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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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는 하늘중천에 떠오르고 산속은 잠풍한데 노루가 넘어간 재등너머 저편 우중충한 수림은 바람에 시달렸다. 가야하 물곬을 타고 내리다 돌연히 고패미를 친 돌개바람이 수림을 휩쓸고 지나는 모양이다. 저쪽 산협에서는 가끔 저렇게 미친바람이 돌아가군한다. 그래서 지나가던 중의 가사장삼을 벗기고 동냥주머니를 물에 떨구는 일이 있다. 그러면 중들은 무릎을 꿇고앉아 목탁을 두드리며 념불을 외운다. 바람이 지나면 중들은 물에 빠진 동냥주머니를 들어내여 바위우에 널어말리고 그 한쪽에 드러누워 낮잠을 잔다. 그것은 가끔 여름한철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겨울철에도 드물게 저러군하였다. 저 바람은 귀신의 바람이여서 짐승들도 거접지 못한다는것이다. 한번 저런 바람의 소용돌이에 짐승이 빠지면 털을 뽑히우고 뿔을 잘리우고 족다리를 부러뜨리군하였다. 그것은 귀신의 앙화를 입어 그렇게 되는것이라고 하였다. 짐승들도 그것을 아는지 그런 때는 먹이를 따라추격하던 짐승들까지 바람을 피해 달아났다. 그러니 재등을 넘어간 노루는 틀림없이 샘물골짜기에서 더 나가지 않았을것이다. 로인은 안달이 났다. 기어이 노루를 잡아 혜정이의 몸보신도 시켜야겠고 귀한 혜정이 발도 얼구지 말아야겠으니…
리호검로인은 드디여 한가지 수를 생각해냈다.
《이사람아, 내 산등을 질러서 저쪽 골짜기로 내려가볼터이니 노루가 이편으로 달아오면 소리를 질러 내앞으로 몰아다구. 몰이군노릇을 하는셈이지.》
리호검로인은 등에 지고있는 피나무구럭을 내려 노루가죽을 꺼내였다. 그리고 눈이 덜 쌓인 안침진 웅뎅이에다 노루가죽을 깔아놓고 혜정이더러 거기 앉아 앞산허리를 살피라고 하였다.
리호검로인은 나는듯이 산등을 치달아올라갔다. 거기서 아래쪽으로 뻗은 작은 산허리를 타고 불이 일게 내려갔다. 함지속처럼 움푹이 패워들어간 골짜기는 봄날처럼 따스하다. 나무가지우에서는 눈무지들이 철썩철썩 녹아떨어지고 어디서 새여나 흘러가는지 물소리가 도란도란 들린다. 로인은 이 물곬의 어디에 노루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조심조심 숲을 헤치고 나갔다. 갑자기 왈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송아지만한 노루가 껑충껑충 산허리를 가로질러나갔다.
리호검로인의 눈앞은 갑자기 온 세상이 노루털빛으로 물들어버린것 같았다.
한생을 짐승잡이로 살아오는 로인이 이렇게 노루 한마리에 정신이 휘둘릴수가 있을가?… 리호검로인은 허겁지겁 숲에서 빠져나와 쌍대배기를 내들었다. 그러나 잡관목이 너무 우거지고 노루가 달리는 경사면이 사계에 들어오지 않아 달음질쳐 노루를 따라갔다. 처음은 향방없이 왔다갔다하던 노루가 혜정이가 목지기를 하는 산등을 바라고 달리기 시작했다.
(옳지, 저놈의 짐승이 곬에 들었군.)
리호검로인은 산등으로 다급히 따라 넘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노루가 간다!》
리호검로인의 목소리는 산발을 타고 메아리쳐갔다. 그 순간 저편에서 무어라 화답하는 혜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옳지, 저 애가 알아차렸군. 이놈의 짐승아, 너야 이젠 독안에든 쥐지 별수 있느냐?)
리호검로인은 그 창황중에서도 혜정이의 조력을 받아 노루를 잡아본다는 기막히게 행복한 생각을 해보았다. 세상에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게 아니다. 리호검로인은 자기처럼 자식복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에 없을것이라고 믿었다.
온 근거지마을이 문들을 열어젖히고 구경할만한 일이로다. 리호검로인이 혜정이의 조력을 받아 송아지만한 노루를 잡았다고…
로인은 꿈같은 생각을 더듬으며 산등을 치달아올랐다. 노루는 벌써 서편 골짜기를 넘어서서 달린다.
그때 《휘여 휘여!》하는 혜정이의 노루쫓는 소리가 날아왔다.
