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회)
제 5 장
10
(1)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비꼈다.
저아래 굽어보이는 마을에서는 집집의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그물그물 피여올랐다.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락맞게 들려왔다.
바지가랭이를 장딴지우에까지 걷어올리고
반성위는 처음에는 이전에
그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란 거의 없었다. 그는 큰배나무골의 유격대병원과 출판소, 무기수리소에도 들려보는가 하면 밭머리에서 마종삼농민과 오래동안 마주앉아있기도 했다.
성림은 그럴 때면 언제나 얼굴이 찌뿌둥해졌다.
성림은 좀처럼 웃는 일이 없고 근엄한 얼굴에 늘 심중한 빛을 띠고다니는 국제당파견원의 성미를 가늠할수 없었다. 그는 엄하고 까다로운 사람인것 같으면서도 아무데나 앉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품이나 변변치 못한 식사도 나무라는 기색이 없이 드는것을 보면 소탈한데도 있는 사람인것 같았다. 그와 먼길을 같이 다니기란 과연 재미없는 일이였다. 이때까지 지내보면 누구나 단둘이 길에 나서면 길동무와 지나간 생활이야기랑 하면서 흥겹게 먼길을 걸어가는것이 상례인데 이 사람은 국제당에서 사업하고 견문도 넓어 할 이야기랑 많겠으나 거의 말이 없었다. 단지 쉰다든가 쉬다가 떠날 때에는 어김없이 성림의 의사를 묻는것이였다. 성림은 이 사람이 신변호위를 위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다니는 자기를 거의 무시하고있지 않는가싶어 속에 은근한 불만이 찼다. 성림은 그것이 자기에 대한 무시이라면 흘려버릴수도 있겠지만 근거지의 현실에 대한 그 어떤 감정이 비쳐진것이 아닌가 하여 마음을 더 쓰게 되였다.
전령병은 그를 따라 멀고 가까운 길을 수없이 걸어다니면서도 가파로운 고개길도 단숨에 넘는 국제당파견원이라는 이 사람의 눈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뜨거운것인지 찬것인지도 가늠할수 없었다.
그런데 근거지에는 누가 어떤 심보에서 꾸며낸것인지 국제당파견원이 유격근거지의 여러곳을 참관하는것을 그 무슨 《순시》로 묘사하는 헛소리들과 황당한 소문들이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수군수군 귀속말로 이야기하였다.
국제당파견원이 근거지의 현실을 돌아보고 매우 분격하였는데 이제는 그 감정을 돌려세울 가능성이 없다는것이였다. 리성림에게 이것이 사실이냐고 조용히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성림은 분해서 그런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하였으나 제 혼자의 힘으로는 이런 소문을 도저히 막아낼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봄빛이 짙어가는 근거지의 푸른 하늘밑에 험악하고 불길한 공기가 떠도는듯싶었다.
권일균이 언제인가 국제당파견원의 생명을 구원해준 은인이라는 말도 떠돌았다. 어느날 아침 권일균이 구정부앞에서 그를 만나 여러 사람들이 보는데서 자네 아침을 먹었나 하고 인사하는것을 본 사람들도 있다는것이다. 그런가 하면 홍병일의 《억울한 사연》을 다 듣고난 국제당파견원이 그를 로씨야식으로 포옹하며 국제당의 지지가 있으니 용기를 내라고 고무해주었다는것이다.
국제당에서 이랬다, 국제당에서 저랬다는 말가운데서 두드러지는것은 유격대의 국내진출에 관한 평가였다. 유격대가 왕재산에까지 나간것은 혁명의 국제적의무를 소홀히 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군사행동으로서 국제당의 분격을 샀다는것이였다. 이러한 소문의 파도속에서 분여받은 땅을 도로 떼울가봐 불안해하는 농민들이 한명 두명 생겨났다. 권일균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에없이 부드럽게 대하였으며 입가에 노상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다녔다.
홍병일이 전에없이 자위대원들에게 우스개소리까지 하게쯤 된것으로 보아 떠돌고있는 풍설이 사실인것 같다고 하면서 걱정에 잠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배포유하게 생각하는 축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는것이였다.
(전에야 종파쟁이들이 국제당을 먼저 업으려고 감자도장이랑 새겨가지고 뛰여갔지만 지금은 어떤가! 허, 국제당에서 우리를 찾아왔거던. 일이 이쯤 된걸 보면 우리가 세계혁명을 들썩하게 해놓은게 분명해.…)
리성림은 떠도는 소문이며 그에 따르는 착잡한 반영에 대하여
그러나
그리하여 리성림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처럼 얼굴이 시무룩해졌으나 자기 임무를 철저히 집행하여 길안내도 잘하고 그의 방에 찬물도 떠가고 젖은 신발도 말려주군 하였다.
