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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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뒤 오판단이 엿장사로 가장하고 온성으로 나가 전장원에게 전면장과 주영백에 대한 공작을 신중하게 잘할데 대한 장군님의 지시와 국내동포들에게 보내는 격문묶음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보금이를 데려왔다.

보금이 가슴을 울렁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옛 생활의 보금자리인 자그마한 귀틀집은 저녁어스름속에 호젓하게 묻혀있었다.

그는 뜨락에 들어섰으나 기척을 내기 저어하며 쭈밋거렸다.

집뜨락은 깨끗이 쓸어졌고 문들에도 새 문창호지들을 산뜻하게 발랐다. 옛생활의 묵은 때라고는 처마밑의 어둑한 그늘속에서만 간신히 느껴졌다.

굴뚝쪽에서 허씨가 나오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손에 들었던 바가지를 떨구었다.

허씨는 달려와서 매달리듯이 손을 덥석 잡았다.

《에그, 고마와라!》

그리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외로 돌리며 치마자락을 눈에 가져갔다.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두 사는것 같지 않더라.》

허씨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떨렸다.

보금이는 너무도 엄청난 감격에 얼굴이 해쓱해지고 눈굽이 말라들었다. 그는 목에 단 재가 꽉 차는것 같으면서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저 시어머니의 손등을 자꾸 쓸어만질뿐이였다.

《이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자. 이게 어디 남의 집이냐? 저 사람도 와있다!》

허씨는 갑자기 활달해져서 보금의 등을 안으로 떠밀어주고는 자기는 무슨 볼일이 있는지 밖으로 달려나갔다.

정지간에 들어가니 창억이 부엌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뽑느라고 끙끙 안깐힘을 쓰고있었다.

그는 문턱을 넘어서는 보금이를 쳐다보더니 아침에 헤여졌다가 만나는 사람을 대하듯 흔연한 얼굴로 벙글거리며 엉뚱한 말을 건네였다.

《젠장, 팔자에 없는 축구를 차보라고 해서 감발을 잔뜩 감구 신었더니 이거야 어디 빠져야지.》

보금이는 얼른 그의 앞에 마주앉아 저고리고름을 어깨우에 던지고는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창억이는 손을 더럽히지 말고 구들에 올라가라고 이르며 내외라도 하는듯 돌아앉았다. 보금이 따라 돌아앉으며 굳이 도우려고들자 그는 못이기는척 하고 신발을 내맡겼다.

창억이는 몸을 뒤로 젖히고 안깐힘을 쓰며 발끝을 옴지락거리고 보금이는 신발을 자기 가슴앞으로 힘껏 잡아끌었다.

《조심조심… 챠, 이거… 그렇지, 좀 세게… 찢어지지 않게. 이래뵈두 안 다닌데 없는 신발이요. 자, 하나… 둘… 서잇!》

보금이는 슬며시 힘을 주며 신발을 가슴앞으로 잡아당겼다. 신발이 쑥 빠졌다.

그 바람에 창억이는 뒤로 벌렁 넘어지고 보금이는 풍덩 주저앉았다. 둘이 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올랐다. 그렇게 웃으니 둘사이에 맺혔던 원망이며 지난날의 괴로움이 일순에 가셔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듯이 가슴이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마주보며 또 웃었다. 보금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얼른 일어나 손등으로 볼을 훔치며 물드무로 달려가서 함지에 물을 퍼담아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물함지를 퇴마루에 내려놓고 신발을 물에 헤우기 시작했다. 그립고그리웠던 시집의 시원한 물냄새며 신발에서 풍겨오르는 남편의 땀냄새에 가슴이 뻐근하도록 벅차올랐다.

허씨가 뜨락에 들어서다말고 놀라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달려와서 스스럼없이 잔등을 철썩 때리며 오자마자 손을 적시느냐고 나무라면서 함지를 앗아 퇴마루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며느리의 손을 자기 치마자락으로 알뜰살뜰 닦아주고는 안아옮기다싶이 방안으로 끌고들어갔다.

 

×

 

그날 밤 김진세는 웃방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내주고 처음으로 정지간으로 내려와 일찌기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가마목에 누운 로친은 인차 코를 골았으나 그는 잠이 오지 않았다.

웃방에 젊은것들을 가지런히 눕혀놓고보니 이제는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며 어둠속에서 자꾸 눈굽이 저려올라 눈을 슴벅거리게 되였다. 그때마다 불찌처럼 따가운것이 귀안으로 굴러떨어졌다.

자기의 한생이 눈앞으로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어둠속을 쳐다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아, 내 신세가 어쩌문 이렇게 훤해졌는가… 마촌에 장군님을 모시지 않았더라면 생각이나 할수 있는 일인가!)

웃방의 젊은것들은 밤이 깊도록 목소리를 죽여가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던것이 이제는 아래방에서 다 깊은 잠에 든줄로 알고 마음놓고 말을 주고받았다.

김진세는 그것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드문드문 엉뚱한 소리들이 들려와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었다.

《연극이요?》

《헐하지 않아.…》

《그래요?》

《나는 헌병이나 순사… 이러루한것만 맡는데 차라리 머슴같은걸 시켰으면 좋지 않겠소.》

《을러메는데야 당신이상이 있겠어요? 호호호.…》

《무대에서 뺨이나 잔등을 후려치고나면 이튿날 그 동무 보기가 딱하단 말이야.》

《진짜 아프게 때리나요?》

《그렇게 해야 좋다는데야 어떻게 하겠소, 허허.…》

(원 녀석두, 쓸 소리 한마디 못해주는군.…)

김진세는 아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모로 돌아누워 하불을 머리우에까지 푹 뒤집어썼다가 그만 잠이 들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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