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제 8 장
12
(3)
십리평 앞벌의 밭들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널려서 밭갈이도 하고 씨도 뿌렸다. 사람들은 피로써 지켜낸 땅에 다시 씨를 뿌리게 되니 감격이 새로왔고 기쁨이 더 커 큰 경사가 난듯 흥성거리며 일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여기저기에서 소들의 영각소리가 울리고 흥겨운 농부가의 가락까지 들려왔다. 길이며 밭지경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고 고르게 갈아엎은 사래긴 밭이랑들에서는 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군복저고리를 벗으신
리재명은
흙을 툭툭 차며
뜨거운 감회에 잠긴 리재명이 다시 흙을 툭툭 차나가는데
그쪽 길가의 느티나무밑에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녀자가 자그마한 보꾸레미를 안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다가는 머리를 소곳이 숙이고있었는데 무엇인가를 망설이는듯 하였다.
얼마후 밭으로 돌아오신
《림성실동무가 아닙니까?》 하고 리재명이 물었다.
《…》
《성실동무야 아침에 떠난다고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게지요?》 하고 리재명은 다시 물었다.
《성실동무는… 솔골로 해서 온성으로 건너가기로 되였더랬는데 사포여울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제의하러 왔소.》
《예? 그쪽길이 좀 안전한가요?》
《아, 참 동무는 잊었는가요? 사포여울 말입니다.… 원호물자를 도강시킨 두만강여울이 있지 않습니까? 그우에 김중권동무가 최후를 마친 자리가 있습니다.》
《아!…》
리재명은 걸음을 멈추었다. 두만강가에 저고리고름을 나붓기며 서서 눈물을 머금고 애인의 혁명정신이 흐르는 강물에 맹세를 다질 림성실의 모습이 뚜렷이 떠올랐다.
아,
이날 정오 대왕청하의 물결우에서는 해빛이 눈부시게 부서졌다. 성림이 끌어온
말은 너무도 시원하고 상쾌해져 푸른 하늘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큰소리로 울어대였다.
최형준은 웬일인지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잔디풀이 푸릇푸릇한 기슭을 천천히 오르내리고있었다.
손을 다 씻으신
어디를 보나 봄빛이 짙어가고 봄의 훈향이 차넘치였다.
리재명이 환한 얼굴로 최형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보 시인동무! 이런 날에 한마디 읊어볼 생각이 없소? 동무는 명색이 시인이라면서 여태 시를 썼다거나 읊은 일이 있소? 어떻게 된노릇이요?》
그의 머리우에 드리운 수양버들실가지들이 바람결에 고요히 흐느적이였다.
봄이 왔노라
겨울이 가고 봄이 왔노라
가냘픈 한 시인 두팔 활짝 벌려
이 봄을 안고 눈물짓노라
기쁨에 겨워 행복에 겨워…
눈물짓노라 이 봄에 안겨
겨울에 깊이 머리숙여 감사하며…
초연 굶주림 피 절망과 죽음을 박차고
선조들이 떨기만 했던 왜적을 때려엎은 겨울
때려엎고 민족의 기개를 떨친 혈전의 겨울에
위대한 진리를 깨우쳐준
준엄한 인민전쟁의 그 겨울에…
…
수양버들실가지들 흐느적이는 밑에서
봄에 취한 가냘픈 시인
온 심혼을 담아 웨치고싶노라
우리에게
태양이 있어 이 봄이 왔다고
이 봄에 태양이 더 고맙다고
진리의 태양
사랑의 태양
위대한 리성의 태양이여!
아
이 봄을 안고 조국으로 가자
이 봄을 조국삼천리에 활짝 꽃피우자…
흐느적이는 수양버들실가지들밑에 즉흥시의 여운이 서려도는데 리성림이 군마를 끌고 물속에서 첨버덩첨버덩 뛰여나왔다.
말다리밑에서 물이 철썩철썩 튀여올랐다.
《사령관동지, 이거 봄에 취해 제가 정신이 쑥 나갔댔습니다. 십리평학교 시범교수에 참관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것 보십시오. 종소리가 울립니다.》
야무진 종소리가 땡- 땡- 울려오며 파란 공간에 파문을 그리는듯 하였다.
《아차, 큰일날번 했군!》
장군님께서도 밝게 웃으시며 서둘러 일어나시였다.
《사령관동지! 챠, 이거 새별눈이 다 흐려지겠습니다!》
《글쎄말이요. 허허허…》
그이께서는 말고삐를 잡으시였다가 최형준에게로 가시였다.
《좋은 시를 들려주어 정말 고맙소! 구체적인 의견은 저녁에 좀 나누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서 일을 다 보고 떠난 다음에 꼭 오오! 이런 날에 새별눈이 흐려져서야 되겠소?》
그이께서는 일부러 능청스럽게 웃어보이시며 최형준의 가슴을 툭 때려주시고는 말에 날아오르시였다.
장군님께서 타신 백마는 휘늘어진 실버들가지들을 날리며 달려나가더니 어느덧 푸른 버덩을 지나 진달래가 불타는 저 먼 산굽이를 돌아갔다. 십리평 아동단학교쪽에서 아이들이 끓어번지는 환성이 들려왔다.
버드나무밑에 서서 그이께서 가신쪽에서 들려오는 먼 말발급소리를 듣는 리재명의 눈에 푸른빛이 짙게 비껴들었다.
(아, 얼마나 좋은가! 그래… 그렇지.… 최동무가 읊은 시대로 조국이 광복되면 장군님을 모시고 조국으로 나가 이 봄을, 이 봄을 그대로 활짝 피우자! 삼천리강산에 활짝 꽃피우자!)
창억이는 대왕청하의 시원한 물속에 선채로 이마에 손채양을 붙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득히 높은 푸른 하늘로 기러기떼들이 두줄을 지어 유유히 날아들어오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