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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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정은 반년남짓이 떠나있었던 무수평일대의 지방공작을 마치고 왕청유격근거지로 돌아오고있었다. 보통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반년이란 아무것도 아닌 시일일것이지만 적구의 살벌한 공작지에서 한몸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한 혜정에게 있어서 이 반년은 여느때의 옹근 한해도 두해도 비기지 못할 길고도 긴장한 시일의 련속이였다. 그동안 혜정은 식량과 피복 공작을 위주로 하였다. 처음 해보는 공작이지만 착실히 하여 유격근거지로 두번씩이나 많은 량의 식량과 피복을 들여보냈으며 또 그만한 량의 식량과 물자들을 구해놓고 근거지로 돌아오고있었다.

혜정이 근거지를 떠나 적구로 갈 때는 봄이였다. 그때는 나무가지들에 파릇파릇 잎이 피여나고 꽃망울이 움터나고있었지만 지금은 하얀 눈이 신등을 덮었다.

봄에서 겨울로, 이 어쩔수 없는 자연의 뚜렷한 순환은 혜정으로 하여금 자기가 근거지를 떠나있는 사이의 변화도 클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였다.

혜정은 골짜기사이의 간신히 트인 발구길을 따라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까만 무명치마에 색이 바랜 솜저고리를 입고 목에 흰 수건을 둘러감은 혜정은 얼핏 보면 수수한 촌처녀 같았지만 실상 찬찬히 들여다보면 룡정중학시절에 곱기로 소문이 났던 그 귀염성스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었다.

혜정이가 근거지에 들어섰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있었다. 그새 혜정이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였던 근거지 아낙네들은 우물가에서 그를 띠여보고 《아이구, 혜정이가 공작을 갔댔군.》하면서 뛰여왔다. 두번째로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동단원들이 와- 달려와 그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혜정은 눈우에다 보퉁이를 끌러놓고 대포연필 한자루씩 꺼내여 나누어주었다. 애들은 환성을 올리며 골목골목으로 흩어져갔다.

송혜정은 아직 깊이 얼지 않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뿌적뿌적 소리를 내는 가야하를 건너 장군님께서 계시는 사령부를 향해 반달음을 놓았다. 서산에 뿌리를 박고 마지막 잔광을 뿌리는 해빛이 사령부의 한쪽 통나무벽을 류달리 환하게 비치고있는데 뜰앞의 높지 않은 게양대에는 선홍색 붉은 기폭이 펄럭펄럭 나붓기고있었다.

송혜정은 어느덧 눈을 반반히 밀어낸 뜰안에 들어섰다. 그때 무기수리소와 병원이 있는 아래쪽 골짜기에서 올라오던 두 녀성이 엎어질듯 달려오며 소리쳤다.

《혜정동무 아니예요?》

혜정은 목소리만 듣고도 아동국장 박현숙이와 현부녀회장이라는것을 알았다.

혜정은 사령부의 뜰안이여서 크게는 대답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운 시늉만 하였다. 현부녀회장을 저만치 뒤떨궈놓고 먼저 달려온 박현숙은 혜정이를 와락 껴안고 기뻐 어쩔줄을 모르더니 장군님께서 원정부대를 거느리시고 북만으로 떠나가신 소식을 전하였다.

송혜정은 허전한 눈길로 문이 닫겨있는 사령부귀틀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가 벽이며 문선이며 문손잡이며를 하염없이 쓸어만졌다. 혜정이가 그토록 몸이 달아 총총히 발을 옮겨 다그쳐온것은 장군님께서 주신 임무를 깨끗이 완수하고 돌아와 자랑찬 보고를 드리게 된다는 전사의 행복과 기쁨이 있었던때문이 아니였던가.

송혜정에게 있어서 이번 적구공작은 자기자신의 지혜와 노력과 열정으로 매 순간을 살고 그 순간순간들에 자기의 량심과 충직성을 검열하고 혁명가의 보람도 느끼고 삶의 의의도 새롭게 깨우치면서 키를 자래우고 의지를 다듬어나갔던 간고한 투쟁의 나날이였다.

