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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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원은 너무도 기막혀 찾아오게 된 사연을 밝히지 못하고있다가 얼결에 이런 말을 하였다.

《주선생의 달필을 빌어 우리 서숙에 남부끄럽지 않은 간판을 붙였는데도 아직까지 사례도 못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허, 이런 소리 걷어치우오, 지우간에…》

주영백은 세속적인 화제는 옆으로 밀어놓자는듯이 둘사이에 놓였던 잎담배바가지를 무릎옆에 옮겨놓고 탐구열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의 눈을 곧바로 들여다보았다.

《들었소? 소식을 들었소? 저 근거지에서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다 내줬다는구만!》

《예… 나도 들었습니다.》

《이게야 헛소문이 아니겠지?》

《글쎄요. 근거가 없이야 어찌 그런 소문이 돌겠습니까.》

《옳소, 내 지난 가을에는 거기서 하도 험한 소식이 흘러나와 아닌게아니라 실망을 했다니까. 거기서 레닌이나 스웨르드로브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젠장, 한번 찾아들어가 론전을 벌려볼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소. 가야 재야론객인 내따위를 받아주기나 하겠소. 그래서 속만 푹푹 썩이고 앉아있었는데 올봄에 들어서면서는 혁명정부를 세운다. 토지를 분여한다, 김일성장군이 저 왕재산에 구름을 타고왔다 갔다, 이런 풍설이 들려오는걸 봐서 세상에 큰 변화가 생긴게 분명하오. 그렇지 않소? 어떻게 생각하오?》

《그런것 같습니다.》

《거기 풍인동에서는 무슨 새 소식을 못 들었소?》

《저도 김일성장군이 왕재산에 나왔다 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전체 인민이 하나로 뭉쳐 왜놈들을 반대하여 일어나야 한다고 하시며 특히 근거지와 제일 가까운 여기 온성인민들은 유격근거지를 적극 도와야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그것 보오. 확실히 세상에는 큰 변혁이 일어났단 말이요! 한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요. 다 망해버린 운송점을 붙잡고 서완오놈한테 쥐여서 꿍꿍 앓으면서 이게 무슨 꼴인가 말이요, 에익!》

당파적으로는 무소속이나 리념상으로는 새 사조의 일선바리케드에 엎드려있다고 늘 자처하는 이 위인은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화김에 주먹으로 제 머리를 쥐여박았다.

전장원은 그의 이런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오르는 한편 여러가지 의혹이 들었다.

《주선생… 이렇게 자리를 같이할 때마다 늘 한가지 의문이 드는데 그걸 물어본다고 노여워하지 않겠는지요?…》

주영백은 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와 관련된 문제요?》

《예.…》

《?…》

《모욕이 될것 같아서 묻는걸 삼가해왔지요.》

《물어보시오!》

주영백은 자세를 바로가지며 심판을 받는 사람의 엄숙하고 긴장한 얼굴이 되여 의지가 든든한 눈빛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전장원은 물었다.

《선생은 주의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크면서도 어째서 여태까지 단 한번도 행동으로는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하지 않았습니까?》

주영백은 얼굴이 깎이는 치명적인 질문을 받은듯 대뜸 귀까지 뻘개지며 어색하고 서글픈 미소를 눈가에 그리였다.

그의 눈동자는 시선을 붙일데를 순식간에 잃은듯 영채없이 떨고만 있었다.

전장원은 그 얼굴을 차마 볼수 없어 눈을 내리떴다.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던진 하나의 물음이 그의 인간적존엄을 지탱하고있는 중추에 타격을 준것이 분명했다.

《그런 말은 묻지 말아주오, 다시는… 허- 사랑을 고백했다가 채운셈이라고나 할가, 허허허…》

호방한듯 하면서도 밑에 눈물이 고인 웃음소리이다.

