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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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반산뒤의 고개길에서는 장룡산중대장과 김창억, 마동호를 비롯한 여러명의 대원들이 맥을 놓고 앉아 다리쉼을 하고있었다. 그들은 지난밤 산속을 누비며 왕청쪽으로 나가 권일균의 종적을 찾아 밤새껏 돌아다니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길이다. 모두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분격이 치밀어올라 눈에 피발이 섰다. 그들은 땀을 어찌나 흘렸던지 얼굴이며 목에는 소금발이 내돋고 신발이며 바지가랭이는 흙투성이가 되였다. 말들이 없었다. 배신자를 저주하며 터져올랐던 증오만이 아직도 잦아들지 못하여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바람이 선들거리는 나무그늘밑에 앉아있었지만 누구 하나 시원한줄을 몰랐다. 그들은 번열이 나는듯 목단추를 끌러놓기도 하고 모자로 부채질을 하기도 하였다.
장룡산중대장은 무슨 생각에 골똘하고있는지 새잎을 잘근잘근 씹으며 풀밭속의 한점을 쏘아보고있었다. 마동호는 방향을 잘못 잡고 추격하였기때문에 권가놈을 놓쳤다고 분해하는가 하면 그놈과 회계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하면서 씨근거렸다.
장룡산중대장옆에 앉아있는 창억이는 두무릎사이에 세워짚은 총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은채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놈과의 회계로 말하면 자기만큼 계산할것이 많은 사람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놈의 좌경로선바람에 5. 30폭동때 두 형이 값없이 죽고 자기가 유격대에도 입대 못하고 수모를 당한 일이며 안해가 겪은 고생이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속을 태우던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따위놈을 대단하게 여기고 마철까지 신겨온 일을 생각하면 이거야 정말…》 하고 창억은 혼자소리로 뇌까리며 분을 이기지 못해 씨근거렸다.
그러자 장룡산이 입귀에 물었던 새잎을 내뱉어버렸다.
《나야 동무네 정도겠소. 왕청유격대 중대장이라는게 혁명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다나니 쏘베트바람에 일이 잘못되는걸 뻔히 보면서도 어쩌지
못했다니까. 참 기막혀서…
문득 아래쪽에서 녀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창억이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고개길로 최형준이와 박현숙이 가지런히 걸어올라왔다. 최형준은 밤색양복저고리를 벗어 어깨에 걸치였고 흰저고리에 검정치마를 받쳐입은 박현숙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걸어오다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게 최형준강사가 아니야? 젠장, 기분이 좋은데? 저 사람은 권가놈밑에서 오래 일했으니까 뭣을 좀 알지 몰라.》
그들이 가까이로 오자 창억이 먼저 움쭉 일어섰다. 그런데 장룡산이 무엇을 느꼈는지 그의 팔을 잡아끌어 주저앉히고는 자기가 최형준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장룡산은 옆구리아래에 드리운 목갑총을 뒤로 밀어놓으며 그를 반겨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둘이서 어디로 이렇게 재미나게 갔다오오?》
박현숙은 수집음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여 최형준에게서 두어걸음 물러서고 최형준이 좀 당황해진 얼굴로 대답하였다.
《저- 쌍암촌에 가서 아동단연예대를 조직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장룡산은 훈춘에서 국제당파견원을 사살한 박두남이 도망치자 권일균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권가놈이 가면 어디로 갈수 있는지 짐작이 가는데가 없는가고 물었다.
최형준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자기들은 전혀 모르고 쌍암촌을 떠났는데 권가가 어디로 갔겠는지도 짐작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홍병일동무는 모른답니까?》
《홍동무는 권가놈을 추격하다가 그놈 총에 부상당했소. 정신을 잃고 병원에 업혀갔소.》
《예?》
《좀 더 생각해봐주오.》
그리고 장룡산은 더 말없이 모두숨을 후- 내쉬고는 돌아서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자리에는 최형준이와 박현숙이만 남았다.
그들이 멀어지자 얼굴이 내내 해쓱해져 서있던 박현숙이 그 인상적인 눈을 크게 뜨고 최형준을 돌아보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최동무, 왜 그렇게 어정쩡하게 말해요. 도움을 받자고 묻는건데 왜 그래요?》
《모르오, 정말 모르오. 모르는걸 어떻게 말하오.》
최형준은 변명조로 말했다.
《그래도 여기서는 동무가 권가놈밑에서 제일 오래동안 일했는데 전혀 짐작이 안돼요?》
《글쎄 어디로 갔을가.》
《동무는 립장이 철저하지 못한게 아니야요?》
박현숙은 홱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였다.
최형준은 얼굴이 새까맣게 질려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두손을 내흔들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내 가슴에 못을 박지 마오. 그런게 아니요. 내 말을 좀 듣소. 최근시기 나는 그와 사이가 멀어졌댔소. 그가 리유없이 나를 미워하기때문에 서먹서먹하게 사이를 두고 지냈댔소. 그래서 그의 생활을 전혀 모르오. 정말이요. 동무야 날 잘 알지 않소!》
박현숙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옆을 바람처럼 지나 유격대원들이 사라진쪽으로 달려갔다.
최형준은 망연자실한듯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무가지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그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