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1 장

6

(3)

 

이틀날 김진세는 온성으로 나가 윤치석이앞에 엎드려 큰절을 하며 사죄의 말을 하였다.

《로형, 용서하시오. 내 집에 못된자식이 있어 이 집 귀한 딸에게 방정치 못한 소행을 가하려 했으니 의절로 징계한대두 할말이 없소이다. 로형이 남의 불행을 틈타서 제 욕심을 채우려 했다고 매를 내려도 발명질할 소리 없게 됐소이다.》

조씨는 그것이 혼사말이란것을 인차 알아듣고 저고리고름을 눈에 가져갔다. 윤치석은 어서 주안상을 차리라고 엄하게 이르고는 김진세의 손을 이끌어 바로앉히며 방석을 권했다.

탁배기종지가 오가는 가운데 사연이 밝혀졌다. 취기에 얼굴이 벌개진 윤치석은 김진세를 능청스레 건너다보며 그의 얼굴에서 창억의 용모며 성모를 가늠해보는듯 했다.

이윽고 윤치석은 호방하게 무릎을 치며 웃어댔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바치고 둘사이에 그만하면 연분도 없지 않은것 같은데 백년가약을 맺자는것이였다. 그러자 문턱옆에 앉아서 내내 말이 없던 조씨가 화닥닥 놀라서 령감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원망의 빛이 번뜩이였다.

그 눈치를 인차 가늠한 김진세는 조씨를 돌아보며 어머니되시는분께서는 다른 의향이 계시지 않는가고 물었다.

조씨는 령감이 이미 승낙해버린 일이라 반대의 말은 못하고 문턱만 자꾸 쓸어만졌다. 김진세는 어머니의 심중을 가늠해볼수 있었다. 어느 집에서나 혼사말이 나면 색시편에서 서너번은 틀게마련인데 아무리 도적혐의를 쓰고 불쌍하게 된 딸자식이라고 해도 그렇게 한마디 말로 남에게 훌 주어버리겠는가 하는 불만일것이였다.

김진세는 우리도 왜놈들에게 쫓겨서 간도오지에 들어가 숨어사는 처지이고 이 집도 지주놈밑에서 갖은 고생과 수모를 당하며 사는 처지이니 두집이 사돈간이 되여 서로 돕고 살면 동기간처럼 의합이 잘될것이며 또한 이 집 딸을 며느리로 삼으면 비단필로 감싸주지는 못해도 친자식으로 여기고 마음고생만은 시키지 않을것이라고 달래는 말을 하였다.

조씨는 치마자락에 얼굴을 묻으며 서러웁게 울었다. 윤치석은 안해의 눈물에는 아랑곳없이 대범하게 웃으며 탁배기종지를 권하였다. 그것으로 약혼이 이루어졌다.

김진세는 그때의 일을 더듬어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그때 안사돈이 앞을 내다봤지. 으흠… 이 집에 이런 일이 생길줄이야.…)

이때 정지간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그는 보지 않고도 아들의 체취를 온몸에 느꼈다. 김진세는 얼른 일어나앉았다.

창억은 정지간에서 어머니가 묻는 몇마디 말에 언짢은 소리로 대답하는것 같더니 사이문을 열고 방에 들어왔다. 열려진 사이문을 통하여 정지에서 물동이를 안고 밖으로 나가는 며느리의 모습이 언뜻 비쳐들었다.

김진세는 노여움보다도 반가움이 앞서 더부룩한 수염밑에 미소를 머금고 아들을 쳐다봤다.

창억이는 그 억척스럽던 기세가 어디로 갔는지 후줄근해진 몰골이 되여 아버지앞에 서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이 잔뜩 실렸다. 피발이 선 눈만이 열기를 띠고 번쩍이고있었다.

김진세는 아들이 측은하여 싫은소리 한마디 없이 부드럽게 일렀다.

《게 앉거라.》

그리고는 자리에 앉은 아들의 무릎앞으로 담배쌈지까지 슬그머니 밀어주었다.

《한대 말아 피워라. 속이 상할 때는 동무가 되네라.… 일있냐? 피워라. 세상에 새 풍조가 휩쓰는 판에…》

창억이는 머리를 수굿하고 떨리는 손끝으로 담배를 굵직하게 말았다가 피우지는 않고 무릎밑에 감추어버렸다.

《그래 어떻게 됐냐?》

《안됐습니다.》

《음… 정 안된다더냐?》

《아주 갈라져버리면 어떻겠는지.…》

《갈라지다니? 리혼말이냐? 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냐?》

《말은 그렇게 안하지만 눈치가 뻔한데… 저게 차라리 고약하게 굴면 콱 내팽개치지 않겠습니까. 양같이 고분거려왔는데 제 혼자 잘되자구 어떻게 그런 모진짓을 하겠습니까?》

《음…》

김진세는 몸을 뒤로 젖힐사하며 대견한 눈으로 아들을 건너다보았다.

《옳다.… 그런짓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고 저애를 데려왔니.》

창억이는 머리를 수굿하고 말이 없었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김진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두 요새 속을 많이 썩였다. 이제는 어떻게 하겠니? 집에 정을 붙여라. 혁명을 할 사람들은 따로있는 모양이다. 자격이 없으면서 자꾸 머리를 들여밀어봤댔자 소용있냐. 아무리 생각해봐두 우리는 뒤에서 혁명을 시중들라는게다. 나하구 같이 농사나 짓자.》

그 말에 창억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아버지는 분하지 않습니까?》

《글쎄 분하면 어떻게 하겠냐?》

《나는 여기를 뜨겠습니다!》

《뜨다니? 엉?》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겠습니다!》

《또 그 생각이냐? 이전에 죽도록 고생하구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신다는 장군님을 네 재간에 어떻게 찾는다구 그러니? 또 장군님부대에선들 근거지에서 제멋대로 뛰쳐난 녀석을 받아줄것 같으냐?》

《떠나겠습니다!》

《이녀석아, 좀 생각해봐라. 장군님부대에는 모두 펄펄나는 장수들만이라는데 너는 갔댔자 짐이나 된다.》

《그게야 제할탓이지요.》

《정 고집을 부릴테냐?》

아들을 뚫어지게 쏘아보는 김진세의 눈에서는 분노가 펄펄 타올랐다.

