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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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이 깊어 절골에서 넘어와 새골에 떨어진 창억이는 서남쪽하늘이 벌겋게 타오르는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왜놈들이 산에 불을 지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차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마촌이?…)
그는 빨리 사령부에 가닿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골짜기를 따라 정신없이 뛰여내려갔다.
그가 새골과 범골이 합쳐지는데까지 내려오니 골짜기가 환히 틔여저 멀리 아래쪽에서 대화재의 불길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활활 타오르는것이 똑똑히 바라보였다.
마촌쪽이 틀림없었다.
마촌이였다!
어느 한두집이 타는것이 아니라 온 마을이 통채로 불타오르고있었다. 불길은 마을 한쪽에서 잦아내리는가 하면 다른쪽에서 기승을 부려 솟구쳐오르다가도 안에서 소리없는 폭발이라도 이는듯 온 마을을 삼켜버리며 무시무시하게 터져오르면서 무수하게 날름거리는 시뻘건 불갈기들을 하늘높이 날려올렸다. 하늘이 온통 벌겋게 물들여졌다.
창억이는 자기가 그 무시무시한 불길속에 휘말려드는듯 한 환각에 문득문득 사로잡히군 하였다. 얼굴이 화기에 데고 내내에 숨이 막히는듯하였다.
(아, 귀축같은 놈들!)
그는 터져오르는 비분을 씹어삼키며 몸부림쳤다.
어린시절의 꿈이 깃들었던 마을이 불타는것이다. 아, 저게 어디 집들이 불타는것인가?
창억이는 터져오르는 가슴을 그러쥐였던 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몸부림쳤다.
이때 뒤에서 사람들의 피타는 웨침소리들이 터져오르고 땅이 쿵쿵 울려왔다.
창억이는 놀라서 돌아보았다.
골짜기를 가득 메우며 수많은 사람들이 미친듯이 소리지르며 달려내려왔다.
모두 도끼며 쇠스랑이며 낫이며 몽둥이들을 들었다. 그들은 앞서거니뒤서거니하며 사태처럼 밀려내려왔다.
누구인가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내려와 두팔을 쩍 벌리며 그들을 막아선다.
《서시오! 서란 말이요! 안되오!》
리재명의 목소리이다.
사람들이 왁작 끓어번진다.
《여보, 앉아서 죽으란 말인가?》
《피값이라도 하자!》
《회장!》
《아-》
창억이는 그들에게로 달려올라갔다.
리재명은 비분에 펄펄 뛰여오르는 사람들앞에서 주먹을 머리우에 높이 쳐들어 흔들어대였다.
《돌아서시오. 당장… 당장 돌아서란 말이요. 여러분! 동무들! 왜 내 말을 안 듣소? 이제는 정부도 조직도 다 없어졌는줄 아우?》
리재명은 창억이를 피뜩 돌아보더니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 여기에 사령부 호위대원이 와있소! 우리 마을 창억이가 왔소! 우리가 도끼나 쇠스랑을 메고 달려내려가 피값이나 한다고 근거지를
구원할것 같소? 왜놈들이 물러갈것 같소?
그리고 리재명은 그를 돌아보며 응해달라는듯 불같은 눈을 껌뻑거리였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잠잠해졌다. 하늘을 덮으며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불구름의 빛을 받아 시뻘겋게 번뜩이는 눈들이 그를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창억이는 목구멍에 단재가 가득 들어찬듯 말이 나가지 않았다. 리재명의 말대로
사람들속을 비집고 도끼를 든 농민이 씨근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야, 창억아!》
오풍헌이다.
《
《예…》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풍헌아바이, 왜 모두 이러십니까?》
《이 사람아, 풀뿌리를 캐먹다 얼어죽기보다 피값이나 하는게 낫지 않는가. 마을까지 다 타버렸는데 이제 아까울게 뭔가?》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끓었다.
《진정을 하십시오. 회장동무 말이 맞습니다. 제가 내내
그리고 창억이는 머리를 쳐들고 층층으로 겹싸여져보이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왜놈들이 망하는건 시간문제… 시간문제입니나. 제 말을… 제 말을 믿으십시오!
먼 화재의 불빛에 길게 이그러져 비낀 나무그림자들이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흉칙한 괴물들처럼 어른거렀다.
창억이는 골짜기를 따라 에돌지 않고 산을 꿰질러 생눈길을 마구 헤치며 사령부쪽으로 내달렸다. 그는 미끄러져 딩굴기도 하고 눈구뎅이에 허리까지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면서 숲속을 누벼나가다가 화닥닥 놀라 멎어섰다.
앞에서
공기가 무섭게 전률했다.
《사령관동지!》
창억이는 목이 메여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령관동지!》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바라보시는
《절골에서 오는 길이요?》
《옛… 야간기습을 조직하겠답니다.》
《거기도 손실이 크지?》
창억이는 갑자기 설음같은것이 터져올라 입술을 피터지게 깨물고 머리를 떨구었다.
그는 허물어져내리는 몸을 지탱하려고 총대로 땅을 짚었다.
《성림동무는?…》
《있소.… 지휘부에 있소.》
아마 허기증에 쓰러진 모양이다.
《걷지 못합니까?》
《동무는 빨리 가서 아무거나 좀 먹소. 눈이라도 끓여먹소.》
세찬 바람이 휙 스쳐지나가는듯 하였다.
(네 이게 무슨짓인가?
그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우에서는 시뻘건 불구름이 뭉개쳤다. 마촌의 불길이 산에까지 번진 모양이다. 그 화광에 눈우에도 벌건 피빛이 어른어른 흐르는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