유격대에 입대하여 언제나 장군님께 충실했던 송혜정이고보면 너무도 새삼스러운 느낌이라고도 할수 있으나 적구공작을 떠나기 앞서 《민생단》으로 몰리여 죽을 고생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에게는 모든것이 이제 금방 시작인듯싶었다. 그럴것이 장군님의 구원을 받지 않았더라면 혜정이라는 녀성은 이미 인간세상밖으로 버림을 당한지 오랬을것이였다.

장군님께서 언제쯤 돌아오신대요?》

송혜정은 지금은 비여있는 사령부의 문을 빠금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기까지 하며 박현숙에게 물었다.

장군님께서 떠나시면서 최춘국동지더러 식량이랑 피복이랑 공작해다가 근거지인민들이 섭섭지 않게 설을 쇠도록 하라고 하신것을 보면 설전에는 돌아오실것 같지 못해요. 그런데 혜정동무, 장군님께서는 떠나시면서 혜정동무이야기를 특별히 많이 하셨어요.》

《아니, 저를 두시고요?》

《그래요, 혜정동무가 지방공작에 나가 식량을 많이 보내는통에 올해는 별로 쌀걱정을 모르고 살았다고 하시면서 혜정동무가 오거든 그새 고생하며 마련해놓은 식량을 제때에 실어들여다 인민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혁명에 참가한지 오래지 않은 혜정동무가 혁명을 잘하는걸 보면 자신에게도 고무가 된다고, 그렇게 겸허하신 말씀을…》

송혜정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핑하게 어렸다.

박현숙은 송혜정과 함께 사령부 뜰안을 나서서 현당위원회앞까지 같이 갔다가 자기는 저녁이랑 지어야겠다고 하면서 녀자숙소로 먼저 내려갔다. 송혜정은 현당에 들어가 문허건당서기와 마침 그곳에 와있는 현정부 회장이며 숙반공작위원회 백하일을 만났다. 그다음 재봉소와 출판소에 들려 인사하고 나중에 최춘국을 만났다. 이즈음 최춘국은 근거지에 달려드는 《토벌대》놈들과 싸움을 벌리느라고 산에서 내려오는 때가 드물었다.

송혜정을 본 최춘국은 한참동안이나 그의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그는 혜정에게서 적구공작보고를 받고 근거지의 형편이며 국내공작에 파견되여있던 혜정의 오빠가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요영구를 다녀간 소식이랑 전하였다.

《우리 명준오빠가요? 언제 오셨다 떠났게요?》

혜정은 뜻밖에 명준오빠의 소식을 듣자 오빠 그리운 생각에 몸둘바를 몰랐다. 혜정이가 오빠와 헤여진지는 꼭 두해가 되여온다. 그새 소식 한번 전하지 않던 오빠가 불쑥 근거지를 다녀간것이다.

오빠가 별고없이 국내공작을 하고있다는 소식만도 기쁘기 이를데 없는 일이지만 그럴수록 오빠 보고싶은 생각은 더욱더 간절해졌다.

《명준동무는 보름전에 요영구에 들어와 장군님으로부터 새 임무를 받고 백두산쪽으로 떠나갔소. 한이틀만 앞당겨왔어도 오빠를 만나보는걸 그랬군.》

혜정은 더없이 서글픈 표정을 짓고 최춘국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이번 공작은 꽤 오래 걸리겠지요?》

혜정은 별로 외로움이 깃든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품을 놓고 할일이니 오래 걸릴거요. 장군님께서는 장차 유격대가 국내와 만주의 넓은 지역에서 적극적인 투쟁을 벌려나갈것을 계획하시고 유격대의 활동거점이 될 백두산지구를 개척할 과업을 주어 파견하시였소.》

《그래요? 그럼 유격대가 장차 국경지대로, 백두산지구로 나가게 된단 말씀이세요?》

혜정에게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고 또한 놀라운 사변이기도 하였다.