창억의 얼굴도 사납게 이그러졌다.

《아버지가 절 일찌기 장가보내서 이 꼴이 됐는데 이제 와서 또 앞길을 막는단 말이요?》

김진세는 아들의 다음말을 잘 듣지 못하였다. 여태까지 가슴에 쌓이고쌓였던 노여움, 벼르고별러온 모진 마음이 배밑창으로부터 터져오르는 소리에 귀가 멍멍해져서였다.

로인은 무릎과 주먹을 우들우들 떨다가 목침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이녀석아!》

목침이 두쪽으로 갈라져 방바닥에서 딩굴었다.

온 집안공기가 얼어붙었다. 쥐죽은듯 한 고요가 흘렀다.

이때 밖에서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와지끈 하고 박산이 돼버리는 소리가 울렸다. 방안에서 터진 노성의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그 비명에 아버지와 아들은 얼굴이 해쓱해져서 마주보았다.

김진세는 불길한 예감이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어제꼈다. 불빛이 마당으로 쏟아져나갔다.

마당복판에 보금이 얼굴을 두손으로 싸쥐고 앉아있고 그의 둘레에서 번들거리는 물판우에 산산 부서진 동이쪼각들이 흩어져있었다.

《얘야!》

김진세는 놀라 소리치며 맨발바람으로 달려나갔다.

보금이는 얼굴을 싸쥔채로 정지문으로 달려들어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참사의 스산한 흔적처럼 마당에 널려진 동이쪼각들을 누가 볼세라 얼른얼른 주어모았다. 그런데 여기로 한 그림자가 급히 달려들었다. 오풍헌이였다.

그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고 두리번거리다가 동이쪼각들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이런 깨진게 뭐요?》

김진세는 당황해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닐세. 로친네가 물을 긷다가 그만… 아… 아무것도 아닐세.》

《동이가 깨졌군. 상하지는 않았소?》

《자넨 이 밤중에 웬일인가?》

《생각다못해 형님을 찾아왔소. 마형네 집으로 가기요!》

《엉?…》

《저녁녘에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여기를 뜨겠다는게 아니겠소. 이제 여기서두 공동식당을 내오구 토지는 뙈기밭까지 쏘베트에다 다 바치구 공동경작을 하게 된다면서… 가기요. 가서 말려야지. 허- 이거 동네에 큰변이 나겠소!》

《그 사람이 환장을 했군!》

《가기요. 우리 셋이야 결의형제를 무은 사이인데 이런 때 옳게 도와야 할게 아니요?》

이때 하늘에서 온 세상을 들부시는듯 한 총성이 메아리쳤다.

그들은 소스라쳐놀라 하늘을 쳐다봤다.

시커먼 하늘에 세방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그것은 유격대와 적위대의 비상소집을 알리는 신호였다.

창억은 아버지옆을 에돌아 길을 달려나가 총소리가 부르는쪽으로 정신없이 뛰여갔다.

개짖는 소리, 아이들의 바스라지는 울음소리, 이집저집 모퉁이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며 왁작 떠드는 소리들이 귀전을 스쳐지나갔다.

유격대병실로 쓰이는 영림서마당에 사람들이 빼곡 차서 설레였다. 처마밑에서 여러개의 불뭉치가 활활 타올랐다. 그옆에서 웬사람이 권총으로 하늘을 찌르며 웨치고있다.

《…체포해오라! 그것이 안되면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하라! 변절자와 타협하거나 동정하는자들은 가차없이 혁명재판에 고발하라! 동요분자들을 색출하며 우울분자, 불평분자들의 동태에 눈을 밝히라! 쏘베트를 사수하자!》

홍병일의 피타는 목소리이다.

창억은 사람들속을 비집고 들어가며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으나 누구 하나 그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얼굴이 감때사납게 생긴 적위대원이 역증을 내며 대답해주었다.

《잠을 잤댔어? 마동호네가 다 내뺐어.》

《뭐?》

《동호자식은 무기고에서 수류탄까지 훔쳐가지고 애비를 따라 도주했어!》

창억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종삼이 뙈기밭에서 콩대를 뽑아던지던 일이며 지붕우의 경비초소에서 동호가 몸부림치던 일이 가슴을 쳤다. 자기들을 적위대에 받아주고 맏형처럼 보살펴온 장룡산중대장에게라도 그 일들을 미리 알렸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창억은 제 일때문에 윽윽거리며 뛰여다니다나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홍병일의 옆에 서있는 장룡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홰불때문에 그의 얼굴은 이글이글 타오르는듯 하였다. 그는 이제 돌아오게 될 책임따위는 생각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듯 한 방심한 얼굴로 분노에 펄펄 뛰는 군중을 둘러보다가 억이 막히는듯 턱을 약간 쳐들사하고 눈을 꾹 내리감았다.

사람들의 분격의 파도속에서 5인조의 추격대들이 무어졌다. 창억은 장룡산이 책임진 추격대에 들었다.

5인조추격대들은 라자구쪽으로, 할바령쪽으로, 3도구와 석현쪽으로, 석두촌과 량수천자쪽으로 파견되였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1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