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2 장
8
(2)
곳곳에서 쏘베트들이 인민혁명정부로 개편되기 시작하고 좌경적인 쏘베트시책으로 하여 빚어졌던 엄중한 사태들이 가셔지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아침 영림서마당에 정렬한 유격대의 대렬앞에서
바라지도 못하였던 영광에 접한 두 청년은 대렬앞에 서서 얼이 나간듯 한 눈으로
문득 마동호가 창억에게 기대여 머리를 떨구며 흐느껴울었다.
창억이는 총을 가슴에 꽉 붙안고 얼굴을 숙였다. 웬일인지 울음이 터져오를 대신 자기에게 매몰스럽게 굴던 홍병일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이 선뜩 얼어들었다.
이때
《이제부터 정치학습도 잘하고 군사훈련도 열심히 해서 혁명위업에 충직한 투사가 되기를 바라오. 동무들, 오늘을 잊지 마오!》
《옛!》
창억이는 힘차게 대답하였다.
그는 다음순간 자기때문에 속을 썩여온 아버지와 어머니, 자기때문에 동네아이들속에서 주눅이 들었던 조카 생각이 가슴을 쳐 눈앞이 탁 흐려졌다. 저도 모르게 흐느끼게 되였다.
《어서 집으로 가서 부모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오.》
창억이는 대렬이 흩어진 다음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퍼붓는 축하의 홍수속에 묻히였다. 장룡산이 제일선참으로 달려와서 주먹으로 창억의 가슴을 툭 치고는 번쩍 안아들고 한바퀴 돌다가 내려놓았다.
《야- 이제는 내 속에 맺혔던 어혈도 다 풀렸다- 허허허…》
모두 유쾌하게 웃어대였다. 한쪽에서는 다른 대원들이 마동호를 하늘에 뿌려올렸다.
창억이는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였다. 어리벙벙해진 그는 이윽고 장룡산이와 대원들이 등을 떠밀어주어서야 집으로 향할수 있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길가의 나무들이 모두 자기를 향하여 달려오고 집들도 모두 눈을 털며 자기를 향하여 돌아앉는듯 하였다. 사람은 기쁨에 넘치고 행복에 겨우면 동심으로 돌아가기 쉬운 모양이다.
창억이는 자기 집모퉁이를 돌아서자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다가 사립문쪽을 향하여 고양이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식솔들을 깜짝 놀래워주고싶어서였다. 그는 울바자너머로 슬금슬금 뜨락을 들여다보았다. 뜨락에서 늘 자치기를 놀던 조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퇴마루에 아버지의 신발도 없었다. 집안에서도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집은 아늑한 고요속에서 깊은 잠에 든듯 하였다.
(젠장, 이런 날에 다 어디로 갔나?… 혹시 어머니는?…)
창억이는 눈을 슴벅이며 어느 문으로 해서 집안으로 뛰여들가 하고 궁리했다. 집에 있는 세개의 문중에서 정지문이 제일 고생을 많이 한것 같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문이였다. 지난날 갖가지 재난과 형들이 죽었다는 소식, 기막힌 기별들이 그 문으로 날아들어왔으며 식구들의 입에 풀칠할 량식, 입을 옷, 마실 물, 땔나무들이 모두 그 문으로 들어왔다. 벼락처럼 내리치는 재난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기절하여 쓰러지지 않고 집안살림살이를 도맡아해온 어머니의 한숨이 서려서 저 문널이며 문설주가 저렇듯 시꺼멓게 그슬린것이 아닌가. 이제는 저 문에 좋은 소식만 날아들고 웃음이 넘칠것이다.
《어머니!》
창억이는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들어가서 정지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그리고 총을 먼저 들이밀며 안으로 뛰여들었다.
가마목을 쓸던 어머니 허씨는 기겁을 하여 그 자리에 펑덩 물앉으며 비자루를 떨구었다.
《흐아 흐아 흐아…》
룡마루를 들었다놓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가오는것은 왜군도 구국군도 토비도 아닌 새 군복을 름름하게 차려입은 유격대원이다.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빤히 쳐다보다가 두손을 번쩍 쳐들며 매달렸다.