《그렇소. 장군님께서 몸소 떠나신 이번 북만원정도 결국은 조국으로 국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한 투쟁의 준비라고 말할수 있소. 장군님께서는 유격대가 동만땅에서만 아니라 남만주와 북만주에서도 이 동만에서와 같이 적극적인 유격투쟁을 벌려나간다면 적들의 토벌력량은 산산이 흩어질것이며 우리가 국경지대에 진출하여 혁명활동을 벌려나갈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 마련될것이라고 가르치시였소. 그것을 위해 장군님께서는 남만에도 국경지대에도 무장부대들을 수많이 파견하시고 몸소 북만땅으로 원정을 떠나시였소. 그러니 우리는 장군님의 위대한 구상을 받들고 국내와 만주의 넓은 지역에서 적극적인 유격투쟁을 벌려 조국으로 가는 길을 앞당겨야 하오. 이 준엄하고도 어려운 전선에 송명준동무를 포함하여 우리모두가 서있는거요. 이제 리유천동무도 소부대를 이끌고 대두천과 쌍하진, 백초구 일대에 나가 적의 후방을 답새기게 되오. 이제는 동만의 모든 유격구들이 일면적인 방어로부터 전략적인 공세로 넘어갔소.》

언제나 침착하고 조용한 사람인 최춘국이조차도 지금은 어지간히 흥분에 들떠있었다. 최춘국을 바라보는 송혜정의 눈은 명민하게 빛나고있었다. 결코 쉽게는 이루어질수 없는 준엄한 생활이 근거지땅을 굽이치고있는것이였다. 많은 고난과 시련을 거듭하면서도 종당에는 그렇게 되고야말 래일의 격동적인 전변이 혜정의 눈에는 분명 보이는것 같았다.

혜정은 밤이 깊어 유격대지휘부를 나섰다.

송혜정이 숙소로 내려왔을 때는 자정이 지난 깊은 밤이였다. 송혜정을 기다려 모여앉았던 현부녀회장과 재봉소의 녀대원들은 밤일이 있어 돌아가고 박현숙이 혼자 송혜정에게 좀 빛다른 음식을 먹여야겠다고 감자송편을 해놓고 식어질가봐 군불질을 하고있었다.

《현숙동무, 뭘 그래요. 나야 그동안 잘먹고 잘 지냈죠.》

《그래두 여기 감자떡만 했겠나요. 그렇게 보동보동하고 곱던 얼굴이 좀 칼칼해졌어요. 리유천소대장이 보았더면 꽤 가슴앓이를 했을건데.》

박현숙은 조앙덕대우에서 귀한 손님이나 와야 내려 쓰군하는 소반을 내려다 음식을 차리면서 송혜정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리유천소대장과 송혜정은 룡정학창시절부터 서로 알고 사귀여오다가 이 근거지에 들어와 사랑이 맺어진 사이였다. 량편 다 공부를 하고 교양있게 준비된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을 오래 지속해오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련모의 감정을 소중히 키워온 부러운 쌍이였다.

박현숙은 송혜정에게서 그동안의 지방공작이야기를 듣느라 꼬바기 한밤을 밝혔다. 새벽녘에야 눈을 붙였는데 송혜정이까지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말았다.

밖에서 뜨락을 쓰는 소리에 혜정이가 먼저 눈을 떴다. 날이 훤히 밝아오고있었다. 박현숙을 깨우지 않고 아침을 지으려고 살그머니 일어나 물통을 들고 부엌문을 나서려던 송혜정은 엉겁결에 문을 닫고 놀란 가슴을 부둥켜안았다. 뜨락에는 밤새 얇은 눈이 내렸는데 리호검로인이 벌써 뜨락의 저쪽 끝까지 눈을 쓸어가고있었던것이다.

송혜정은 한동안 망설이다 하는수없이 박현숙을 깨웠다.

《현숙동무, 그만 일어나요. 날이 다 밝았군요.》

박현숙은 잠이 덜 깨여 궁싯거리기만 하면서 일어날념을 하지 않았다.

《뜨락에서 아버님이 눈을 쓸고계셔요. 물을 길어와야 할텐데 어쩌면 좋아요?》

박현숙은 그 말에 잠을 깨고 벌떡 일어났다.

《리호검아버님이 뜨락을 쓸어요? 그 아버님이 왜 우리 뜨락 눈을 쓸어요? … 옳지, 혜정동무가 온 소식을 들었군요. 혜정이 보고싶어 그래요, 아이참. 이걸 어쩌나.》

박현숙은 손벽을 치며 웃어댔다.

