화한것이였다.

《가또중좌는 백선생더러 가급적인 대책으로 김일성장군이 북만원정을 떠난사이에 공산혁명의 사령부가 있는 요영구에서 민활한 공작을 벌려 우수한 혁명골간을 제거해버리라고 합니다. 그 방법으로는 유격근거지들에서 조금 소요를 일으키다 만 반〈민생단〉투쟁이라는것을 묘하게 리용하여 조선인과 중국인들간에 싸움을 붙이고 조선공산주의자들사이에도 알륵을 만들어 저희들끼리 싸워 스스로 자멸되게 만들라는겁니다. 가또중좌는 백선생이야말로 이 일을 손싸게 할수 있다고 하면서 연길, 훈춘, 화룡 등지에서는 벌써 일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알겠소. 그쯤하면 알아들을만 하오. 김일성장군이 떠나있는사이에 일을 벌리라는것인데… 하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할수 있지. 지금을 놓치면 다요!》

백하일의 눈에서는 찌르는듯한 광채가 튕겨났다. 네모난 턱은 억세게 앞으로 불쑥 내밀려있고 약간 살거죽이 희슥희슥해진 두터운 입술은 강직하게 다물려있었다.

《일을 해봅시다.》

백하일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을 해보잔말이요. 그런데 어느놈부터 물고들어가야 옳겠는가? …》

백하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부산하게 방안을 왔다갔다하였다. 그의 눈앞에는 문득 혜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송혜정이 공작해 들여오는 식량수송대가 《토벌대》의 기습을 받게 하고 그 책임을 송혜정이나 식량수송대책임자에게 들씌워 《민생단》으로 몰아대면서 그들을 동정하고 두둔해나서는 사람들도 《민생단》감투를 씌울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번 작전을 면밀히 짜고들어 리유천이와 송혜정이의 목에 《민생단》의 올가미를 단단히 걸어놓으면 그들을 크게 믿고 원정의 길을 떠난 김일성동지에게 가해지는 타격도 심각할것이였다. 그러자면 장군님께서 근거지로 돌아오신후에도 정정당당히 들이댈수 있을만큼 근거가 명백하여야 하고 티끌만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된다.

(어디 두고보자. 너희들이 이번에야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가…)

백하일은 장군님께서 북만원정에서 돌아오시기전에 손을 쓰려고 행상군으로 가장한 특무를 부락에 머물게 하는 한편 가또와의 긴급 련락을 이어나가려고 서둘렀다.

《두호씨, 며칠 부락에 머물면서 케를 보아야 하겠소. 내가 어수룩한 주인을 하나 알선해줄터이니 그곳에다 거처를 정하고 가또중좌와의 련락을 보장해주오. 당신은 어떤 련락수단을 가지고있소?》

《래일쯤이면 려행용 마차를 타고다니는 사진사가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대두천일대의 련락원입니다. 그의 거처는 대두천에 있고 그가 나다니는곳은 대황구, 쌍하진, 소북구, 대북구, 요영구인데 그 사람에게 련락을 띄우면 대황구토벌대에 와있는 정보원에게 들어가고 거기서 연길에 직송됩니다.》

백하일은 은근히 감탄하였다. 일이 벌써 그렇게 치밀하게 조직되고있는가? …

가슴뿌듯하게 신심이 생긴다. 그러나 백하일은 자기를 거물급의 인물이라고 스스로 자처하고있었으므로 《행상인》앞에서는 조금도 자기 속심을 열어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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