《에그- 이게 내 아들이구나!》
《어머니, 방금전에
《이런 고마운 일이라구야! 어디 보자.… 어디 좀 보자.》
어머니는 군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이 너무 대견스러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며 가슴팍을 만져보고 돌려세우고 잔등이며 군복바지가랭이를 쓸어만져보았다.
《어째 나는 잘 안 보이는구나.…》
《우니까 그렇지요!》
아들은 손바닥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봉남이는 어디 갔어요?》
《학교에 갔다.》
이때 밖에서 콩당콩당 뛰여오는 소리가 나더니 봉남의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할마- 할마니-》
역시 정지문이 활짝 열리며 봉남이가 뛰여들어와 삼촌은 보지 못하고 할머니의 품에 날아들었다.
《할마니, 아동단에 들었다. 나 아동단원이다!》
허씨는 손자의 머리칼이며 볼을 쓰다듬고 치마자락으로 코밑을 닦아주었다.
《에그, 아동단원이 코가 한발이나 나오다니?》
봉남이는 바지괴춤을 올리며 코물을 후룩 들이켰다.
허씨는 손자를 창억에게 돌려세웠다.
《이녀석아, 삼촌을 좀 봐라!》
유격대군복을 입은 삼촌을 알아보자 봉남이는 할머니의 품에서 깡충 뛰여올랐다.
《삼촌!》
《봉남아!》
창억이는 조카를 덥석 안아 머리우에 높이 쳐들었다.
《자, 너는 아동단원이구 나는 유격대원이다!》
《아, 총!… 총!… 삼촌이 총도 멨구나!》
《멨-다-》
창억이 봉남이를 방바닥에 내려놓으니 그 아이는 대뜸 총탁을 가슴에 걷어안으며 한번 메보자고 졸라댔다.
그러자 할머니가 손자의 편역을 들었다.
《한번 메보게 하렴, 아무렴 사내대장부가 총에 깔리겠니? 삼촌이 유격대에 들 날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창억이는 벙글거리며 봉남의 어깨에 총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아주었다.
총의 무게가 실리자 봉남이는 흠칫 뒤걸음질쳤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익으며 똑바로 서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는 발을 기운차게 구르며 정지간을 돌아갔다.
《야-야- 만세- 만세-》
허씨는 그 모습이 장하여 손벽을 치며 웃어댔다.
봉남이는 창억의 앞에 와 멈춰서서 그를 쳐다보며 챙챙한 목소리로 물었다.
《삼촌, 유격대가 되면 왜놈 <천황>을 잡아온다구 했지?》
《허허허, 그래…》
《이 총을 가지구 잡아올수 있니?》
《있다, 있구말구. 이제 <천황>놈을 이 소왕청골안에 끌어오면 재판을 열게 될테니 그때 너두 한마디 해라.》
《야-》
봉남이는 기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맴돌이치다가 문을 차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동네아이들에게 자랑하러 나가는 모양이다. 울바자 저쪽에서 달려가는 봉남의 부르짖음소리가 들려왔다.
《차돌아- 우리 삼촌 유격대가 됐다- 총을 탔어-》
아이의 목소리는 멀어져갔다.
허씨는 방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령감-! 아직도 뭘하시오?》
창억이는 저으기 놀라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니, 방에 아버지가 계셔요?》
《음…》
허씨는 갑자기 목소리를 죽여 큰 비밀을 귀뜀해주듯 손시늉을 써가며 속삭였다.
《너는 아무것두 아니다. 간밤에
《예?》
《위원이다!》
《일자무식인데 위원을 어떻게 지내요?》
《그래서 밤새 끙끙 앓으셨다. 밭들에 등급을 매기는 일을 맡았다누나. 여기 어느 밭이 좋구 나쁜거야 저 령감한테 훤하지 않겠니. 목책에다 사람들 이름자만 써주면 전에 편지랑 좀 뜯어봤으니까 몇등급이라구 표를 하는게야 하겠지. 걱정할건 없을것 같다.… 이제 목책을 들구 위원회에 나간다누나.》
《목책이요? 아버지가 목책이요? 히야-》
창억이는 어머니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어머니, 우리 집이 이게 어떻게 된게요?》
허씨는 곧추 세운 무릎을 두손으로 쓸어만지며 생각깊은 눈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밝은 미소가 어린 어머니의 얼굴은 한결 젊어보였다.