리호검로인이 산등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니 노루란놈이 혜정이가 쫓는데도 그냥 냅다돌진해간다. 노루가 정신이 나갔는지 아니면 아낙이 서있다고 업수이 보았는지 알수가 없다. 어떻게 된 판인지 짐승들은 내인들을 알아보는 눈치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 혜정이야 유격대원이 아닌가.
혜정은 달려오는 노루를 막을 양으로 두팔을 벌리고 눈속에 뛰여들었다. 깜짝 놀란 노루는 발딱 서서 달려오는 혜정이를 쳐다보더니 골짜기아래로 내달렸다. 혜정이도 골짜기로 내달렸다. 노루가 아무리 빨리 뛰여도 골짜기에 뭉친 눈을 헤치고는 재간껏 뛸수 없다.
혜정은 골짜기의 눈무지에 노루를 몰아넣으려고 안깐힘을 써 달렸다.
리호검로인이 내려다보려니 노루와 혜정이가 엎치락덮치락 돌아친다. 총을 쏘기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리호검은 달려내려가며 소리쳤다.
《이사람아, 노루꼬리에 붙어서지 말라구.》
그러나 혜정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듯 노루꼬리로만 따라갔다. 리호검로인은 속이 달아올랐다. 이제는 산탄을 날려도 될판인데 짐승몰이를 할줄 모르는 혜정이는 노루한테서 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사냥군앞으로 짐승을 몰아오는게 아니라 사냥군을 등지고 짐승을 몰아간다. 왜놈잡는 묘술은 알아도 짐승잡는 묘술은 모르는것이다. 이젠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노루는 벌써 골짜기바닥까지 내려갔다. 그아래는 눈이 바람에 날려 번번히 드러난 공지다. 노루가 서너번 용을 써서 껑충거리더니 맞은편 숲속으로 사라지고말았다.
리호검로인은 우습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하였다. 짐승몰이를 그렇게 하는 법도 있나?… 노루를 놓치고만 혜정이는 눈속에 다리를 빠뜨리고 나올념도 못한다. 아마 다리맥을 죄다 뽑힌 모양이였다.
리호검로인은 덜컥 겁이 났다.
(저 애가 고뿔을 앓겠군. 이런 정신보았나.)
리호검로인은 정신없이 헐썩거리며 달려갔다. 눈속에서 발을 뽑아올리는 혜정이를 보니 발이 온통 젖었다. 물이 고인 웅뎅이에 발을 빠뜨린 모양이였다. 리호검은 너무도 기가 막혀 말도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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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이가 박속같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명랑하게 웃었다. 로인은 머리만 끄덕거리고 말을 못했다. (늙은게 주책없이 혜정에게 짐승몰이를 시키다니. 로친이 알면 물방치를 들고 요정을 낼랴구 할테지. 이렇게두 짐작이 없다구야.)
리호검로인은 가슴이 아파 땅에 주저앉고알았다.
《불을 피워야겠구나. 젖은 발을 가지고야 눈속을 어떻게 가느냐?》
리호검로인은 부랴부랴 싹다귀를 모아다놓고 부시를 쳐 불을 달았다. 활활 불길이 타올랐다. 리호검로인은 손을 내밀어 혜정이의 발에서 신을 벗기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혜정은 발을 주지 않는다.
로인은 자기의 아귀센 손을 내밀어 벗겨주지 못하는것이 못내 섭섭하였다.
《얘, 발을 이리 다구. 어려워할게 있느냐.》
로인은 그렇게 중얼중일 외웠다. 로인에게는 이 혜정이 이상 귀중한것이 세상에 다시 없다. 낳은 자식보나 열배는 더 곱다. 유천이, 그 녀석보다 혜정이가 더 고우니…
리호검로인은 군용물통의 뚜껑을 비틀어 열고 술을 찌웠다. 그것으로 혜정이의 언발을 문다져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혜정이는 그것도 사양하였다.
어느덧 발을 뽑고 제 손으로 젖은 신발을 불옆에 갖다놓은 혜정은 목도리를 풀어 그것으로 젖은 발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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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 로인의 울적한 기운을 덜어드리려는듯 상긋이 웃음을 띠우고 가만히 물었다.
《노루를 놓친것보다 네 발을 젖힌게 더 가슴아프다. 가슴이 알찌근해서 못견디겠고나.》
로인은 한숨을 내쉬였다. 혜정은 나무가지로 불무지를 헤집으며 신발을 이쪽저쪽 돌려놓는 로인의 거쿨진 손을 자기의 자그마한 두손으로 감싸쥐였다.
