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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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스한 해볕밑에서 강물은 저쪽대안에까지 가득 가서 흐르며 뽀얀 김을 피워올렸다. 물결은 때로는 바람의 희롱질에 고르로운 잔파도를 일으키다가도 문득 검푸르러지며 희끗희끗한 물갈기를 날리면서 세차게 설레이며 처절썩 기슭을 들부신다. 쉬임없이 굼니는 물이랑우에서는 이따금 눈이 시도록 해빛이 번쩍번쩍 반사되는데 그럴 때마다 강물우로 번개불이 날아다니는것 같다.
두만강은 죽은 흐름이 아니다.
강물은 거창하게 숨쉬며 살아움직이면서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이고있다.
아, 저 흐름밑에서는 얼마나 크고 웅심깊은 기운이 꿈틀거리고있기에 저리도 힘차게 흐르며 설레이는것인가.
전장원은 생각깊은 눈으로 두만강의 흐름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강물을 욕심스럽게 퍼올려서 푸푸 물을 뿜으며 왁살스럽게 세면을 하고 머리를 씻어넘겼다. 그리고는 새로운 환희에 젖어 강물의 도도한 흐름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덧없는 세월처럼 무의미하게 흘러내리던 저 물결이 지금은 볼수록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인다. 순간순간의 흐름이 자기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보태주는듯 하고 물결의 주절대는 소리며 해빛의 번쩍거림도 모두 기쁜 소식들을 속삭이며 일깨워주는듯싶다. 그리고 이따금 해빛의 반사광이 물결을 가로질러 은빛금빛 찬란한 띠를 펼쳤는데 그 띠를 따라 근거지의 기운이 줄기차게 뻗어오르는듯이 느껴졌다.
전장원은 가슴이 벅차올라 마음속으로 한껏 소리쳤다.
《어-》
그는 이윽고 강뚝길에 올라서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읍쪽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전장원은 요즘 농민협회의 조직망을 확대하기 위하여 은밀한 활동을 벌리고있었다. 그는 조직에 빈농민들뿐아니라 군사정보수집과 유격근거지원호사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수 있는 인물들을 망라시키려고 애썼다.
그 첫째 대상이 동흥중학교 동창인 주영백이였다.
주영백은 우선 직업상관계로 많이 돌아다녀 견문이 넓은데다가 소식통이였다. 그리고 그가 경영하는 운송점을 통하여 근거지로 들여보낼 원호물자들을 모아들이고 물건너로 날라간다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들이 많을것이였다.
전장원은 읍거리가 가까와오고 목재소의 아츠러운 기계톱소리가 들려오자 문득 그가 이런 대낮에 집에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읍거리에 들어섰다. 지난날 큰 도시들을 많이 돌아다닌 장원이였으나 산골마을에 한달이상이나 배겨있다가 처음으로 사람들이 붐비는 읍거리에 들어서니 걸음조차 어줍어졌다.
이 국경의 읍거리는 내륙지방의 소도시들보다 이채로운 점이 많았다. 나라의 제일 구석진 곳이면서도 대륙을 향하여 가슴을 열어젖힌 이 아담한 읍은 동백꽃기름을 머리에 바른 수집고 청신한 시골처녀처럼 조선고유의 미와 향취를 짙게 풍기면서도 물건너 저 침침하고 황막한 광야가 보내온 지꿎은 호의의 흔적인듯 이모저모에서 대륙적인 색채가 번뜩이였다.
넓지 못한 거리의 량편에는 어깨를 비집고 들어선 초가집, 기와집, 양철집들이 빽빽이 늘어섰다. 거의 모든 집들의 지붕, 벽, 기둥들에 형형색색의 간판들이 나붙었다. 려관, 려인숙, 사진관, 은방, 양복점, 음식점, 술집… 창유리에 빨갛고 노랗고 파란 칠을 한 짜장면집의 간판에는 붉은 댕기가 펄럭이였다.
읍의 네거리에서 마주보이는 컴컴한 역사의 저쪽에서는 화물렬차가 들어왔는지 시꺼먼 석탄연기가 하늘을 더럽히며 물씬물씬 솟구쳐올랐다. 네거리를 좀 지나서 달맞이고개쪽으로 밋밋하게 올라간 자갈길의 량옆에 면의 통치기관들이 틀고앉아있다. 음침한 콩크리트건물인 경찰관주재소와 그옆에 같은 콩크리트건물로서 고동탑이 높이 솟은 소방대, 커다란 유리창문들이 유난히 번들거리는 면사무소, 목조의 세관사무소, 간소한 왜풍의 건축양식에 고지크식이 약간 더해진 거드름스러운 척식은행지구지점… 언제인가 서울에서 출장온 총독부재무국의 관리는 이 관청가의 집주제들은 촌멋쟁이 옷차림과 같다고 흉을 봤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장날이여서 거리에는
웃는 얼굴, 침울한 얼굴, 약이 오른 얼굴, 심드렁해진 얼굴… 이런 사람들의 물결속으로 고기집주인같은 작자가 따르릉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자전거를 몰아간다.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끌고가는 사나이, 네거리모퉁이에 사라지는 만주풍의 역마차, 웃고 떠들고 욕지거리를 퍼붓는 소리, 술취한자의 영탄에 젖은 타령소리, 은방집앞에서 안경알을 차겁게 번뜩이며 이곳저곳을 노려보는 순사놈… 은방집옆으로 꺾어들어간 골목어귀의 널바자에 《북선운송점》이라는 안내간판이 엇비스듬히 붙어있었다.
휑뎅그렁하게 비여있는 운송점마당에는 한산한 기운이 떠돌았다.
창고의 함석지붕에는 군데군데 녹이 벌겋게 쓸었다. 창고와 ㄱ자형으로 붙어있는 세칸짜리 빨간 기와집은 전에없이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무슨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집이 분명하였다.
재빛털의 개가 거슴츠레한 눈으로 외인을 흘겨보더니 입을 짝 벌려 하품을 하고는 일어나지도 않고 으르렁거렸다. 도적맞힐것도 지켜줄것도 없다는듯 한 개의 서글픈 그 모양이 운송집의 형편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전장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마당복판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용기를 내여 큰기침을 한번 떼고 주인을 찾았다.
굴뚝쪽에서 《누구요?-》 하는 느릿한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의 목소리였다.
주영백은 낡은 자전거를 엎어놓고 수리하는중이였다.
손과 팔, 얼굴에까지 기름검댕이칠을 한 그는 찾아들어온 손을 알아보자 강말라서 더 껑충해보이는 몸을 쭉 펴며 한손을 머리우에 높이 쳐들었다.
《허, 하늘이 허물어진들 벗이야 변할손가!》
두사람은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장원은
《자전거는 왜 수리하오?》 하고 장원은 그의 일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주영백은 허거픈 웃음을 웃었다.
《허허… 벌어먹자니 별수 있소. 이제는 신세가 이쯤 됐소.》
《무슨 일이 생겼소?》
《우리 아버지가 그전에 저 서완오놈의 자금을 융자해서 이 운송점을 열었댔는데 그 채무를 벗어던지지 못한채 별세하지 않았소. 열흘전에 서완오놈이 면주재소 순사인 아들 서기태놈까지 앞세우고 와서 빚을 내라고 땅땅 을러메다가 우리 명줄이 걸려있는 말을 끌고가서 이 모양이 됐소. 허…》
주영백은 그쯤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두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가 마주앉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영백은 가슴에 공허가 스며드는지 입을 쩝쩝 다시며 담배만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