《저 문이 열릴 때면 늘 가슴이 덜컹덜컹했는데 이제는 기쁜 소식만 날아드는구나. 우리 어떻게 일하문
이때 사이문이 열리며 웃방으로부터 두루마기를 입고 검정보자기에 네모반듯하게 싼것을 한손에 쥔 김진세가 정지간으로 내려왔다.
그는 엄엄한 얼굴로 아들을 흘깃 돌아보고는 문쪽으로 향하였다.
《너는 군대가 됐다면서 집에는 왜 드나들며 이 야단이냐?》
《아버지, 그런게 아니라…》
창억이는 무엇이라고 딱히 짚어 말할수는 없으나 크게 달라진 아버지의 위세에 어리벙벙해져 다음말을 잇지 못하였다.
《총을 잡은 병정이 에미품이 그립던가?》
김진세는 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창억은 어머니를 돌아보며 놀랍다는듯 눈웃음짓고는 제법 유격대원다운 말투로 대답했다.
《
《음…
김진세는 신발을 서둘러 신으며 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가 있어 너하구 긴 얘기를 못한다.》
창억이는 아버지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 그런 말이 또다시 놀라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허씨도 사립문까지 따라나와 그들을 바래웠다.
사립문밖에까지 나가 바람결에 귀밑머리를 날리며 그들의 뒤모습을 지켜보는 허씨는 문득 가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이 기쁜날에 며느리까지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싶은 생각이 가슴을 허비여서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랑가랑 피여올랐다.
(저희들만 잘되였다구 기뻐 우쭐대면서 그 애 말은 한마디두 없지… 애비나 자식이나 다 같아. 에그, 남정들 마음이란 어째 저리 모질가…)
허씨는 원망의 눈으로 멀어져가는 령감과 아들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마을길에 나선 김진세와 김창억은 뒤에서 어떤 눈이 자기네를 지켜보고있는지 모르고 활개를 저으며 걸어갔다.
김진세는 아들더러 자꾸 앞에 서라고 했다.
창억이는 아버지의 심정이 짐작되여 앞에 나서서 몸을 더 억척스럽게 놀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늘은 전에없이 더 파랗게 높아지고 시원하게 틔여보였다. 여러 마리의 새들이 고운 목청으로 지저귀며 서로 쫓거니 쫓기거니 하면서 머리우에서 날아돌았다.
창억이 눈살을 찌프릴사하고 그 새들을 쳐다보며 벙글거리는데 뒤에서 아버지의 엄한 음성이 들렸다.
《네가 어떻게 하고 유격대에 들었느냐. 남이 한번 훈련하면 너는 백번 하구… 남들이 자도 너는 자지 말고 배워야 한다.》
《아버지, 걱정말아요. 내가 힘이 모자라요 총쏠줄 몰라요? 그전에 장포리도 총쏘는걸 보구 내 눈은 매눈이라고 했는데 걱정말아요.》
《글쎄
창억이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느라고 총을 추슬러 바로메고는 몸을 의젓하게 펴고 걸음을 척척 옮겨보였다. 그는 이렇게 한동안 걸어가노라니 위원이 된 아버지를 앞에 세우고 걷고싶어져 로인더러 앞서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김진세가 아들의 심중이 가늠이 되여 수염밑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 누가 볼라…》
《챠, 앞서라는데!》
김진세는 아들에게 떠밀리워 지는척 하고 앞에 섰다.
그는 두루마기는 걸치였으나 등이 구붓한데다가 걸음걸이며 활개를 젓는것이 볼품이 없었다.
창억이는 댓걸음뒤에 따라가며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나무라는 소리를 했다.
《허리를 꿋꿋이 펴라요, 쟈, 이거야 등짐을 지고가는 걸음이지 어디… 이젠 위원이 됐는데 활개랑 좀 크게 젓지 않구.》
《그만둬라, 생긴대로 걸으면 되지 허리가 굽었다구 체면이 깎이겠니?》
김진세는 이윽고 아들과 헤여져 토지개혁준비위원회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