《
혜정은 눈물이 함뿍 고인 눈으로 로인을 쳐다보았다. 드디여 한방울의 눈물이 주르르 굴러내려 불무지우에 떨어졌다. 로인도 눈을 슴벅슴벅하였다.
《그래야 무슨 소용있느냐. 너를 또 이렇게 욕보게 했으니. 내 당대 로친을 겁내본적이 없다만 오늘은 로친 만나기가 겁이 나는구나.》
혜정은 부모의 그 이를데없이 다심하고 극진한 사랑에 그냥 목이 메여 로인의 손을 쓸어만지고 또 쓸어만졌다.
《
《무어?》
리호검로인은 사뭇 놀란듯이 입을 하 벌렸다. 혜정은 술통을 들고 마개를 비틀어뽑아 뚜껑에다 술을 부었다.
《아서라, 그 술로는 네 언발을 문지르자꾸나. 로친이 장만해보낸거라니.》
《
《응, 그러냐?》
리호검로인의 눈은 광채를 담은듯 빛났다.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혜정이 부어주는 술이 그토록 중해서인것이다. 혜정이가 뚜껑에다 술을 부었다. 로인은 절로 입술이 헤벌어졌다. 술을 붓는 쪼록쪼록 소리까지도 귀에 다정하게 울려왔다. 썩배기같이 꿋꿋한 손으로 슬슬 턱을 쓸어만지다가 혜정이가 두손으로 정히 받들어올리는 술을 받아서 눈을 감고 쭉- 들여마셨다.
《허, 이놈의 술이 별맛이로다.》
리호검로인은 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술을 호물호물 감빨아들였다.
혜정이가 또 술을 부었다.
(한잔만 마셔야 할텐데. 이래도 좋을가?)
리호검로인은 집로친이 겁이 났다. 령감이 제속에 술을 넣고왔으니 될말인가고 야단을 치면 할말이 없으렸다. 세상에 그렇게 경우 없는 노릇이 없을터이니…
그러나 혜정이가 받쳐드리는 술이라 또 마셨다.
《아서라, 그만 바닥이 날라.》
로인은 손을 내저었다. 이래서는 정말 안될 일이다. 늙은게 분별을 잃지 말어야지…
그러나 로인의 마음은 벌써 흥거로와져
(세상에 이런 멋도 있을가. 혜정이와 사냥을 하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혜정이 부어주는 술을 마시는 이런 기막힌 락이라니…)
로인은 세상이 다 녹두알만해졌다. 로친네 지청구도 겁날것이 없었다.
(이 령감이 혜정이 부어주는 술을 마셨다면 로친네도 기뻐할게 아닌가. 암, 기뻐하구말구.)
리호검은 혜정이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이렇게 저렇게 한잔씩 받아마시려니 어느덧 눈앞이 뽀얘졌다. 추운줄도 모르겠고 그냥 번열만 났다. 곰털토시를 뽑고 오소리가죽모자를 벗어도 추운줄 모르겠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니 끝간데없이 새파란데 몇송이 구름이 떠가고 그 구름의 언저리는 서기가 어린듯 뽀얗다.
(가만 있자. 이게 봄하늘이 아닌가?…)
리호검로인은 그만 엄청난 착각을 하였다.
《허, 이게 벌써 봄이로군. 몇날 눈이 오고 봄을 맞는수도 있나. 하긴 유천이가 눈없는 나라도 있다고 했었지. 세월도 다 좋게좋게 변하는
모양이지. 봄이야, 봄이거든, 저것 보지. 구름의 언저리에 봄서기가 어렸거든. 그러니 북만땅도 봄이겠군,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원정부대가 봄을
맞았겠다.
리호검로인은 쌍대배기를 그러안고 모재비로 기울어지더니 바위에 기대여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러자 코고는 소리가 울렸다. 로인은 입을 하- 벌리고 두손을 자유롭게 풀어던진채 태평스레 코를 곤다. 배허벅에는 뽑아보지 못한 누런 탄알이 가둑 박힌 탄띠가 거느적이 드리워있고… 쌍대배기는 눈우에 철썩 군드러졌다.
혜정은 늙은이가 고뿔이라도 들가봐 불가지를 옮겨다 로인의 량옆에 불무지를 더 만들고 연기를 쫓아 저쪽으로 보냈다. 입을 벌리고 코를 드렁드렁 고는 로인의 모습은 신통히 짐승의 가죽을 등에 지고 룡정거리 아들의 하숙방으로 들어와 문턱을 베고 잠을 자던 그때의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
혜정은 행복하였다. 혜정은 세상에 로인만한 그런분이 다시 없다고 눈물겹게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