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3 장
4
나무가지에 목이 긁히워도 아픈줄 몰랐다. 가시넌출이 손등을 허비여도 쓰린줄 몰랐다. 그는 산기슭의 솔밭에까지 내려와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지가랭이도 털고 옷매무시도 바로잡고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마을은 세상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도 모르고 아직도 깊은 잠에 들어있는듯 하였다.
그는 저녁어스름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흔연스럽게 마을길에 들어섰다.
전장원은 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는 곧바로 윤치석이네 집으로 갔다.
윤치석로인은 마당에서 굵은 참나무장작을 빠개느라고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가 힘껏 내리찍으며 온 집이 들썩하도록 《헹! 헹!》하고 소리치고있었다.
자기 집에 어떤 일이 닥쳤는지도 모르고 세상시름에 딸자식시름까지 다 걷어안고 억척스럽게 집살림을 꾸려나가는 로인을 보자 전장원은 가슴에서 련민의 정이 끓어올랐다.
도끼를 높이 쳐들었던 로인은 뒤에서 나는 인기척에 머리를 휙 돌렸다가 도끼를 맥없이 내리며 놀라움에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전장원은 로인앞으로 다가갔다. 로인에게서는 나무즙냄새와 땀내가 풍겨왔다.
《윤아바이!》
《…》
《모두 집에 계십니까? 따님이랑…》
윤치석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
《저… 소왕청에 있는 이 댁 사돈집 소식을…》
로인은 펄쩍 놀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니, 누가 거기 갔다온 사람이 있소?》
《좀 조용히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전장원은 윤치석을 뒤따라 들어가지 않고 퇴마루밑에 서서 자기가 한가정의 대사를 맡아 치르게 된것 같아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정지문이 열리며 윤치석이 퇴마루에 나와 어서 들어가자고 례법을 차려 그를 맞아들였다.
가마에서 피여오른 김이 천장밑에 뽀얗게 서려있고 구수하고 시큼한 냄새가 떠도는 정지칸에는 보금이와 그의 어머니가 보기 좋게 사이를 두고 가지런히 앉아있었다.
조씨는 저고리고름을 서둘러 매다가 몸을 움쭉거리며 그에게 인사를 했으나 얼굴에는 벌써 사돈댁에 대한 노여움이 내배여있었다. 보금이는 죽은듯이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그의 동그란 어깨가 고요히 오르내리고있었다.
전장원은 노여움이 서리서리 뒤엉킨 가슴을 안고 앉아있는 이들앞에서 무슨 말로부터 어떻게 시작하였으면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마촌에 있는 이 집 사돈댁에서는 모두 잘있답니다. 저… 이 집 사위되는 김창억이는 유격대에 들어가 잘 싸우고있는 모양입니다.》
보금의 머리가 더 깊이 숙어진다. 조씨는 쌀쌀한 눈으로 그를 치떠봤다.
《그리구 이 집 사돈님은 거기서 큰일을 맡아보는 모양입니다. 정사에 관여하고있답니다. 거기 혁명정부에서 땅이 없어 고생하던 농민들에게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골고루 나누어주는데 이 집 사돈이 그 위원이 돼서 땅 나누는 일을 맡아본답니다.》
윤치석은 내리떴던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쳐다본다.
조씨가 끼여들며 가슴을 앓는 소리를 했다.
《며느리를 내쫓고 그렇게 됐으니 좋기두 하겠수다. 그저 불쌍한게야 이 못난게지… 아이구, 세상에…》
조씨는 사돈집일이 잘되였다는 소리에 속이 더 바글바글 끓어번지는 모양이다.
윤치석은 로친이 호들갑스럽게 푸념질을 한다고 눈을 무섭게 흘기였다.
조씨는 그 눈총에 움츠러들어 얼굴을 숙이고 엄지손가락으로 발등을 꾹꾹 누르기만 했다.
윤치석은 깊은 궁냥이 담긴 눈으로 어딘가 먼 앞을 내다보며 무거운 숨을 내쉬였다.
《그 집과 우리 집이 의가 틀렸다는건 이 동네에 비밀이 아니지마는 음… 거기서 농사군들에게 땅을 나눠준다니 참 꿈같은 일이요. 한데 선생은 어디서 들었소? 혹 근거지에 갔다왔다는 소문이 사실이요?》
전장원은 이제는 더 에둘러 말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
《뭐-요-?》
윤치석은 너무 놀라와 몸을 뒤로 젖히기까지 하였다.
《세상에 명성을 떨치고계시는
《예…》
《그래 근거지에서 만났소?》 하고 로인은 그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왕재산에서 오늘 낮에 만나뵈옵게 되였습니다.》
《왕재산 말이요?》
《예…》
《아-니!》
《
조씨는 한손으로는 딸의 어깨를 쓸어만지며 다른 손으로는 방바닥을 소리나게 내리쳤다.
《아이구, 세상에 이런 일도 있소? 그런줄은 모르고 벼라별 구박을 다 했소. 동네에는 망측한 소문이 다 돌고… 그러니 제 속이야 얼마나 탔겠소.》
내내 머리를 떨구고 앉아있던 보금이 어머니의 무릎에 쓰러지며 목놓아 흐느꼈다.
