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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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베트에 모여앉은 몇몇 사람들이 《사회주의혁명》에 대하여 열변을 토할 때면 세상에 당장 놀라운 변화가 생길것 같았으나 밤이 가면 여전히 아침이 밝아왔으며 그리고 아침이면 동쪽산마루에서 여느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붉은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계절은 계절대로 흘러갔으며 생활은 생활대로 끓어번졌다.

김진세는 아침을 대충 걸치고 집아래모퉁이에 무져진 두엄무지를 번지였다.

그는 걸싸게 쇠스랑을 놀려 여름내 쌓인 두엄무지를 헐어번지며 새 무지를 쌓았다. 낡은 무지를 깊이 파헤치니 김이 문문 피여오르고 풀이 썩은 구수하고 시크무레한 냄새가 풍겨올랐다. 그가 팔뚝에 힘을 주며 쇠스랑을 앞으로 내뻗칠 때마다 두엄덩이들은 흰김을 꼬리처럼 날리며 새 무지로 씽씽 날아갔다.

그 김을 보느라니 래년 봄에 나가 이랑마다에 두엄을 듬뿍듬뿍 뿌리고 씨를 심으면 어김없이 풍년이 들리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흐뭇해지고 배심도 든든해졌다.

김진세는 이따금 허리쉼을 하며 여느때없이 활기에 넘쳐있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어떤 집에서는 내외간이 나와서 신바람이 나 감자움을 파다가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이야기판을 벌리고 떠들썩하게 웃어대는가 하면 다른 집에서는 도리깨마당질이 한창이여서 도리깨열이 곡식단을 후려치는 소리가 마을에 쿵쿵 울려퍼진다. 어떤 집에서는 서둘러 겨울나이차비를 하느라고 싸리나무로 새로 엮은 울바자를 둘러치는가 하면 다른 집에서는 지붕에 새로 조짚을 잇고있다. 여러 집의 지붕들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들이 해빛을 받아 금방 활활 불타오르기라도 할듯이 빛갈이 유난스럽게 빛난다.

마을길로는 곡식포대를 실은 소발구 서너대가 느릿느릿 움직여가고있다. 물방아간으로 낟알 찧으러 가는 소발구들이다.

제일 앞에서 소발구를 몰고가는 키가 작달막한 농군이 드문드문 소궁둥이에 나무회초리를 먹이며 골안이 떠나가게 노래가락을 불러넘긴다.

 

농부일생 무한하니

춘하춘경 년년사라…

 

지붕을 예던 사람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손을 내흔들며 소리친다.

《예보게- 칠성이- 자네가 방아간걸음을 하다니, 이게 웬일인가?-》

소발구를 몰아가던 땅딸보는 노래를 뚝 그치고 그를 쳐다본다.

《성님- 내라구- 세상덕을 못 입는다는 법이 있소다?-》

《허긴 그래- 생남을 했다더니 한턱을 쓸텐가?-》

《모두 정 소원이면 두턱두 내겠수다-》

《허- 님자 그 말이 멋지다. 새 세상에 새 아들이라- 두턱두 낼만하지비, 엉? 흐흐흐…》

김진세는 수염밑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돌아서 다시 쇠스랑질을 하는데 봉남이가 달려나와 바람개비를 돌리며 김이 문문 날아오르는 두엄무지둘레를 돌아갔다.

봉남이는 바람개비가 김속으로 들어갈 때면 제법 구름속을 나는 비행기처럼 붕- 붕- 하는 소리까지 내며 두엄무지옆을 좋아라 뛰여다녔다.

《이녀석아, 네가 자꾸 뱅글뱅글 도니 어지러워서 일을 하겠니, 저-리 가서 놀아라!》

그는 이렇게 엄하게 꾸짖었으나 부모없이 자라 언제나 할아버지곁을 떠나지 않는 녀석이 측은하여 손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무릎을 기운 바지가랭이를 너펄거리며 맨발로 두엄냄새속을 뛰여다니는 녀석의 코구멍에서는 버들강아지만 한 코물이 흘러내려 입술우에서 대롱거리다가도 숨을 들이키면 훌쩍 말려들어가는것이였다.

김진세는 손자를 붙잡아 나무가리옆으로 끌고가서 가둑잎을 뜯어 코밑을 닦아주었다. 봉남이는 바람개비에 정신이 팔려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만 하였다.

김진세는 들까부는 녀석의 볼기를 철썩 때려주었다.

《이녀석아, 코를 시원히 풀고다니면 숨쉬기도 헐하지. 옷주제는 이게 또 뭐냐. 놀데가 없어서 두엄무지옆에서 뛰여다녀? 저-리 가 놀아라!》

이때 뒤에서 누군가의 건드러진 목소리가 울렸다.

《형님, 안녕하시우?-》

돌아보니 오풍헌이다.

지게를 진 그는 물동이만 한 호박을 안고 뚱기적거리며 다가왔다. 지게에 올려놓은 삼태기안에도 크고작은 호박이 가득 들었다.

너부죽한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넘친다.

《형님, 호박이 이렇게 큰걸 본 일이 있수다?》

김진세는 호박도 호박이려니와 그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손자를 놓고 달려나가 호박을 쓸어만지며 같이 기뻐하여주었다.

《여보게, 정말 희한하이. 내 난생 이렇게 큰 호박은 처음 보네!》

《지난봄에 저 가재골어귀에 대충 뚜지구 심어놓구는 여태 잊고있었수다. 원, 글쎄 제 혼자 이렇게 크다니. 이놈두 세상이 달라진걸 안 모양이우다.》

《글쎄말이네, 허허허…》

《그전같으면 변지주놈이 당장 갖다바치라구 호령하지 않겠수다? 첨에 따가지구 척 안았을 때는 어디로 해서 숨어갈가 하고 두리번거리게 됐수다. 그러다가 아니 이 정신 봐라, 이제야 뭐가 겁날게 있어 하는 생각이 들어 큰길로 버젓이 걸어오며 이집저집에 들려 자랑도 하면서 올라왔수다. 흐흐흐…》

그들이 이렇게 기쁨을 나누는 사이에 봉남이는 호박을 어루만져보며 《야- 야-》 하고 환성을 지르다가 좀 안아보자고 졸라대였다.

김진세도 손자녀석에게 안겨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오풍헌이는 발등을 깬다고 하면서 품에서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이놈을 쪄놓구 형님네를 청하겠으니 그때 맛을 같이 봅시다.》

봉남이는 찌뿌둥한 얼굴로 뚱기적거리며 멀어져가는 오풍헌의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우리 호박은 왜 저렇게 크지 못하나?》

철없는것의 애타는 목소리는 김진세의 가슴에서 아들 창억이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내비치지 않고 손자의 차분한 머리칼을 말없이 쓸어만져주었다.

(남들은 모두 저렇게 일이 척척 잘돼가는데 우리 일은 왜 틀어지기만 하는겐가?…)

봉남이는 자기 머리를 쓸어주는 껄껄한 손바닥을 거쳐 할아버지의 기분이 전해져왔던지 눈이 올롱해져서 그 손을 살며시 치워놓고 어슬렁어슬렁 바깥쪽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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