《현숙동무, 아버님이 들으면 어쩔려구 그래요. 참 난 어쩌면 좋아요?》

송혜정은 안타까와 발을 동동 굴렀다.

《뭘 그래요. 아버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아직 그렇게 못하겠어요. 난 못해요. 아이참, 쥐구멍에라도 기여들고싶어요.》

박현숙은 잠간 생각하고나서 혜정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기도 할거예요. 그럼 가만 있으라요. 내가 아닌보살하고 물을 길을테니.》

박현숙은 물통을 들고 리호검로인의 앞으로 지나며 깍듯이 인사를 차렸다.

《아동국장인가? 길을 조심히 밟아가게. 얼음이 깔렸으니.》

리호검로인은 인사를 받고나서 잔걱정까지 하였다. 박현숙은 물통을 들고 총총히 걸어오며 한마디 슬쩍 건늬였다.

아버님, 젊은 녀자들의 뜨락을 이렇게 쓸어주는 법도 있어요. 이젠 그만두세요.》

《늙은게 오금이 쑤셔 그런다네, 걱정을 말게.》

리호검로인은 흔연히 받아넘기고 그냥 썩썩 비질을 하였다. 박현숙은 더 할 말이 없어 부엌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로인의 비자루를 뺏으려 하였다.

아버님, 제가 해요. 남들이 보면 뭐라겠어요.》

리호검로인은 두어번 헛손질로 밀어놓더니 다음은 비자루를 막대처럼 세워잡고 허리를 폈다.

《아동국장은 늙은이를 괄세하는군. 섭섭하이, 아동국장이야 이 늙은것을 도와줘야 할게 아닌가. 안그런가?》

박현숙은 가슴이 뭉클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혜정동무가 너무 어려워 어쩔바를 모르기에.》

《허 잘못을 빌기까지야. 그래 우리 혜정이가 성한 몸으루 왔던가?》

리호검로인은 허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무 탈없이 왔어요.》

《몸은 축가지 않구?》

《더 고와진것 같아요.》

《더 고와졌다구? …》

리호검로인은 만족스레 고개방아를 찧었다.

《그런데 밤에 잠은 잘 자던가?》

《아이참 아버님두.》

《아닐세. 적구에 들어가 언제 발편잠을 자보았을텐가. 밤중에 이 뜰안을 내려다보니 그냥 문살에 불빛이 어렸거든. 분명 혜정이가 잠을 잊은 모양이지?》

박현숙은 눈굽이 뜨거워올라 할 말을 못하였다.

아버님, 제가 들어가 혜정동무를 내보내겠어요.》

《아동국장, 어서 그래주게. 내 집에 데리구 가겠네. 사람은 제 집에 누워야 발편잠을 자거든.》

박현숙은 부엌에 들어가자 송혜정을 떠밀어 내보냈다. 리호검로인은 돌아서서 모른척하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아버님, 그새 편안하셨습니까?》

리호검은 돌아서서 온 얼굴에 함뿍 웃음을 담고 응대하였다.

《오냐, 어려운 공작을 잘 마치고 왔다니 기쁘다. 최춘국정치지도원이 밤새 들려 소식을 전해주고 갔다. 그런데 왜 어깨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나왔느냐. 그러다 고뿔이라도 만나면 어쩔라?》

혜정은 그 말과 행동에서 형언할수 없이 애틋한 정이 차흐르는 로인의 진정을 느끼고 눈굽이 더워났다.

혜정은 방안으로 뛰여들어가 솜옷을 걸칠대신 까만 목세루천으로 지은 담배쌈지를 들고나왔다.

《그건 무어냐?》

《제가 공작지에서 아버님 담배쌈지를 하나 말궜습니다.》

《고맙다.》

로인은 울바자에다 비자루를 기대세우고 담배쌈지를 받을듯하더니 다시 비자루를 찾아들고 휘적휘적 걸음을 내짚었다. 혜정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있다가 저만치 걸어간 로인이 발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을 때에야 자기를 기다리는줄 알고 걸음을 내짚었다. 로인은 걸었다 멈춰섰다 하면서 혜정이를 꼬리에 달고 가야하를 건너 집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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