《공산당재건위원회가 여기에까지 손을 뻗쳐온 일이 있었소. 은밀히 모장소에 찾아갔소.… 공작원이 나를 료해하더군. 살아온 경력이랑 집안형편이랑 다 털어놓았소. 순결과 랑만을 안고 다 털어놓았소. 그 사람은 차차 얼굴색이 달라지더군. 마지막에 힘들게 한가지 건의를 하는데 재야론객으로 남아있으면 어떤가 하는게 아니겠소.… 가서 생각해보라구 해서 집에 돌아왔다가 이튿날 다시 찾아가보니 자리를 뜨고 없었소. 그때는 정말 하늘이 허물어져내리는것 같더군. 지금 생각해보면 나무람할수 없는 일이지.

가친은 자산가였겠다, 그 자식은 부르죠아지를 지향하여 아득바득거리는 중산계급의 기업가라… 어떻게 믿고 무산자정수분자들의 대렬에 끌어들이겠소. 나한테 검열된 직업적혁명가의 경력이 있으면 몰라도… 내가 엥겔스 절반만 한 거인이라도 계급적제한성을 넉근히 이겨낼게라고 그 사람도 말하더군. 내 열망에 그편에서도 안타까와서 하는 소리겠지.…》

《하- 그렇게 됐군요…》

《그 사람 말대로 재야론객이지… 허, 이건 내 숙명인것 같소. 세상에는 한 가인을 사모하다가 배척을 당하고도 그를 못잊어 한생을 짝사랑으로 덧없이 보낸끝에 손목 한번 잡아 못 보고 흙이 되였다는 괴짜도 있다지 않소.》

전장원은 웬일인지 눈굽이 저려나서 머리를 수굿하고 무심결에 바지가랭이의 실밥만 쥐여뜯었다.

부엌쪽에서 솥뚜껑소리가 들려왔다.

주영백은 허리를 쭉 펴며 중뿔난 소리를 한마디 던졌다.

《에-라, 이렇게 마주앉았는데 갈비안주에 한대포 있었으면 좋-겠다!… 전선생, 그래 그쪽 서숙에서는 일이 어떻게 돼가오?》

《그저 그러루합니다.》

《내 일은 개판이요! 내 일생은 헝클어지고 뒤죽박죽이 돼버렸단 말이요. 나는 도대체 누구요? 도대체 뭐요? 나는 자기 존재자체가 뭔지도 잘 모르겠단 말이요. 공산주의를 신봉한다면서 마부를 고용하며 기업을 하게 됐지. 그럼 내가 착취자인가? 서완오놈에게 착취와 멸시를 당하고있으니 그것도 아니란 말이요. 어느 당파에서도 받지 않으니 공산주의운동으로는 나갈수 없소. 공산당도 아니고 반동도 아니며 착취자도 아니고 피착취자도 아닌것이 나요. 그럼 자본가로 나갈수는 있는가? 보다싶이 내 기업이란건 이 꼴이 됐소. 요새는 서완오놈이 더 악착스럽게 구오. 말까지 끌어갔소. 그래서 손짐이나 나르자고 자전거를 수리하던 참이요. 서완오놈은 아버지대로부터의 빚을 못 물겠으면 머슴으로라도 들어오라고 탕탕 협박질이요. 개자식, 이런 모욕이 어디 있소?

전선생, 좀 말해주오. 내가 무엇을 지향해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야 하오?》

…보름달이 성글게 널린 구름속을 헤염쳐갔다. 달빛은 줄기차게 쏟아져내리다가도 캄캄하게 어두워지는가 하면 다시 희붐하게 밝아지면서 들판길을 어스레하게 비쳤다.

전장원은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아픈 가책에 가슴이 찢어져 무춤 서서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생로를 찾지 못하여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속이 열리는 시원한 소리 한마디 못하고 돌아오다니… 운송점이 파산되였기때문에 주영백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한것이 아니였던가? 아니다.

결코 그런것은 아니다. 그는 농민협회에 새 사람을 받아들일 때마다 하나하나 깊이 료해하고 검열해보았다. 그것은 조직의 규률이였다.

장원은 농민협회나 근거지의 도움을 받으면 파산에 이른 운송점을 구원하여 혁명에 유리하게 리용할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다. 문제는 주영백자신의 결심에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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