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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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금이 돌아온 이튿날은 일요일인데다가 아침부터 날씨 또한 여느때없이 화창하였다.
해빛이 쨋쨋하게 비쳐드는 사령부마당에서는 기름기 자르르한 밤빛털의 군마 두필이 싸움이라도 걸어보는듯 서로 노려보며 상대를 주둥이로 툭툭 건드리면서 발을 옮겨딛고있었다.
지붕우에 드리운 나무가지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방문에서는
《동무들은 이제부터 십리평으로 가서 최춘국동무를 만나시오. 알겠소? 거기에 석현쪽에서 들어온 사진사가 있소. 둘이 함께 사진을 찍어 석장을 깨우되 한장은 나한테 갖다주오. 시간이 급한만큼 밖에 있는 저 말을 타고가오. 알겠소?》
《한가지 문의해도 좋습니까?》
《뭐요?》
《사진은… 공작상 필요겠지요?》
《갔다오면 구체적으로 말해주겠소!》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이 시뻘겋게 된 김중권이 달려나와 말에 날아올랐다.
뒤따라 얼굴이 앵두빛으로 물들여진 림성실이 나와 말고삐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김중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질풍같이 몰아 십리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오르더니 말에서 뛰여내렸다.
그는 말은 풀을 뜯어먹게 내팽개치고 너럭바위옆을 성급히 왔다갔다하며 손에 쥔 회초리를 뚝뚝 꺾어버리고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얼마후에 림성실이 탄 말이 달려올라와 흙먼지구름을 풀썩 일으키며 돌아섰다. 림성실이 말에서 서툴게 내렸다.
김중권은 불꽃이 펑끗거리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다가섰다.
《이게 어떻게 된게요? 어떻게 알게 됐소? 어떻게 다 알게 됐는가 말이요? 눈물을 보이구 한숨을 내쉬구 했겠지? 녀자들이란…》
림성실은 아래입술을 깨물고 질풍에 헝클어져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눈이 또릿해서 그를 치떠봤다.
《나때문이 아니예요, 동무때문이예요. 나만 있으면 공연히 별스럽게 뚝뚝해지구… 찾아다니구 하니까 왜 모르시겠어요?》
《내가 언제 찾아다녔단 말이요?》
《그럼 왜 자주 만나게 돼요?》
《사업이 그렇게 만드는게지 내때문인가?》
《난 애당초 동무 억지가 리해되지 않았어요. 이게 뭐야요. 동지들을 속이구
그 웃음소리에 화가 동하는듯 김중권은 얼굴빛이 시꺼멓게 되면서 담배만 성급히 뻑뻑 빨았다. 그의 입과 코구멍에서 담배연기가 훅훅 뿜어나왔다.
림성실은 손을 저어 자기 얼굴쪽으로 밀려드는 담배연기를 쫓아버리고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좀 담배를 작작 피워요! 몸에도 해롭다는데 그 쓰거운 연기가 그리도 좋은가요?》
《남자들이 다 피우는 담배연기에 짜증을 낼게 있소? 담배냄새가 그렇게 싫으면 허- 사진두 댓걸음 떨어져 찍어야겠군, 허허허.…》
김중권은 담배꽁초를 풀밭에 내던지고는 말이 있는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림성실은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여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탄 말은 고개길을 내려 버덩에 들어섰다. 둘사이에는 언쟁이 더 없었다. 그렇다고 살뜰한 말이 오가는것도 아니였다.
김중권은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뚜벅뚜벅 몰아갔다. 림성실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말은 탐스러운 밤빛꼬리를 드문드문 휘저어 윙윙거리는 등에를 쫓으면서 가락맞게 발굽을 옮겨갔다.
머리우에는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이 비꼈다. 산기슭을 따라 우불구불 흘러내리는 대왕청하의 은빛흐름이 시원한 선기를 대기속에 풍기였다. 말발굽밑에서 먼지가 풀싹풀싹 일었다. 길옆의 풀숲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와 향긋한 꽃향기가 확확 가슴에 안겨들며 삶의 환희를 불러일으켰다.
림성실은 머리칼을 쓸어만져 단정하게 다듬고 창공을 나는 새떼들을 쳐다보다가 눈길을 아래로 내려 김중권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말을 뚜벅뚜벅 몰아가는 그의 잔등에는 땀이 내배였다.
림성실은 그 떡판같은 잔등에 얼굴이라도 대보고싶은 충동에 말을 내몰아 가지런히 섰다.
그리고는 해빛이 가득 넘치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저 꽃들 좀 봐요. 아, 참 좋지요?… 우리 근거지가 이렇게 아름다워보긴 처음이예요. 남자들은 사시절중에서 어느 계절이 제일 좋아요? 여름인가요, 겨울인가요? 나는 봄이 제일 좋아요. 여름도 좋구요.…》
김중권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근엄한 얼굴로 앞쪽만 내다보았다.
