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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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 보금이는 날듯이 걸음을 다그쳐 십리평으로 넘어갔다.

장군님의 초청을 받고 먼곳들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한 십리평은 명절기분으로 흥성거렸다.

집집에서는 대낮인데도 밥짓는 연기가 굴뚝이 터지게 피여오르고 함지며 그릇들을 든 아낙네들이 이집저집으로 바삐 뛰여다녔다. 마을길에 나와 소풍을 하며 근거지의 산천경개를 둘러보는 손님들의 모습도 여기저기에 보였다.

국내대표들이 들어있는 아담한 동기와집으로 가슴을 울렁거리며 찾아들어가던 보금이는 너무도 놀랍고 기뻐 두손을 가슴앞에 모아쥐며 《엄마!》 하고 비명비슷한 소리를 내질렀다.

마당에서 전장원이와 전수원면장이 서성거리고있었던것이다. 전장원은 수수한 밤색양복차림이고 전수원은 조선바지저고리에 민족의 얼이 흐르는듯 한 흰두루마기까지 떨쳐입었다.

보금이는 물기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를 알아보고 환성을 지르며 달려나온 전장원과 전수원은 반가와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사연깊은 녀인을 만난 반가움에 낯선 사람들속에서 비로소 아는 사람을 만나 이제는 손님체면을 덜 차리게 되였다는 기쁨까지 겹쳤던것이다. 보금이 또한 옛 은인을 만났을뿐아니라 전면장까지 초빙되여온것으로 보아 자기가 떠난 사이 고향에서 얼마나 큰 변혁이 일어났겠는가가 짐작이 되여 더 기뻤다. 반가움에 반가움, 기쁨에 기쁨이 겹치여 저도 모르게 눈물부터 머금게 되였다.

전장원은 그의 손을 잡은채로 고향소식부터 서둘러 말하였다. 친정집은 무사하였다. 아버지는 농민협회에 들어 근거지를 돕는 일의 앞장에 서있고 어머니는 야학에까지 나온다고 하였다.

떠들썩하게 온성소식을 말하던 전장원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보금이더러 저 손님한테 인사하라고 귀뜀했다.

퇴마루에 소복단장을 훤하게 한 체구가 장대한 로인이 점잖게 앉아서 수염발을 쓸어만지며 웅심깊게 번쩍이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있었다.

보금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로인은 움쭉 일어나서 두루마기앞섶을 천천히 여미며 류다섬대표로 온 한설봉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비밀준수상 필요로 대표들은 함부로 자기 주소를 밝히지 않기로 되여있는데 로인은 여기에 믿지 못할 사람이 누구냐는듯 한 배심인지 그쯤한 주의사항에는 아랑곳없었다. 대표들이 점심식사를 푸짐하게 대접받고 푹 쉬고난 다음 보금이는 그들을 데리고 숙소를 나섰다. 근거지생활의 이모저모를 참관시키기 위해서였다. 온성대표들은 안내원과 구면인데도 별로 말을 건네는 일없이 점잖게 따라왔으나 류다섬대표인 한설봉은 그 나이나 풍채에 어울리지 않게 노상 입을 다물줄 몰랐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보금이와 전장원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자기와 한숙소에 든 두사람이 온성의 풍인동에서 왔다는것을 알았는지 그들에게 그곳 면장이 이전에 해먹던 그놈인가고 물었다. 전수원이 좀 당황해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한설봉은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놈이 유격대가 공작나온것을 왜놈수비대에 고발해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숱한 유격대원들이 피를 흘리게 했다는데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는가고 물으면서 눈을 무섭게 번뜩이였다. 로인은 거기가 조선넋이 살아있는 땅인가, 왜 그따위놈의 사등뼈를 일찌감치 분질러놓지 못하는가고 엄한 추궁까지 들이대였다. 당사자인 전수원면장은 얼굴이 벌개졌다. 전장원은 껄껄 웃으며 경원땅에는 그따위놈이 없는가고 묻고는 주구 한놈을 처단한다고 조선이 당장 독립이 되는것도 아니기때문에 참아오는데 이제 때가 되면 다 알도리가 있을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보금이는 전면장의 옹색한 립장이 안되기는 했지만 이런 오해와 옥신각신이 재미나기도 하여 손님들 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인민혁명정부 구위원회 각 부서의 사무실들을 참관시키고 마을을 구경시킨 다음 그들을 버덩의 밭으로 안내하였다. 밭들에서는 푸르싱싱하게 자라오른 조, 귀밀, 감자, 강냉이 등의 곡식들이 해빛에 잎사귀들을 반짝이며 살랑살랑 설레이고있었다.