《어머니!》
조씨는 물결치는 딸의 잔등을 쓸어만지며 눈물을 흘리였다.
《에그, 나는 에미라는게 네 마음을 그렇게도 몰랐구나.》
보금이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몰라주는 자기 마음을
조씨도 치마자락으로 얼굴을 싸쥐고 끅끅 느껴울었다.
그러나 윤치석은 눈을 지그시 내리뜬채 바위처럼 웅크리고 앉아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해쓱해졌다. 눈언저리와 볼편에서는 보일듯말듯 한 경련이 일었다.
이윽고 그는 눈을 내리뜬채 탁 쉬여버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 여태 아무 소리 안하고있었지만 속으로는 사돈집을 몹시 원망했더랬소. 선생, 내 래일로 마촌으로 들어가 사돈어른앞에 큰절을 하고 사죄하겠소.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소.》
전장원은 무릎우에 놓여진 윤치석의 거쿨진 손을 잡았다.
《윤아바이, 왜놈들이 한벌 깔렸는데 어떻게 거기로 갑니까? 또 이 일은 이 집에서나 저쪽집에서 처사를 잘못해서 생긴것도 아니고 저 근거지에서
몇몇 사람들이 일을 잘못해서 두집이 다같이 괴로움을 당한건데… 이제야
윤치석의 눈에서 뜨거운것이 후드득 떨어져 굵은 피줄이 살아오른 손등을 번들번들 적시였다.
《선생, 아무 일이나 시켜주시오. 내
전장원은 이밤 흥분을 가라앉힐수 없어 들판을 헤매였다.
땅이 오르내리며 넘실넘실 물결치는듯했다. 그는 취한 사람처럼 발을 허둥거리며 어디라없이 걸어갔다. 왕재산에서
그가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들판에 앉아있는데 마을쪽에서 도끼질 소리가 울려왔다. 달이 휘영청하게 밝아 마을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보금이네 집앞에서 누가 나무를 패고있는것이 보였다. 윤치석이 분명했다. 로인도 잠들수 없어 나무를 패는 모양이다. 로인의 머리우에서 도끼날이 번쩍하고 달빛을 반사할 때마다 땅을 울리는 여무진 소리가 쾅쾅 들판에까지 메아리쳐오며 고요를 흔들었다. 전장원에게는 그것이 조국땅이 소생하면서 뛰는 첫 맥박소리처럼 들렸다.
이튿날 이른아침 그의 발걸음은 저절로 왕재산으로 향하였다.
울창한 숲속에는 엄숙한 고요가 고즈넉이 흐르고있었다.
회의터둘레의 잡관목들과 참나무에는 성에가 하얗게 피였다.
어제 모임을 마치고 흔적들을 지워버리느라고 했으나 아직도 여기저기에 눈덩이들이 흩어졌고 발자국자리들이 보였다.
전장원은 그것들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부는듯마는듯 한 바람결에 나무가지들에서 성에꽃들이 고요히 날아내려 공기속에 더욱 청신한 기운을 풍기면서 그의 머리며 어깨를 하얗게 덮었다.
바위옆에 머리를 수굿하고 서있는 전장원은 높뛰는 심장의 박동소리속에서 어제
《…우리는 원쑤들의 책동이 악랄하고 정세가 아무리 어려워도 항일무장투쟁을 반드시 국내에로 확대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여나가고 유격근거지를 방위하며 유지하자면 이미 창설한 두만강연안의 유격근거지와 잇닿아있는 국내의 넓은 지역에 반유격구를 창설하여야 한다. 온성일대를 반유격구로 꾸리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반유격구를 형성하기 위하여서는 유격대가 국경연안일대에서 전투활동을 더욱 강력히 전개하는것과 함께 국내혁명조직들이 광범한 군중을 결속하고 혁명화하여야 한다.
이렇게 완전유격구주변에 반유격구를 튼튼히 꾸려놓아야 적의 발악적인 공세를 짓부시고 완전유격구를 유지공고화할수 있다.
전민족을 하나의 반일혁명력량으로 튼튼히 결속하기 위하여 합법적, 비합법적혁명조직들을 내오고 광범한 인민들을 이에 결속하여야 한다.
온성에 이미 조직된 로농동맹같은 조직은 더 많은 군중을 인입할수 있도록 그 명칭을 고쳐야 한다. 반일군중을 혁명조직에 결속할뿐아니라 그들을 비밀독서회, 출판활동, 야학회, 해설담화 등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교양하여야 한다.
국내의 인민들은 유격근거지를 적극 원호하여야 한다. 유격대에 적정자료를 제때에 보내주며 물질적원호사업도 적극적으로 벌려 유격대와 근거지인민들을 고무하여 항일무장투쟁에 크게 기여하여야 한다.…
전장원의 눈앞에는 혁명의 불길이 호호탕탕한 바다처럼 퍼지며 온 누리에 불타오르는듯 하였다.
그는 북받쳐오르는 감격을 누를길 없어 두만강쪽으로 걸어나가 근거지쪽하늘을 이윽토록 우러러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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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슴에 드리운 털실목도리자락이 강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턱밑에까지 날아오르며 나붓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