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제 4 장

1

(1)

 

방문에는 해빛이 쨍쨍하게 비쳐들어 문살그림자가 또렷하게 그려졌다. 그 방문을 등지고 문설주에 기대여 서있는 홍병일은 숨도 온기도 없는 시꺼먼 그림자처럼 보였다.

《종이는 어디다 쓰려구? 그런 고급지야 어디 있나-》

권일균은 은근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책상서랍을 뒤지였다. 그는 적위대 소대장으로 떨어진 후로 내내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있던 홍병일이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종이를 빌려달라고 하는것이 화해의 암시인것 같아 친절을 다하려고 애썼다.

서랍안에 무질서하게 들어찬 종이들속에서 하얀 백지 여러장을 골라낸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홍병일을 돌아봤다.

《어디다 쓰려구 그러오? 이건 상급에 문건을 발송할 때에만 쓰려구 둬둔건데.》

홍병일의 눈이 차겁게 번뜩이였다.

《그건 묻지 마시오. 나한테도 사생활이란게 있으니까.》

《어- 그런 문제라. 그렇다면 도와야지. 암, 도와야지…》

홍병일은 종이를 받아쥐였으나 돌아가지 않고 그의 바투 깎은 머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토지는 언제 개인들에게 나누어주오?》

《토지개혁 말인가? 어, 그거야 토지개혁준비위원회에서 정하는건데… 아마 조국원정대가 돌아와야 하겠지.》

《난 그래도 리재명이랑 김진세령감이랑 같이 밀려다니길래 당당한 위치를 유지하고있는줄로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양이군?… 머리를 그렇게 깎으니 어떻소, 맑스머리때보다 시원하오?》

권일균은 그를 흡떠보다가 비위좋게 웃어보였다.

《그래 보기가 어떻소? 왕청골안에 젊은 투사들이 와글거리니 나두 좀 젊어지자는게요.》

홍병일은 문을 탕 닫고 나가버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권일균은 문쪽을 쏘아보며 미욱한 곰처럼 버티고 서서 숨을 거칠게 씨근거렸다.

(저자가 나를 도대체 뭘로 아는겐가?)

그는 요사이 심각한 좌절감을 체험하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 부대를 이끌고 국경지대에로 나간 다음 근거지에는 박훈과 얼마간의 유격대원들을 내놓고는 모두 이전부터 왕청에 있던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가 이전에 자기의 손탁밑에서 놀던 사람들뿐이였다.

그런데도 모든것이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느날 그는 리재명이더러 유격대식당에 감자 몇섬을 가져다주라고 말했다.

리재명은 즉각 집행하지 않았다. 그는 림성실, 김진세로인 등과 의논하는것 같더니 유격대에 가서 장룡산에게 식량사정을 확인해본 다음에야 감자섬을 날라갔다. 이렇게 된 사연을 보고하는 최형준이도 응당한 일처럼 여기는 얼굴이였다.

권일균은 이쯤한 일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위인은 아니였으나 리재명의 그런 소행이 괘씸했다.

리재명이 제일 미워났다. 이전에는 자기앞에서 찍소리 못하였으며 김중권의 부추김을 받아 반발하여나섰을 때에도 자기가 몇마디 하니 얼굴이 지지벌개지며 주눅이 들던 그였다. 그런데 요새는 토지개혁을 한다고 기승을 부리며 온 왕청골안을 돌아다닌다. 가는곳마다에서 호방한 소리를 탕탕 줴치면서 농민들을 들썩하게 웃겨놓는가 하면 쏘베트회장으로서 일을 쓰게 못한 자기를 타매해달라고 너스레를 피운다고 한다.

제 혼자 다니면서 그러는건 그렇다치고 소똥냄새가 풍기는 김진세령감을 달고 다니면서 토지등급을 매긴다고 법석을 떠는데는 정말 꼴불견이다.

얼마전 권일균은 길바닥에서 그를 만나 비꼬인 소리를 한마디 던졌다.

《여보, 재명동무! 하, 이건 온통 당신 세상인것 같소!》

《예, 정말 그런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는 반죽이 좋게 대답하고는 껄껄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를 생각하니 가슴에서 불이 황황 타오른다.

(중산층출신으로서 붓대만 놀려오던 네가 농군들을 생각해서… 진정 그들에게 경작지를 나눠주는 일이 그리도 제일처럼 기뻐서 열을 내며 돌아치는가?)

권일균은 좋건싫건 대세의 흐름에 맞추지 않으면 살수 없었다. 그는 우선 길다란 머리부터 깎아버리고 수염도 밀어버렸다. 그는 토지개혁준비와 근거지인민들의 생활을 안착시키기 위하여 뛰여다녔다. 어디에 가나 이제 땅을 나누어준다는 소문이 퍼져 농민들은 어깨춤을 들썩거리며 자기들이 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번개같이 해치우는것이였다. 이전처럼 그가 말을 달려 돌아치며 열변을 토할 일도, 기갈을 할 일도, 《반혁명》을 찾아내여 준엄한 심판을 내릴 일도 없었다.

권세를 행사할 일이 없게 된 그는 농민들의 이런 자각적인 진출이 놀랍기도 하고 역겹기도 하였다. 누구도 자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것 같았다.

이릉이릉한 불덩이같은 눈으로 문쪽을 쏘아보는 그에게는 홍병일이 적위대로 미끄러져내려갔는데도 자기보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보이는것이 이상스러워났다. 문득 그가 백지를 얻어간것이며 훈춘에서 박두남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하나의 사슬로 이어지면서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최형준이 와서 박두남이 지나가던 걸음에 친지를 찾아 들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간지 서너시간이 지나서 홍병일이 나타났었다.

박두남은 훈춘유격대 지휘관이다.

권일균은 그를 회의에서 몇번 만난 일이 있었다. 홍병일이와 화요파에 함께 가담했던자인데 훈춘현당에 있다가 어떻게 군복을 입고 유격대의 적지 않은자리에 올라앉았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화요파의 권모술수는 정말 당할수 없단말이야.… 저들이 모종의 꿍꿍이를 하는것이 아닐가?)

느닷없이 이런 의혹이 가슴에 갈마들기 시작하자 권일균은 방안에 가만히 서있을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