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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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암촌은 동기와집과 초가집 3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앉은 산간마을인데 멀리에서 바라보기에도 그 전경이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마을복판에 서있는 정자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이 하늘을 간신히 떠받들고있는듯 하였다. 마을앞을 감돌아간 시내는 눈속에 묻혔다. 마을뒤의 비탈밭
한가운데에 서로 의지하고 붙어선 커다란 바위가 높이 솟았는데 쌍암촌이란 마을이름이 그 바위에서 나왔으리라는것이 인차 알렸다.
장군님께서 전령병과 함께 마을에 들어서신것은 저녁무렵이였다.
마을길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고 집집의 문들은 굳게 닫겨져있었으나 촌쏘베트쪽에서만 지붕에서 날름거리는 불길을 끄느라고 대여섯명의
농민들이 쇠스랑으로 불이 달린 짚을 긁어내린다, 눈을 뿌려올린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한시간전에 마을에 달려들어 략탈질을 한 구국군들이 지른
불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불을 다 끈 다음 쏘베트사무실로 들어가 그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쌍암촌의 형편은 마촌과
비슷하였다. 그런데 유격근거지의 중심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이 외진 마을은 근처의 산속에 숨어있는 구국군들의 략탈질에 시달리고있었다. 농민들은 앞을 다투어
왜놈들과 싸우지는 않고 략탈질을 일삼는 구국군들에게 원망에 찬 말을 퍼붓는가 하면 쏘베트지붕에 불이 달렸는데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 마을사람들을
나무리였다. 그러자 얼굴이 강마른 농민이 쏘베트가 시책을 잘못 써서 사람들에게 돌리였기때문에 그런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말을 주의깊이 듣고계시던 장군님께서는 구국군들이 쏘베트에 달려들어 자주 행패질을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내내 말이 없이 고개를 숙이고있던 얼굴이 너부죽하고 무던하게 생긴 농민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나이가 마흔살쯤 되여보이는 그 농민은 자기를
지유복이라고 소개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때까지는 량곡이나 수탈해갔는데 오늘은 도대체 무슨 심산인지 쏘베트회장을 잡아가겠다고 으르다가 그 사람이 몸을 피하고 없자 이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습니다. 장군님, 제 무식한 소견에두 그것들이 쏘베트에 무슨 승치를 먹은것 같습니다. 우리
조선사람들한테도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데 그 사람들한테야 달가울리 있겠습니까. 쏘베트는 그 이름부터가 생소해놔서 첨부터 모두 정을 붙이기
어려워했습니다. 여기에 쏘베트가 첨 생겼을 때 현에서 큰 쇠버치를 마차에 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낯선 말에 혀가 잘 돌지 않아 쏘베트를
쇠버치라고 부른 사람들이 있어 그런 소문이 돈것 같습니다. 쇠버치가 얼마나 큰가 구경하자고 찾아오는 로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쏘베트가 우리 농군들 심정을 알아 못 주고 시키는 일들도 다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왜놈들이 없구 지주가 없는 정치구
해서 여태까지 참아왔는데 이제는 저 구국군들까지 접어드니 어떻게 합니까? 마을에 있는 얼마 안되는 적위대로는 도저히 막아낼수 없습니다.
장군님, 이 고장에두 유격대부대를 주둔시켜주시면 마음편히 살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날 밤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쏘베트의 그릇된 시책들과 이미 카륜회의에서 제시하고 명월구회의에서
구체화하신 인민혁명정부로선에 대하여 알기 쉬운 말로 하나하나 깨우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구국군들과는 무력으로 맞설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혁명에 대하여 옳은 인식을 가지도록 참을성있게 꾸준히
좋은 정치적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밤이 깊도록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신 그이께서는 자정이 썩 지나서 쌍암촌을
떠나시였다.
하늘에 얼어붙은 둥근달은 눈길우에 차거운 달빛을 깔았다.
발밑에서 눈밟히는 소리가 빠드득빠드득 하고 울렸다.
장군님께서는 털외투의 호주머니에 손을 지르시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가시였다.
그이의 군화밑에서 눈이 다져지는 소리가 성림의 가슴을 아프게 저미였다.
장군님께서 마을을 떠나서 퍼그나 걸어나오시였을 때 뒤에서 웬 사람이 따라오고있었다.
지유복이라는 농민이였다.
그는 덧저고리의 품속에서 검정보자기에 싼 자그마한 꾸레미를 꺼내여 전령병에게 내밀었다.
전령병은 한걸음 물러섰다.
《이게 뭡니까?》
《아까 방에서 보니까 장군님께서 발이 젖어계시던데 갈아신도록 해주시오.》
아래목에 놓아 덥힌것인지 따뜻한 온기가 스며있는 버선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다가서시여 우리는 노상 발이 젖어있는데 습관이 되여 괜찮다고 하시며 굳이 사양하시였다. 그러자
농민의 얼굴에는 노여움에 가까운 서운한 빛이 어리였다.
《저희들이 아무리 도리가 없어두 어찌 발이 젖어계시는 장군님을 이 추운 길에 떠나보내고 발편잠을 자겠습니까?》
농민은 물러설 잡도리가 아니였다.
장군님께서는 하는수없이 받아야겠다고 전령병에게 이르시였다.
전령병이 버선을 받고 장군님께서 사의의 말씀을 하신 뒤에도 지유복은 물러설 차비를 안했다.
그는 덧저고리의 앞자락을 바로 여미기도 하고 두손을 마주잡기도 하면서 쭈밋거리기만 했다.
《우리 걱정은 마시고 추운데 어서 들어가보십시오.》
그러나 지유복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사죄하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까는 장군님께서 무한정 아량을 보여주시니 모두 별의별 소리를 다했습니다.… 쏘베트를 내오구 처음 정치를 하는건데
어떻게 백이면 백가지를 다 잘하겠습니까.… 유격대는 목숨들을 내놓구 왜놈들과 싸우는데 여기서는 그까짓 밭 몇평을 공동소유에 내놓는다구 가슴들을
앓는데 그저 저희들이 깨지 못하구 제 리속만 생각다나니 그렇습니다. 이 깨지 못한것들의 말을 흘려버리시구 개운하신 마음으로 돌아가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그와 헤여진 다음에도 여러번 뒤를 돌아보시였다. 지유복농민 역시 가다가는 돌아서서 이쪽을 바라보군했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이 어스름속에 녹아없어지자 장군님께서는 성큼성큼 걸음을 다그치시였다.
(아, 어떤 인민인가?)
눈보라가 일었다. 안개구름처럼 하늘을 뒤덮는 눈보라는 달을 삼켜버렸다.
그이께서는 몸을 앞으로 숙일사 하고 바람과 싸우며 힘겨웁게 발걸음을 내디디시였다. 외투자락이 바람을 안고 펄럭거렸다.
맞받아 밀려드는 눈보라에 숨이 막히고 속눈섭이 떡떡 얼어붙었다.
야수의 아우성처럼 울부짖으며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속을 걸어가시는 그이께서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우다가는 얼어붙는
속눈섭을 씻군 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