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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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설피게 덮인 구름속으로 달이 헤염쳐가고있었다.

바람결에 와스스 설레이는 갈대들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대왕청하는 달빛에 어른어른하며 흐르다가도 때때로 차거운 빛발을 번쩍번쩍 반사하였다.

홍병일은 개털외투를 뒤집어쓰고 통나무에 걸터앉아 달빛이 부서지는 물결만 내려다보고있었다. 잠복초에 나온 다른 두 자위대원이 초소막안에서 쿨를 코를 골고있었다. 낮부터 웬 수상한 사람이 내물 저쪽 잡관목덤불속에 숨어서 이쪽을 자꾸 건너다보고있다는 통보를 인계받았으나 홍병일은 그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자기의 허무한 인생처럼 덧없이 흐르는 물결만 바라보았다.

그는 이 봄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한때는 자기를 범처럼 무서워했던 이 고장 인민들의 눈앞에서 반일자위대의 대렬에 서서 갈 때면 머리를 뚝 떨구지 않으면 먼산을 바라보며 외면을 해야 하였다. 그것이 죽기보다 더 괴로왔던것이다. 어떤 자위대원들은 복직되리라고 믿어서인지 어렵게 대하였지만 태반의 청년들은 막대하며 함부로 롱지거리를 걸었다.

《여, 홍동무, 엉치에 불이 달리겠소.》

《도끼질을 그렇게 하구두 밥술을 드오? 쳇, 이런 일을 못해본 모양이지?》

이러루한 롱지거리는 웃으며 받아넘길수 있었으나 권일균에 대한 감정만은 도무지 묵새길수 없었다. 자기를 피가 랑자하게 짓밟아 모든 책임과 징계의 굴레를 씌워버리고 솟아오른 권일균은 청년으로 둔갑을 하여 머리도 바투 깎고 혈색이 더 좋아져서 얼굴을 번들거리며 돌아다녔다. 그가 코트자락을 펄럭이며 토지개혁준비위원회로 드나드는것을 볼 때면 가슴에서 불길이 웅-웅- 소리를 치며 타오르는듯 하고 솔문을 세운다고 떠들썩하게 돌아치는 꼴을 보면 입안에 열물이 돌았다.

(칠면조같은 놈! 카멜레온같은 자식!)

바야흐로 꽃피여오는 봄때문인지 그는 이밤따라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여느때없이 탄식하게 되였다.

열아홉에 학생운동에 휘말려들었다가 감옥밥을 몇달 먹고나서 공산주의사조를 탄 그는 진취적인 성격과 과단성으로 하여 화요계의 중심인물이 되였다. 서른고개를 넘을 때에는 아시아에 두각을 나타낼 좌익정객이 되리라 야심도 만만했건만 지금은 한낱 자위대원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굴러떨어져 습한 땅에 배를 붙이고 잠복을 서는것이다. 칼 맑스가 도이췰란드사람이라는것밖에 모르는 주제에 자신들을 혁명투사로 자처하는 저따위 농민출신 자위대원들과 함께 한개털외투속에서 딩굴게 된것이다.

요전에 찾아온 박두남은 울분과 절망속에 허덕이던 그의 피를 끓어번지게 하였다.

박두남은 쏘베트에 대한 비판은 로씨야혁명의 귀중한 경험에 대한 참을수 없는 중상이고 토지의 공동소유, 공동경작제를 철페하고 개인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준다는것은 본질상 자본주의적요소의 부활이며 유격대의 국내진출은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도, 혁명의 국제주의적임무도 다 무시한 민족주의적편향이라고 론단하였다.

그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국제당에 비밀서한을 내자, 국제당의 힘을 빌어 이 사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래야 우리 지위도 회복될수 있소. 국제당은 틀림없이 우리를 지지 할게요!》

휘파람같은 소리로 속삭이던 그의 말이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 아, 그의 말대로 됐으면 얼마나 좋으랴! 국제당에서 빨리, 빨리 반향이 있었으면… 그런데 박두남이 너무 자신만만한것이 오히려 불안스럽다. 성미가 드세고 표현이 단도직입적이며 미욱한데도 있는 그 위인에게 웬일인지 믿음이 잘 가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불길한 일이 터질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켕겨진다.

대왕청하에서 풍겨오르는 찬기운이 문득 뼈속까지 스며들며 온몸이 으시시 떨렸다. 홍병일은 어깨에서 흘러내린 개털외투를 바로 쓰며 가슴을 쥐여짜내는듯 한 오한소리를 내였다.

《으- 으흐흐흑-》

이때였다.

