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2

(1)


그들이 이런 한담을 나누고있을 때 문득 《중전마마 듭시오.》하는 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응접실문이 열렸다.
외국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바로잡기도 하고 머리를 비다듬기도 했는데 모두의 얼굴에 엄숙하고도 긴장한 표정이 어려있었다.
화려하게 왕비정장을 한 민비가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방에 들어섰다. 그의 뒤로 세자와 세자비 그리고 시녀들이 경건히 따랐다.
민비는 왕비상복인 금박실로 수놓은 자주색치마를 바닥에 철철 끌리게 입었고 역시 금박수실로 수를 놓은 대홍색로의를 입었으며 머리에는 큰머리를 얹고있었다. 붉은색계통으로 통일된 그의 옷차림은 화려하면서도 무게있어보였다. 처녀처럼 날씬한 몸매, 진주분으로 하얗게 화장을 한 류달리 아름다운 얼굴, 영채롭게 빛나는 눈은 아래를 굽어보는데 습관된 사람들의 눈에서 찾아볼수 있는 그런 자부와 긍지, 엄정스러움이 깃들어있었다. 한마디로 이날 민비는 황홀하리만큼 우아하고 매혹적이였다.
다까하시 나쯔미는 조선의 왕비가 이처럼 아름다울줄은 몰랐다.
첫날 접견시에는 너무도 위엄스런 존재앞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도 쳐들지 못하다보니 언제 민비의 얼굴을 볼수도 없었던것이다.
무게있으면서도 조용한 걸음새로 외국손님들의 앞으로 다가온 민비는 그들 한사람한사람과 일일이 인사말을 나누었다.
민비는 그중 년장자이고 독신녀인인 로씨야 웨벨공사 부인의 언니 손타크부인과 인사말을 나누었다.
《모처럼 와주셔서 반갑습니다.》
손타크는 유럽식으로 젊은 녀인처럼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인사말을 건네였다.
《전하, 명절을 축하하옵니다.》
《고맙습니다.》
민비는 기지있고 해학적인 인사말로 긴장하게 굳어져있던 외국손님들의 마음을 대번에 풀어주었다. 그 녀자는 키가 큰 로씨야공사 웨벨 부인을 보고는 조선의 가마가 천정이 낮아 고통스럽게 왔겠다고 해학적인 동정을 표시하는가 하면 처녀의 몸으로 호랑이가 출몰하는 조선의 강원도지방을 려행하고 돌아온 영국처녀 비숍더러는 진정 영국의 쟌 다르크라고 추어주기도 했으며 맨 녀성들속에 끼운 유일한 남성인데다가 목이 긴 알렌에게는 《종자수닭》같다는 롱말로 장내에 폭소가 일어나게 만들기도 하였다. 지어 황송한 심경에 잠겨 뒤전에서 어쩔바를 모르고 서있는 나쯔미에게는 어서 앞으로 나오라고 오늘은 우리 동양사람들의 명절이기때문에 응당 동양인들이 주인노릇을 해야 한다고 고무해주기까지 하였다.
인사를 마친 민비는 손님들을 어느 넓은 방으로 안내하였다.
《연회탁으로 가시기 전에 제위들에게 보여드릴것이 있습니다.》
민비를 뒤따라 래빈들이 넓은 방에 들어서자 뜻밖에 취주악으로 연주하는 조선민요 《아리랑》의 선률이 방안을 꽉 채우며 울렸다. 꿩깃을 꽂은 붉은 주립을 쓰고 남천릭을 입은 10명의 악사들이 트럼베트며 트럼본, 호른이며 흘류트 같은 양악기를 신이 나서 불어대는것이였다.
놀라는 래빈들의 얼굴을 웃는 눈길로 돌아본 민비가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작년 미국의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갔던 우리 악사들입니다. 이채로운 우리의 나팔소리에 조선관은 늘 초만원을 이루었다는군요. 우리 동양사람들은 나팔도 불줄 모르는 미개인으로 생각했던 서양인들이 놀랐다나봐요. 저 악사들은 지금 일본의 륙해군군악대 교관인 독일(도이췰란드)사람 에켈트에게서 나팔 부는 법을 배웠습니다. 듣자니 그 에켈트씨가 일본국가인 <기미가요> 도 작곡해주었다고 하더군요 에켈트씨는 우리 나라에도 오겠다고 했습니다. 우린 이제 일본을 릉가하는 동양최고의 왕실군악대도 꾸리렵니다.》
민비의 얼굴은 신심으로 빛나고있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였다.
이때로부터 몇해후에 우리 나라에는 동양에서 첫번째로 손꼽히는 군악대가 꾸려져 사람들을 놀래웠다. 하지만 불행한 민비는 그것을 볼수 없었다.
《자, 저쪽으로 갑시다.》
민비는 래빈들을 한쪽벽밑으로 이끌고갔다. 푸른 비단보를 씌운 길다란 탁자우에 진렬되여있는 수공예품들을 가리키며 민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작년에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수공예품들입니다. 고려청자기, 백자기, 수병풍 등인데 미국딸라로 천불정도입니다. 이제는 초벌경험도 쌓았으니 다음 박람회때에는 더 많이 출품하고 악사들도 더 많이 보내렵니다.》
웨벨 부인이 조선도 국제무대에 적극적으로 진출한다고 못내 감탄했다.
《예. 이제는 우리 나라가 <은둔국> 이 아닙니다. 십년전에 우리 나라를 다녀간 퍼시벌 로웰씨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책을 출간했다는데 실상 우리 조선은 이름그대로 빛나는 아침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민비의 눈빛은 긍지로 빛발쳤다.
《그런데 저 표쪽을 보십시오.》
민비는 진렬대우에 놓인 《COREA》란 표쪽을 가리켰다.
《우리 나라 국호의 첫 글자가 씨(C)이기때문에 영어자모순위로 진렬하는 박람회에서 그중 앞자리에 놓였답니다.》
다까하시부인은 흥미를 느끼며 《저, 그럼 우리 일본은?》 하고 물었다.
알렌이 어깨를 약간 으쓱하며 비양스럽게 말했다.
《부인, 일본은 영어식표기로 쟈판(JAPAN)이니까 코레아보다 한참 뒤자리를 차지합니다.》
알렌의 비꼬는 말투에 민비도 웃음을 머금었다.
민비는 일본의 대리공사 스기무라의 부인이 본국에 가있어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대신 일본녀인으로 장사군 다까하시의 부인 나쯔미를 초청했는데 그것은 민비가 개인적으로 다까하시에게 적잖은 돈을 빚졌기때문이였다. 이해에 조정이 외국사람에게 걸머진 빚만 하여도 70여만에 이르렀다.
《자, 이제는 연회탁으로 갑시다.》
손님들을 이끌고 연회장으로 향하는 민비의 허리는 곧았고 걸음은 힘이 있었다.
민비는 도중에 뒤따르는 시녀에게 조용히 분부했다.
《진령군더러 전라도광대패의 놀이를 외국손님들에게 구경시킬수 있도록 잘 조처하라고 일러라.》
《알아모셨사와요.》
나쯔미는 민비의 침전인 건청궁 옥호루 연회장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천정에서는 밝은 무리등이 비치고 문쪽에는 십장생을 수놓은 8폭짜리 화려한 병풍이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방의 네 모서리에 놓여있는 청동화로에서 이글거리는 백탄불로 하여 방안은 훈훈하였고 벽에 꽂혀있는 향촉에서 몰몰 피여오르는 향연으로 하여 기분이 상쾌하였다.
조선식과 양식이 배합된 방안은 화려하고 아늑하고 정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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