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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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보라에 묻힌 깊은 산중의 골짜기들에서 눈물겨운 작별들이 벌어졌다. 로약자들과 어린이들이 라자구와 요영구로 떠나가고있었던것이다.
최형준은 리재명이와 림성실을 도와 떠나가는 사람들의 대렬을 편성하기에 바삐 돌아쳤다. 떠나겠다고 선선히 응해나서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로인들은 손자나 아들이 유격대에 있기때문에, 녀성들은 남편이나 애인이 유격대나 반일자위대에서 싸우기때문에 그리고 분여받은 땅과 정든 고장을 뜨기 싫어 그리고 이 어려운 때에 의리를 저버리는것 같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사전을 앞둔 이 마당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가는것이 남아있는 사람들앞에 죄를 짓는것으로 여겨져 떠날 차비를 못하고 망설이고있었다.
최형준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며 설복하기에 다리맥이 진하고 목이 탁 쉬여버렸다. 그러나 창억의 어머니는 끝내 설복해내지 못하였다. 허씨는 아들이 유격대에 있고 령감이 왜놈들에게 잡혀 생사여부도 딱히 모르는 판에 제 혼자 살겠다고 떠나겠느냐고 하며 앉아버티였다. 낟알을 달라거나 무엇을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지도 않을테니 여기서 혼자 조용히 죽게 해달라고 눈물을 짓는것이였다. 그러나 손자인 봉남이만은 꼭 데려가달라고 부탁하였다. 싸우다 다 죽더라도 가문에 씨종자야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였다. 봉남이는 할머니의 심정에 부추김을 받아 어디론가 내뛰여 숨어버려서 도저히 찾아낼수 없었다.
떠나는 사람들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덮을것이나 입을것, 아무것이나 더 남겨주자고 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자고 하여 작별은 더 가슴쓰리고 눈물겨운것으로 되였다. 열명 혹은 스무명씩 조를 무어 동안을 두고 떠나가는 사람들은 눈물에 젖어 자꾸 뒤를 돌아보며 산골짜기를 뒤덮은 눈보라의 안개속에 사라져갔다.
남는 사람들이나 떠나는 사람들이나 모두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과연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이 있겠는지 기약할수 없는 작별이였다.
사람들이 계속 떠나가고 적들의 총성이 지척에서 들려오자 산속의 공기가 뒤숭숭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리재명이 최형준을
외진데로 불러내여
그 이튿날 아침 박현숙이 마감으로 어린이들을 데리고 요영구로 떠난다는 말을 들은 최형준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한동안 서글픈 얼굴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여태 그에게서 색다른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본적 없으나 어쨌든 자기를 괴롭히고 번민케 하고 열정에 불타게 했던 그 얼음고드름같은 존재가 영영 사라져버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허전해져서였다. 그전에 온성에서 돌아와서 윤보금이를 통해 당치 않은 인사말을 전했다고 무안을 주던 일을 생각하면 이제 특별히 찾아가서 인사할 필요까지는 없을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지호상간에 모른척 하기도 별스러웠다. 또 이런 엄혹한 때에 그쯤한 일이 가슴에 맺혀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것이야말로 얼마나 남아장부답지 못한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형준은 무슨 마음을 먹었던지 창억이네 움막에서 낫을 얻어 물푸레나무를 찍어다가 지팽이를 깎았다. 가파로운 숫눈길을 헤치며 산길을 톺아오를 때에 이런것이 있으면 동지인 박현숙에게 의지가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지팽이의 길이를 박현숙에게 맞추느라고 무척 마음을 썼다.
아동단학교 어린이들이 든 대피소근처의 울창한 참나무숲에는 눈꽃이 하얗게 피여있었다.
박현숙은 마침 움막앞에서 짐을 꾸리고있었다. 솜덧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머리에 털수건을 칭칭 감은 그 녀자는 몸이 부하고 욕심많은 아낙네처럼 배낭에 무엇인가를 자꾸 꿍져넣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옆에서 떠날 차비를 다한 서너명의 어린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있었다.
최형준은 물푸레나무지팽이를 두손에 들고 그에게로 다가가다가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 머뭇거리며 그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이때 아래쪽으로부터 홍병일이 개털외투 앞섶을 열어헤치고 헐썩거리며 올라왔다. 그의 입에서는 입김이 훌훌 날아나왔다.