그래도 림성실은 그 뚝배기성미가 오히려 재미나고 우습다는듯 시원하고 아름다운 눈에 어리광부리는듯 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계속했다.
《성이 났어요? 그러지 말고 노래라도 부르자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좀 생각해봐요. 후담에 이 길이 아주 의의깊은 길로 남을지 알아요? 30년 아니면 50년후이면… 그때는 조국이 광복된지도 오랠게고 공산주의사회가 될텐데… 혁명이 끓어번지던 오늘을 추억하면 감회도 얼마나 깊겠어요! 노래를 부르자요. 조용조용… 무슨 노래가 좋아요? 아무거나… 하나… 둘… 셋…》
김중권이 얼굴을 돌렸다. 그의 구리빛얼굴에 시무룩한 미소가 어렸다.
《좌우간 참, 좋아는 한다… 그렇게 좋소?… 아까 고개길에서 대들 때는 내 참 기막혀서… 그래가지구 부녀회원들은 어떻게 교양할가?》
《우리 부녀회원들이 안 봤으니 그렇지 봤다면 다 내편이지요.… 어떤 녀자나 남들이 있는데서는 얌전한체 하다가도 자기 사람앞에서는 제나름으로 어리광도 부리고 캐득거리기도 한대요.》
림성실은 이렇게 말해놓고는 제스스로도 우습다는듯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맑은 목청으로 웃었다.
《호호호…》
김중권은 몸을 뒤로 젖힐사 하고 한쪽볼편을 떨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허… 우리가 어리석었지.
《우리가 늘 헤여져있다고 모처럼 마련해주신 기횐데 좀 찌뿌둥해서 그러지 말자요. 우리한테 이런 길이 몇번이나 차례지겠어요. 이 길이 빨리 지나가는게 아깝지 않아요? 내려서 좀 천천히 걷자요.》
림성실은 말에서 뛰여내려 김중권의 말고삐를 잡았다.
《내리자요!》
《어찌자는게요?》
《걷자요.》
《헛참, 동무는 대단하오.》
김중권은 말에서 껑충 뛰여내렸다.
그들은 말고삐를 잡고 가지런히 걸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이며 옷자락을 날렸다.
림성실이 그를 돌아보며 밝게 웃었다.
《좋지요?》
《자, 노래를 부를가?》
《무슨 노래가 제일 좋아요? 제일 좋은걸로 골라 부르자요.》
《〈적기가〉… 〈적기가〉가 제일이지.》
그들은 말고삐를 잡고 걸으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민중의 기 붉은기는
…
림성실은 얼굴빛이 환해져서 빛나는 눈으로 저 멀리 하늘가에 떠있는 흰눈같은 송이구름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노래의 박자에 맞춰 가슴앞에서 주먹을 약간약간 흔들었다.
김중권은 얼굴빛이 점점 근엄해지며 턱을 끌어들일사 하고 노래를 불렀다. 림성실의 맑고 은근한 목소리와 김중권의 묵직하고 구성진 목소리가 점점 조화롭게 어울려지면서 발걸음이 저절로 맞춰졌다.
말들도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듯 시꺼먼 눈을 슴벅거리며 따라왔다.
높이 들어라 붉은기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갑자기 김중권의 손이 림성실의 팔굽을 으스러지게 콱 틀어잡는다. 림성실은 순간 화기에 휩싸이는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김중권의 눈에 열기같은것이 번쩍거린다.
림성실은 행복감이라기보다도 설음같은것이 북받쳐올라 목이 꽉 메였다. 노래소리가 기여들어갔다. 그러나 김중권은 목까지 벌겋게 되여 다음소절을 계속 이어 부른다.
비겁한자야 갈라면 가라
…
그들이 산굽이를 돌아서니 길옆에 꽃들이 하얗게 피였다. 정갈하게 흰 꽃송이들은 그들을 반겨 설레이는듯 바람결에 한들한들거리며 향기를 물씬물씬 풍겼다.
림성실은 그 꽃들로 말들을 장식해주고싶은 천진한 욕망에 이끌려 말고삐를 김중권에게 맡기고는 길옆으로 달려나가 호함진 꽃송이들을 가슴가득 그러안았다. 큰것부터 골라서 꽃을 한송이, 두송이 정신없이 꺾던 그는 무심결에 대왕청하 건너편의 숲속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구부정한채 굳어지고말았다. 그쪽의 키높은 은백양나무 그늘밑에서 박현숙이와 최형준이를 보았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