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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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키가 크고 얼굴이 남자처럼 생긴 부녀회원이 운동장쪽을 무심결에 바라보다가 큰소리로 웨쳤다.
《저걸… 저걸 보우! 저게 누구요? 그 집 새서방이 아니요?》
부녀회원들은 모두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창억이 풀덤불속을 누비며 이쪽으로 정신없이 뛰여왔다.
《그네에서 떨어져 몹시 상한줄 아는 모양이지?》
그러자 녀인들은 장난기가 들어 저마다 한마디씩 하였다.
《저 훌훌 나는걸 보오. 야- 제 색시가 귀하긴 귀한 모양이다.》
《우리 어찌는가 한번 떠보자! 숨이 꼴깍 넘어가서 땅에 파묻었다고 할가? 호호호…》
《그래야 곧이듣나? 병원에 실어갔다고 하지!》
《보금이, 숨어… 숨어라!》
《이젠 늦었어. 이 하불을 씌워놓구 밥함지랑 올려놓자. 빨리 누워.…》
그들은 보금이를 붙잡아 우격다짐으로 풀밭에 눕히려고 덤벼쳤다.
보금이는 수집고 우스워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그는 두볼을 싸쥐고 풀밭으로 멀리 달려나가서 무성한 수풀의 싱그러운 풀냄새속으로 뛰여들어갔다. 숫눈송이처럼 정갈하게 흰 꽃송이들이 향기를 풍기며 설레이면서 가슴에 안겨들었다. 그 향기때문인지 머리가 핑 돌았다. 걸음을 멈춘 그는 숨을 조용히 몰아쉬다가 한손을 낭자쪽에 가져가고 머리를 한껏 뒤로 젖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름할수 없는 행복감에 겨워 꽃들을 서둘러 꺾어서 한팔에 가득 안았다.
이때 창억이 수풀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땀이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웬일인지 좋지 못한 기색이 어렸다.
보금이는 그네터에서 롱담들이 지나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수집게 웃어보였다.
창억이는 군모를 벗어 이마의 땀을 씻고는 아연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전을 어디다 뒀소? 노전말이요?》
《예?》
보금이는 그제야 부녀회장의 부탁이 아리숭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섬찍해졌다.
《부녀회장이 노전 석장을 맡겼다면서?… 그걸 어쨌는가 말이요?》
《마동호동무가 가져오겠다고 해서 맡겼는데… 안 가져왔어요?》
《안 가져왔길래 없지?》
《예? 제가 맡겠다고 하구선 왜 안 가져왔을가?》
《마동무는 마동무고 왜 제가 맡은 일을 남한테 미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생겼소.…
보금이는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었다.
《리재명회장이 숱한 사람들이 있는데서 어떻게 된 일인가 나한테 묻는데 얼굴을 들수 있어야지. 바빠서 뛔왔소.》
《아이참, 이 일을 어째요. 제가 어디 가서 구해올가요?》
《그만두오. 리재명회장이 어디로 뛔갔으니 어떻게 되겠지.》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여보, 제가 어디다 쓰는겐지 알았으면 그랬겠어요. 어째 부녀회장은 그런 소릴 안했을가요?》
《누가 그런것까지 일일이 대줘야 알겠소? 참… 이 체육대회가 보통 운동회 아니란게야 알지 않소. 여기서 조직하는 일은 크나작으나 다
창억이는 대왕청하쪽을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였다.
《여보, 이 일을 어쩔가요?》
《실수로만 생각하지 마오.…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소? 내 온성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 밭김을 매면서 그만큼 일렀는데 붕 떠가지고…》
창억이는 더 무슨 말을 하기 멋적다는듯 돌아서 결패스럽게 걸어갔다. 그 걸음이 보통걸음인것 같지 않았다. 보금이의 얼굴이 해쓱해지고 가슴에 안았던 꽃가지들이 화라락 떨어져 발밑에 흩어졌다.
그는 남편을 불러세우고 무엇인가 말하고싶어 흩어진 꽃가지들을 밟으며 달려나갔다. 그러나 몇걸음 못 나가서 멎어서고말았다. 남편을 부를 맥이 없어서였다.
