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 회)
제 5 장
3
(1)
전장원은 김중권이 몹시 기다려졌다. 농민협회와 학교일로 분주히 뛰여다니는 그에게는 주영백이네 운송점문제를 비롯하여 유익한 조언과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싶은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리고 읍주재소와 풍인동경찰관출장소 경관놈들의 통행단속과 수색만행은 날마다 심해졌다. 하루에 두번만 같은 길로 다녀도 뺨을 맞으며 문초를 당해야 하였다.
공작조건은 나날이 어려워져갔으나 김중권이로부터는 소식이 감감하였다.
그날밤도 야학을 필한 장원은 지친 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오며 김중권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근거지로 들어가자마자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에서 이슬을 머금은 당콩잎들이 번들거리고있었다.
그가 자기 집 마당에 들어서니 불빛이 환한 방문에 웬 사람의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방안에서는 말소리가 융융 흘러나왔다. 아마 자기 생활을 돌봐주고있는 보금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다.
(왔구나, 드디여 왔구나!)
장원은 기쁨에 넘쳐 달려들어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방안에는 김중권이나 근거지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라 사촌형 전수원이 앉아있었다.
장원은 그에게 건성으로 눈인사를 하고는 화김에 책보를 구석쪽의 책상에 던졌다.
전면장은 그의 거치른 행동에는 아랑곳없이 절충과 타협, 합심까지를 구걸하는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며 좀 앉으라고 하였다.
형제는 오래간만에 마주앉았다.
보금의 어머니는 구정물을 버리고 들어와서 가마목을 대충 거둬놓고는 간다는 말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면장은 마른기침을 몇번 톺아올리다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깎이웠으며 턱에 수염이 꺼칠했다. 움푹 패여들어간 푸릿한 눈확언저리에는 심각한 번뇌의 그늘이 비꼈다.
그는 비감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떼였다.
《너 선친들의 분묘에는 언제 갔다왔느냐?》
《가본지 오래 되오.》
《내 일전에 올라가보니 조부님 묘는 말이 아니더라. 풀이 무성하구 메돼지가 제돌밑을 뚜져놔서 자손들이 있는 묘같지 않더라. 별게 후레자식이냐? 우리같은것들이지.》
《형님은 그 일때문에 왔소?》
《그 일도 그 일이고…》 그는 긴숨을 내쉬였다.
《윤치석댁에서 네 생활을 돌봐주는 모양인데 형구실을 못하는 나로서는 할말이 없구나. 홀아비로 남의 신세를 너무 오래지면 소문도 좋지 못하게 나는 법이라더라.》
《어떤 자식이 뭐라고 합디까?》
《됐다, 됐어. 내가 그저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다. 그건 그렇구, 내 처지가 요새 떳떳치 못하다. 나는 형제지간에 마주앉아 신중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왔다. 일본사람들은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용공분자로… 나를 감시한다던 네 말이 옳은것 같다. 나는 아마 무사치 못할게다.》
장원은 머리를 수굿하고 듣기만 하였다.
전수원은 도에서 경무부장이 내려왔던 이야기부터 자기가 요새 겪고있는 심적고통을 죄다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내 면장자리를 노려온 서완오놈의 작간때문에 저 사람들이 나를 더 의심하는것 같다. 그들은 너를 공산분자로 가정해놓고 내가 너와의 친척관계에 말려들어 용공을 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면에서 어느 누구가 왕재산사건을 책임지고 목이 잘려야 이 소동이 가라앉는다. 서로 살아나기 위해 책임을 남에게 들씌우자고 으르렁거리는 판인데 이 면에서 제일 문문한게 아마 이 전면장인 모양이다.》
그리고는 이런 때에 형제지간의 의리가 필요하다고 하며 네가 좀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내 립장을 생각하여 야학을 그만두어달라고 하였다.
《나는 네가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고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숙을 열고 야학까지 굳이 한다는것자체가… 아무 보수도 없이 사람들을 가르친다는게 벌써 수상쩍은 일이란 말이다. 의심을 받을 근거다. 너에 대한 의심은 곧 나를… 나를 위협한다.
아, 나한테는, 내 주변에는 맨 혐의를 받을것들뿐이구나! 그만두어다구. 너한테 형제지간의 정이나 의리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를 생각해서 그만두어라. 이제는 누구나 잡아서 제물로 바쳐야 안정이 온다. 모두 승냥이처럼 으르렁댄다. 느침을 흘리면서. 아- 죽일 놈들, 너때문에 나를 노려보고있다.》
《형님, 내 말을 듣소.》
전장원은 부르쥔 주먹을 무릎에 얹고는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며 쓰거운 웃음을 입가에 그리였다.
《나는 형님의 그 꼴을 차마 못보겠소. 떨기는 무얼 떠우? 세상사람들의 태반이 제 뼈를 놀려 벌어먹으면서 얼씨구 좋다 하고 사는 판인데 그까짓 면장자리 내팡가치오.》
이 말에 모욕을 느낀 전수원은 분통이 터져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야, 장원이 ! 나는… 나는…》
그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무릎을 부들부들 떨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나는… 네가 어려울 때 흰소리 한마디 치지 않았다! 동흥중학에 시험을 치고 입학금이 없다구 손을 내밀 때도 외투를 팔아 푼푼히 줴줬다. 이십리나 되는 소학교를 다닐 때 대소한추위에 발이 얼구 귀가 얼가봐 귀걸개, 목도리 다 벗어주구 업구 다닌게 누구냐. 그런데… 네가… 오늘은 내 가슴에 수모를 들씌우느냐? 대못을 치느냐?》
장원은 형이 자기의 가긍했던 어린시절의 일들을 린색한 빚군처럼 모조리 들추어내자 입안에 열물이 돌아 얼굴을 험하게 이그러뜨렸다.
《그만두시오! 나는 형님같은 사람의 신세를 진 일이 지금은 부끄럽소. 수치스럽단 말이요!》
전수원은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툭 꺾어지는것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떨구면서 두팔을 맥없이 늘어뜨렸다.
《아하, 의절이구나! 피줄이 이렇게 끊어지는구나!》
전면장은 소리없이 흐느꼈다.
장원은 자기가 너무 지나쳤다는 가책에 형을 빤히 건너다보다가 숙어지는 이마에 손을 고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