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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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처럼 부옇게 흩날리는 눈발속에 묻혀있는 근거지안의 산간지대에는 괴괴한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셋째섬과 십리평사이의 달구지길을 따라 한사람이 눈에 미끄러져 자주 비칠거리며 걸어가고있었다. 그는 나무군차림에 도끼자루와 톱자루가 삐죽 내민 꼴망태까지 진 김중권이였다.
그의 가슴팍과 다리에는 눈이 허옇게 묻었고 얼굴에서는 눈석임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그는 얼굴을 씻을념도 못하고 막막한 생각에 잠겨 허둥허둥 걸어가고있었다.
김중권은 지금 정찰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며칠전 적통치구역의 지하조직들로부터 일제의 새 부대들이 길철령을 넘어와서 근거지를 봉쇄할 태세를 취한다는 통보가 들어왔었다. 유격대의 각 부대들은 방어에 유리한 고지들을 차지하고 전호들을 서둘러 파기 시작하였었다.
그런데
너무도 뜻밖의 일이였다.
김중권은 어리둥절한 마음을 수습하지 못한채 길을 떠났다. 산길에서 흔히 만날수 있는 수수한 나무군으로 변장한 그는 왕청, 백초구를 거쳐 고려령과 청구자령일대의 산간마을과 골짜기와 령길을 돌아다니며 눈을 밝혀 적정을 정찰하다가 석수촌이라는 마을에 들렸다. 그 마을의 지하조직책임자는 온성에도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였다. 김중권은 그와 물건너의 형편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누다가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앞두고 온성일대에 대한 놈들의 경계가 더욱 심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전장원은 김중권이 희생된줄 알고 유격근거지에까지 찾아왔다가 랭대를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게다가 또 얼마전에는 안해까지 사망했다고 한다.
김중권은 국경일대에로의 진출을 앞두고
부대가 국경일대에 진출하면 그곳 지하조직과의 련계밑에 움직여야 할것이다. 이러한 때에 혁명조직들이 자기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지 못하는것은
이미전에 이곳에 파견되여 활동한
흩날리는 눈발은 얼굴을 선뜩선뜩 스쳤다.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석임물이 턱밑에 방울져 맺혔다.
단숨을 몰아쉬며 걸어가던 김중권은 뒤에서 누구인가 자기를 부르는것 같아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눈투성이가 된 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최형준이였다.
그의 앞으로 달려온 최형준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니, 귀가 멨소?》
김중권은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늘이 비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볼뿐이다.
《정찰에 나갔다더니 벌써 돌아오오?》
김중권은 대답이 없이 손바닥으로 얼굴의 눈석임물만 훔쳐내렸다.
《부대가 빠져나갈수 있겠소?》
《동무는 어디 갔다오는 길이요?》
《서대포적위대에 나갔댔소.
최형준은 속이 달아오르는듯 숫눈을 한줌 쥐여 입에 쓸어넣었다.
《중권동무, 회령련대놈들까지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요? 이런 때에 부대가 근거지밖으로 나간다는건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니요? 좀 생각해보오. 왜놈들이 쳐들어온다면 변변치 못한 적위대나 유격대의 작은 력량으로 어떻게 막아내오. 그것도 그렇지만 중권동무, 부대가 적구로 들어간다는건 더욱 위험한 일이요. 거기는 도처에 적이고 밀정들이요. 력량을 둘로 가르지 말아야 하오. 이건… 이건… 중권동무, 나 혼자생각이 아니요. 현당의견이요! 이 시각에 정찰나갔던 동무가 책임적으로 말씀올리는게 아주 중요하오.》
김중권은 얼굴에 내려앉는 눈송이들을 한손으로 훔치고는 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 동무는 나한테서 뭘 바라는게요?》
《
《나는 본대로 보고해야 되오! 놈들의 경계가 비록 심해졌지만 국경일대에로 진출할수 있는 통로는 열려있소.》
그 말에 최형준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입가에는 보일듯말듯 한 경련이 일었다.
《하… 야단났군. 중권동무, 근거지의 존망과 관련된 문제요. 유격대가 떠나간 다음 적이 달려들어 근거지가 수습 못할 위험에 빠지면 어찌오? 사람들은 동무를 원망할게요!》
김중권은 분격이 욱 치밀어올라 한순간 숨이 막히는듯 하였다.
《뭐요? 나를 원망한단 말이요? 동무네가 반유격구로 꾸리는데 일찌기 관심을 돌렸다면 이런 때 유격대가 적구로 나가지 않아도 될게란 말이요. 에익, 참…》
《그건 그렇소.》 하고 최형준은 주눅이 들어 얼굴을 숙이며 괴로움에 모대기였다.
그가 괴로와하는것을 보니 김중권은 너무 모진 말을 한것 같아 은근히 량심에 가책이 되였다. 반유격구가 일찌기 꾸려지지 못한데는 자기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지 않은가.
흩날리는 눈발속에서 김중권은 흐린 얼굴로 최형준이와 헤여졌다.
그가 사령부에 도착하니
사령부의 생활을 돌보기로 된 림성실이 방 웃목에 앉아 바느질을 하다가 반겨 뛰여일어나
그의 저고리앞섶에 꽂힌 바늘에서 흘러내린 실오리가 보일듯말듯 흐느적이였다. 림성실은 그를 위험한 곳에 내놓고 몹시 걱정한듯 가슴팍이며 팔소매에 맺힌 물방울들을 털어주면서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김중권은 대답을 안했다. 그는 웬일인지 반가운줄도 모르겠고 물기를 털어주는 살뜰한 손길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림성실은 근심어린 눈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김중권은 그의 눈길을 피하여 뚝한 얼굴로 방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바느질자리에 놓여있는 낡은 행전을 보자 미간을 찌프렸다.
《
《네… 끈이 떨어져서…》
《새걸 만들어올리면 안되오? 아무리 어려운들 여기에 그만한 천이야 없겠소?》
《그래서 새걸 만들어올렸어요.》
《아니, 한컬레가 아니라 대여섯컬레는 여벌로 있어야 되겠단 말이요.
림성실은 한숨을 내쉬였다.
《아마 그런것 같아요.…》
이때 밖에서 여러 사람들의 발자욱소리가 울렸다. 입속으로 부르는 은은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문밖에서
《허- 봄눈이 얼마나 좋소! 저 왜놈들만 아니면 웃도리를 훌렁 벗어던지고 한바탕 눈싸움이나 해봤으면 좋겠소, 허허허… 최춘국동무, 아이적에 눈싸움을 좀 해봤소?》
《예…》 침울한 대답소리이다.
김중권이와 림성실은 꼿꼿이 일어서서 옷매무시를 바로잡으며 근심스럽게 마주보았다. 방안에는 벌써 신선한 기운이 차넘치는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