저 물건너쪽 잡관목덤불속에서 무슨 그림자가 언뜻거리더니 물속으로 첨버덩 뛰여들었다. 그 그림자는 사나운 물살에 밀려 허우적거리면서 이쪽으로 건너왔다. 그 그림자둘레의 물결에서 달빛이 부서졌다.

사람이다. 낮부터 웬 수상한자가 저쪽에 숨어서 이쪽을 건너다보고있다더니… 밀정이 아닌가?

홍병일은 초소막으로 달려가려다가 말고 무슨 야심이 생겼는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그 사람은 이쪽기슭에 올라서자 잡관목들을 헤치며 그의 앞으로 곧바로 다가왔다.

홍병일은 숨을 죽이고 그를 쳐다보았다.

초췌한 몰골의 로인이다. 움푹 꺼져들어간 눈확속에서는 겁에 질린 눈이 희번덕거린다.

로인은 그의 바로 앞에 엉거주춤하고 서서 물에 화락하니 젖은 다리를 우들우들 떨며 사위를 두리번두리번 돌아본다.

어디서 언제인가 본듯 한 얼굴이다. 다음순간 짜릿한 전률이 가슴을 누벼지나갔다. 아, 그 령감태기다. 그렇다. 마령감이다. 지난가을 여기서 도망쳐나간 마종삼령감이다. 이 령감태기, 어떻게 돌아왔는가?

(밀정노릇을 하는가?)

벼락치는 생각이 이런데 미치자 홍병일은 가슴밑창이 들썩거리고 눈앞이 확 밝아졌다. 령감태기가 밀정이라면 당장에 자기 정당성의 일단이 증명될것이다.

홍병일은 와락 덮쳐들듯이 뛰여일어나며 총구로 로인의 가슴을 찔렀다.

《손들엇!》

로인은 기겁을 하여 펑덩 주저앉았다.

《여보시오, 난… 난… 동호… 마동호 애비요!》

그러거나말거나 홍병일은 표범처럼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비틀어쥐고 번쩍 쳐들었다. 로인의 몸뚱이는 넝마처럼 갑삭하게 쳐들렸다.

《밀정이지? 밀정으로 들어왔지? 대라!》

로인은 화들화들 떨며 말을 못하였다.

홍병일은 로인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길로 걷어차며 마구 짓밟다가 팔을 비틀었다.

《대라! 대! 밀정이지? 왜놈들이 들여보냈지? 그렇다고 말해! 말해! 죽여버릴테다. 저 물에 처넣을테다!》

로인은 몸을 또아리처럼 꼬부리고 발길질밑에서 딩굴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아니요, 아니요! 아들이 보고싶어… 살수 없어 돌아왔소. 아이쿠- 아이쿠-》

그는 한동안 로인을 마구 짓밟다가 다시 멱살을 틀어쥐고 쳐들어올렸다.

이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홍병일은 로인을 내동댕이치고 숨을 씨근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유격대원이 달려왔다. 그 대원은 공교롭게도 마동호였다. 순찰을 나온것이다.

마동호는 불길한 기미를 느낀듯 황황히 다가와서 두리번거리며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자 이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못 들었소?》

홍병일은 랭소를 지으며 턱짓으로 땅바닥에 늘어진 그림자를 가리켰다.

《물을 몰래 건너온자인데 밀정이 분명하오. 내 글쎄 어쩐지 오늘밤은 이상하다 했다니까.》

《반항을 했소?》

《흉칙한놈이 글쎄… 마동무를 걸고들거던.》

《나-를?》

《제깟놈이 마동무 애비라는게요. 자식,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긴줄 알구, 쳇!》

홍병일은 숨을 험하게 몰아쉬며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이때 무슨 힘에 이끌렸던지 송장처럼 쓰러졌던 로인이 몸을 벌떡 솟구쳐 일어나앉아 불같은 눈으로 동호를 쳐다보았다.

《동호야!》

로인의 절통한 부르짖음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동호는 화닥 놀라서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로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두팔로 땅을 짚고 자기를 쳐다보는 로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동호야! 내다! 너 제 애비도 몰라보느냐?》

동호는 외면하고 돌아서 옆으로 서너걸음 걸어나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인은 절망하여 푹 쓰러져 손으로 땅을 치며 통곡했다.

《어이쿠- 왜 왔던고!》

홍병일은 동호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

《자네 부친인가?》

마동호는 머리만 끄덕였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도 있는가. 여보게, 나도 그새 반성도 많이 하고 인정이란것도 알게 됐네. 잠복을 서던 저치들은 쿨쿨 자고있어. 이 일은 자네와 나밖에 모르네. 놓아보내든지 어찌든지 좋도록 하게. 난 저리로 가겠어. 아하, 참 기막힌 일이여…》

희붐한 어스름과 눅눅한 안개속에서 대왕청하의 물결소리만 주절주절 높이 들려왔다. 가까운 수풀속에서 웬 날짐승이 밸을 토하는듯 한 비명을 내지르며 푸드득 날아올랐다.