푹 눌러쓴 털모자의 귀덮개며 눈섭에 성에가 허옇게 불리였다. 그는 전에없이 활기에 넘친 걸음이다.
《여- 최동무-》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박현숙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홍병일은 반겨웃으며 달려와 최형준의 손을 잡아흔들더니 그의 팔을 끌고 눈꽃이 하얗게 핀 참나무숲속으로 들어갔다.
《유격대주력이 여기서 빠져나갔단 말이요. 이제는 텅 비였소.》
그리고는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는듯 실눈을 지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최동무, 그새 맘고생을 많이 했지? 나는 속에 재만 가득찼소.》
최형준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어정쩡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영구나 어디 더 깊은데 들어가 띠를 풀어놓고 회포를 나누자구. 빨리 떠날 준비를 하오.》
《무슨 소리요? 자위대진지는 어찌고 떠난단 말이요?》
《헹, 이 사람이 밤중이군. 유격대주력이 여기서 빠져나갔다니까. 이제는 텅 비였소! 김진세령감이 살아서 놈들한테서 대접을 받는걸 본 사람이 있는데 적들이 그 령감태기를 앞세우고 여기로 인차 들어올게요.》
《그럴수 없소. 그 로인은 마촌이 불탈 때 이미 운명했소.》
《그건 동무 생각이구 정황은 훨씬 엄혹하오. 빨리 준비하라구. 요영구에 들어가서 현당을 다시 조직하고 여기서 벌어졌던 모든 로선투쟁을 총화지어야 하겠소.》
최형준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주춤 물러섰다.
《나는 당신이 코민테른파견원사살사건때 권일균의 총에 맞은 다음부터 일을 잘한다기에 채심한줄로 알았댔소.》
그러자 홍병일은 허리에 두손을 올리고 턱을 쳐들사 하고 미친듯이 웃어댔다.
《홧화화…》
그는 한껏 웃어대다가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샌님아, 그게 권가의 총탄인줄 알았는가?
그때 내 립장이 어떠했겠는가?
자칫하면 혼자서 혐의를 뒤집어쓸 판이였지. 그렇다고 권가나 박가처럼 왜놈들한테로 도망치겠는가? 나는 자파의 로선이 패했다고 적들한테로 넘어가는 그런 추물이 아니요. 나는 하는수없이 제 손으로 팔을 쏘고 이날이때까지 수모를 참아왔소, 이날을 위해!》
최형준은 그가 자기를 한배속으로 알고 이런 소리를 탕탕 줴치는것에 우선 참을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그 모욕감이 온몸을 황황 불사르는듯 하였다.
《보라구, 근거지는 다 망했네. 주력이 빠져나갔으니까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끝장이네. 우리가 빨리 손을 써서 현당부터 줴야겠네.》
최형준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무서운 일이구나!
《야야, 흰소리는 작작하고 가자! 네 필력이 아까와서 내가 참는줄 알아라!》
《못 간다. 나는 목숨을 내걸고… 죽어도…
《뭣이 어째? 에익!》
어느 순간엔가 홍병일의 주먹이 그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최형준은 모재비로 쓰러질듯이 비칠거리다가 몸을 가누었다.
그는 무서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나가 물푸레나무지팽이로 홍병일의 어깨며 잔등을 마구 후려쳤다.
《배신자! 종파악당! 권가나 네놈이나 다 같다. 내가… 내가… 네놈들을… 엑!》
눈꽃이 하얗게 흩날려내리는 속으로 박현숙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왔다. 그 틈에 몸을 뺀 홍병일은 아래로 달려내려가며 그에게 소리쳤다.
《다시 만나자! 후회할 날이 있을게다! 여기 남았댔자 죽음밖에 차례질게 없어!》
박현숙은 단숨을 몰아쉬며 겁에 질린 눈으로 최형준을 쳐다보았다.
《왜 몽둥이를 휘둘러요? 말로 하면 안돼요?》
《동무가 무슨 상관이요? 참견 말란 말이요!》
박현숙의 앞에서 처음으로 큰소리를 친 최형준이다. 그는 험한 얼굴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지팽이를 내려다보다가 거기에 더러운것이 묻기라도 한듯 옆으로 홱 뿌려던졌다. 그리고는 살같이 날아간 지팽이가 어느 눈속에 꽂히는가도 돌아보지 않고 홍병일이와 반대방향으로 뛰여올라가며 비칠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