어느날 산속 오솔길을 따라 마촌으로 돌아올 때였다. 땅에서 화끈화끈한 지열이 풍겨올랐다. 둘은 잔등이 땀에 척척히 젖었다. 양복저고리를 벗어 한팔에 건 국제당파견원은 성림에게 고향은 어디며 부모님들 생각은 나지 않는가, 배고프지는 않는가고 물었다.
성림이는 그만 속에서 불길같은것이 터져올랐으나 그의 위엄에 눌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외면해버렸다.
(당신은 어디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따져봐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우리가 피땀을 뿌리며 근거지를 꾸려놓은 다음 이제와서 무얼 따진단 말입니까? 당신도 조선사람인가요? 조선사람의 량심이 있어요? 내가 배고프다면 어쩔텐가요?)
반성위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돌아보다가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만져주었다.
성림은 머리가 뗑해졌다.
그날 밤 반성위는
반성위는 한방에서
반성위는 아침이면
그는
이 상쾌한 저녁에도 그는 명상에 잠기신
그는 한동안 망설이던 끝에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
《아니, 왜 갑자기 그런걸 물어볼 생각이 들었습니까?》
《저는
《아- 참, 우리는 만나자부터 오늘까지 내내 혁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군요. 이렇게 풀밭에 척 누우면 서정적인 생각이랑 하고싶은 때가 간혹 있지요. 그러나 어디 그런 여유가 있습니까.…》
《제가 듣기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녀동무들이 있었습니다. 길림과 카륜… 할빈으로 가는 기차안에서도 녀성들의 도움을 받았지요. 정말 어려운 위기에서 나를 도와줬습니다. 나는 한평생 그들을 잊지 못할것입니다.… 나한테는 누이가 없었습니다. 우리 삼형제뿐이였으니까요. 아버지와 삼촌… 이렇게 남자들판인 가정에 녀성이라고는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녀성들의 수고와 미덕에 대하여 알게 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혁명사업을 깊이 리해하고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죽을 고생을 다하면서도 묵묵히 참아가시며 아버지의 혁명사업을 뒤받침해주시였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가 이런 진지한 대답을 들은 반성위는 다소 당황해진 얼굴로 자기 심중을 털어놓았다.
《저는 해외에 있으면서 여기 근거지생활에 대해 아주 편협하게 생각하고있었습니다. 전투와 류혈이 계속되는 간고한 나날이 흐르고있는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새로운 혁명적인 문화, 새로운 혁명적인 생활양식이 창조되고있습니다. 그리고 청춘남녀들의 사랑도 꽃피여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여기에서 창조되고있는 모든 새로운것들처럼 이 사랑도 새로운 륜리에 기초하고있을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습니까? 허허허…》
《저는 오늘 낮에 십리평마을에 들렸다가 거기서 여러쌍의 신혼부부들이 자기들이 분여받은 밭에 서서 결혼사진을 찍는것을 봤습니다. 결혼사진은 흔히 자기들이 살 집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하고 찍는게 상례인데 그들은 혁명이 자기들에게 준 밭에 서서 찍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새로운 식이 아닙니까.
그들의 사랑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동무들사이에 서로 의견도 나누고 조언도 주었을게고 그러느라면… 사랑이란 선택적인 감정인것만큼… 거기에 그 어떤 기준이 있었을게 아닙니까. 그게 무엇이였을가 하고 저는 오늘 내내 생각했습니다.》
《너무 까다롭게 생각한게 아닙니까?》
《제가요?》
《허허… 무슨 특별한 기준이 있겠습니까. 그저 마음들이 맞아서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게 됐겠지요.… 우리 동무들사이에 이따금 그런 문제를 놓고 심각한 론의들이 있는건 사실입니다. 나는 우리 한 동무가 그런 문제를 두고 자기 동무에게 조언을 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동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녀성의 용모도 중요하지만 마음씨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혁명가들인것만큼 호상 사상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 필요하다. 남자의 혁명사업을 깊이 리해하고 헌신적으로 도울수 있는가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다음에 용모도 보고 개성을 보라. 리상적이기는 남자의 개성을 깊이 알고 존중하면서도 그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의 독자적인 개성을 영원히 간직하면서 새것을 부단히 창조해내는 정신력… 만약 이런 정신력의 녀성이 못되면 상대에게 없는것을 보태여주고 만들어야 한다. 사랑도 소비가 아니라 창조라는 립장에 서서 한떨기의 꽃을 가꾸어주는 심정으로 열정을 다 바쳐 가꾸어주면 어떤 녀성이나 아름답게 피여날것이다! 어떻습니까? 나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성위는 눈에 물기를 번쩍거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 견해에 나같은 목석도 다 취해버리는것 같습니다, 허허허.…》
하늘도 행복에 겨워 홍조를 띠는듯 연한 장미빛으로 물들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