마동호는 어깨에서 홍병일의 손을 밀어던졌다.

《여보게!》 홍병일은 놀라서 소리쳤다.

마동호는 울분이 왈칵 치밀어올라 머리를 외로 돌리며 씨근거렸다.

언제는 반혁명분자라고 잡아들이라 소동을 벌리더니 오늘은 밀정이라도 놓아주라는겐가.

그는 사납게 번뜩이는 눈으로 홍병일을 돌아보았다.

《동호… 어쩔텐가?》

《당신은 간참 마시오. 밀정인가 아닌가는 여기서 우리가 판단할게 아니요!》

안개속에 묻힌 길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고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동호는 아버지를 업고 동림촌쪽으로 걸어들어왔다. 고요한 길에 들어서니 홍병일에게서 인정을 베푸는 소리를 들은것이 더욱 분해났다. 왜 그따위 소리를 할 때 뺨을 갈겨주지 못했던가. 이제는 늦었다. 떠보기 위해 그랬다고 하면 할소리 없다. 사람을 얕봐도 분수가 있지.…

잔등의 아버지는 어디가 불편한지 가슴을 움지락거렸다. 동호는 아버지를 추슬러업었다.

《너는 유격대냐?》

《예…》

《음… 그런걸… 어떻게 된줄 알고 내내 속을 썩였지. 지난가을 욱해서 떠나놓고는 네 걱정에 어디 가서나 발편잠을 못 잤다.》

동호는 지난가을 자기가 겪은 고초에 대하여 말하고싶지 않아 어금이가 저려나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내 공연한 걱정을 했구나.》

이 말은 아들의 가슴에서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김진세아바이나 오풍헌아바이를 봐도 모두 듬직하게 틀고앉아 집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자식들도 잘 돌보고있는데 도대체 무슨 도깨비가 들어 이 령감은 코코에서 이렇게 속만 썩이는가.

잔등의 아버지가 다시 옴지락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람은 현당위원장을 하던 홍씨가 아니냐?》

《…》

《제 자식이 여기 있는데 내 미쳤다구 밀정이 돼 들어오겠니?》

《…》

《진세형님네랑… 풍헌형님네랑 모두 잘 계시나? 모두 나를 어떻게 대할가? 입에 풀칠도 걱정이지만 사람이… 사람이 그리워 못살겠더라.… 별의별 고생을 다하며 돌아가는데 차차 소식이 들려오더구나.

여기서 농민들에게 땅도 나눠주고 천국처럼 살기 좋아진다는게 아니냐.… 내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마동호는 걸음을 뚝 멈추었다.

《이때까지 어디 가있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안 돌아다닌데가 없다.》

《마감에는 어디서 떠났어요?》

《훈춘쪽에서…》

《살자고 왔다면서 왜 혼자 왔어요?》

《왜 혼자겠니, 네 에미랑은 저 물건너 상경리에 있다.… 거기서 기다린다.…》

《아버지, 저한테는 속이지 말아요. 정말 거기 있소?》

《있다.… 너 왜 이러니?》

마종삼은 아들의 잔등에서 미끄러떨어져 길바닥에 엉거주춤 섰다.

《얘야!》

마종삼은 와들와들 떨며 피타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너도 의심스러워 이러느냐? 아까는 창피해서 말을 못했다만 내 홍씨한테 죽도록 매를 맞았다. 밀정으로 몰면서 때리고 짓밟았다. 욕을 봐 싸지만… 싸지만… 으흐흑…》

그는 분이 치밀어 끅끅 느끼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살자구… 살자구 찾아왔다! 낯가죽이 두꺼운 일인줄 알면서두 네가 보구파 왔다. 내가 와서 너한테 해롭다면 그렇다고 말해라. 가겠다. 가서 다시는 안 오마.》

로인은 쓰러지려고 비칠거렸다.

《아버지!》

동호는 아버지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어디로 간다고 이럽니까? 또 제 속을 태우자구?… 나하구 가자요. 가서 죄다 얘기하자요.》

동호는 아버지를 부축하고 동림촌자위대로 들어갔다. 새벽녘에 마촌에서 장룡산이 달려나와 마종삼이와 한시간동안이나 담화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마촌 김진세네 집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김진세는 반갑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마종삼을 무섭게 쏘아보고는 웃방아래목에 베개를 던지고 포대기를 깔아주었다.

지칠대로 지친 마종삼은 깊은 잠에 노그라떨어져 입을 하 벌리고 정신없이 코를 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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