체육대회가 있은 다음날
이튿날 보금이는 침통한 얼굴로 내내 집에 붙박혀있다가 빨래함지를 안고 소왕청하로 나갔다.
그처럼 흥성거리던 마을길은 조용하였다.
보금이 빨래함지를 물녘에 놓고 손맥이 풀려 오도카니 앉아있다가 빨래를 물에 느릿느릿 헤우는데 물결우에 비누거품이 둥둥 떠내려왔다.
그는 무심결에 얼굴을 들어 웃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의 물황철나무그늘밑에서 흰 머리수건을 쓴 녀자가 빨래를 하고있었다. 부녀회장이였다. 림성실이도 이쪽을 보더니 그를 알아보고 빨래들을 얼른얼른 소랭이에 담아가지고 움쭉 일어나 내려왔다.
두 녀자는 가지런히 앉아 빨래를 하였다.
보금이는 부녀회장의 빨래솜씨를 눈여겨보게 되였다. 림성실은 빨래돌우에 남자웃내의를 접어놓고는 비누칠을 살살 한 다음 조심스러우면서도 매우 부드럽고 날랜 솜씨로 문질렀다. 어느덧 비누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그의 손등을 덮어버렸다.
그는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문득 일손을 멈추고 비누거품이 묻은 손등으로 이마에 흩어져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보금에게 밝게 웃어보였다.
《요전날 세게 욕을 먹었어요?》
보금이는 구슬픈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숙였다.
《아니…》
《무슨 일이 날것 같아 내 몰래 따라갔다가 돌아섰지요.… 내가 잘못해서 보금이가 욕을 봤어요. 차근차근 말해주는건데…》
《어린애라고 그러겠어요. 내가 속이 설익어서 그렇지.…》
《창억동무가 몹시 성났지요?… 무섭게 굴어요?》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탓하지 말아요.… 나는 부러운 생각이 들던데요. 제 안해를 곱게 가꾸어주자는 심정이겠지요. 자기를 그렇게 가꾸어주는 손길이 있다는게 얼마나 좋아요. 호호호…》
그 말에 보금이는 설음이 북받쳐 얼굴을 외로 돌렸다.
림성실은 신이 나서 다시 빨래를 문지르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날 저녁에 마동호동무가 보금의 편을 들었다가 창억동무한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호호호… 창억동무가 이전보다 사람이 달라졌지요?… 보금이는 좋겠어요.…》
보금이는 남의 일을 그처럼 좋게 생각하며 기뻐하는 그 성품이 놀라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림성실은 빨래를 물에 활활 헤우더니 물소리를 쭈르르 내며 들어올렸다. 그의 두손에 들려올라오는 속적삼잔등에서 찢어진데가 보였다.
보금이는 그를 돌아보다가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왜 그렇게 됐어요?》
《땀에 절어 천이 이렇게 삭아떨어졌어요.》
림성실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는 적삼을 조심조심 짜고는 가볍게 물기를 턴 다음 보금의 오른쪽옆에 있는 해볕이 잘 드는 너럭바위우에 펴놓았다.
《누구 적삼이야요?》 하고 보금이는 물었다.
림성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서 다음빨래를 빨래돌우에 올려놓고 또 비누칠을 하기 시작하였다.
《누구 적삼인가요?》 하고 한참후 보금이는 다시 물었다.
림성실은 빨래돌우에 끓어오른 비누거품속에 두손을 묻은채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잠자코있었다. 고요가 흘렀다. 파란 하늘을 담아싣고 유난히 번들거리는 물우에 버들잎이 한잎 두잎 날아떨어져 파문을 그리였다.
《
보금이는 놀라서 너럭바위우에 넌 그 적삼을 돌아보았다. 그 적삼 잔등에서는 수많은 사연을 이야기하는듯 김이 보일락말락 피여오르고있었다.
림성실의 목소리가 귀전을 스쳤다.
《여기 와서부터 입은것 같은데 저렇게 됐어요. 흘리시는 땀에 천이 견디지 못해요.…》
그는
《보금이… 보금이… 왜 이래요?》
《아니, 그저… 그저…》
우중충한 산그림자가 푸르게 비껴든 물우에 빨래방치 하나가 한가로이 떠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