보금이는 그 곡식들을 보자 이들에게 자기네 밭을 꼭 보여주고 긴 이야기를 해주자는 욕심이 들어 토지개혁에서 농민들이 토지를 얼마씩이나 분여받았는가에 대하여 대충 말해주었다. 그래도 한설봉이와 전수원은 너무도 꿈같은 일이여서 밭이랑으로 달려들어가 곡식들을 쓸어만지고 흙을 쥐여 부스러뜨려보며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보금이 손님들을 데리고 마촌 아동단학교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한 교실에서는 박현숙선생이 수업을 진행하고있었다.

새로 보수한 교실안에는 향긋한 송진냄새가 떠돌았다.

세줄로 놓인 책상들에 앉아있는 어린이들은 낯선 손님들이 들어오니 뒤를 돌아보며 잠시 웅성거리다가 인차 앉음새를 바로가지고 흑판을 쳐다보았다.

손님들에게 상냥한 눈인사를 보내고난 박현숙은 흑판에 조선지도를 크게 그리고 강들을 그려놓기 시작하였다.

선생이 강을 하나하나 그려놓을 때마다 입속으로 그 강이름들을 외워보는 기쁨에 넘친 속삭임소리들이 방안에 가득찼다.

이윽고 박현숙은 어린이들쪽으로 돌아서서 그 인상적인 새별눈을 빛내이며 맑은 목청으로 말하였다.

《아동단원동무들, 지도에 그려진 이 강들이 우리 나라의 제일 큰 강들입니다. 지금 이 강들에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피눈물이 흐르고있습니다. 피눈물과 한숨이 흐르는 강은 죽은 강이나 다름없지요. 그러나 동무들이 어서 배워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나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다면 이 강들은 다시 투쟁의 노래가 흐르는 강으로 살아나서 세차게 물결치며 흐를것입니다.… 제가 먼저 강이름을 부르면 동무들은 따라불러야 합니다. 지도를 보십시오. 백두산의 정기를 담아싣고 동서로 갈라져 흐르는 이 두 강은 압록강과 두만강입니다. 》

박현숙은 지시봉으로 압록강을 짚으며 맑고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압록강!》

어린이들은 목소리를 합쳐 힘차게 따라불렀다.

《압록강!》

《두만강!》

《두만강!》

《청천강!》

《청천강!》

《대동강!》

《대동강!》

보금이는 문득 검푸른 두만강물결의 희끗희끗한 물갈기가 눈앞에 떠오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박현숙의 눈에서도 무엇인가 번쩍거리는것이 보였다.

《다시… 대동강!》

《대동강!》

《다시… 대동강!》

《대동강!》

어린이들은 머리들을 흔들며 더 높이, 더 우렁차게 부르짖었다. 그 피타는 부르짖음소리에 교실이 떠나가는듯 하였다.

《여기서는 조국의 넋을 불러일으키고있습니다.…》

보금이는 이런 속삭임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았다. 전수원면장이 얼굴을 수굿하고 팔소매끝으로 눈굽을 찍어내고있었다.

그의 곁에 선 한설봉로인은 자랑이 넘치는 눈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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